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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78]아름다운 추억을 주신 아버지, 고맙습니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4-04 10:22:31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

◈최홍련(연길)

륙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나는 소학교에 입학할 때 학비 5원 내보고 그 후 학잡비를 내본 기억이 없다. 초중 때는 학교에서 보조금도 한번 받았다. 언니들 입던 옷을 받아입고 신발까지 신던 걸 받아신어야 했으니 잘사는 집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가.

공부만이 나를 구제할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했다. 소학교 때 학급에서 위생위원을 담당했고 졸업할 때 전교의 2명 우수학생중 한명으로 각 과목 95점 이상 맞았다.

개체호가 방금 성행할 때 우리 집에선 식품소매점을 했다. 은행대출 500원. 이름도 현란했던 ‘모녀상점’, 아마도 아빠는 딸 넷이라구 딸부자 자랑을 하고 싶었나 보다. 그 때 우리가 살던 조양천진에는 개체호가 겨우 ‘서천상점’, ‘마가네상점’과 우리 집 ‘모녀상점’을 통털어 세집 뿐이였다.

아빠는 평소에 직장에 출근하고 일요일엔 가게 일을 보셨다. 월급 58원으로 여덟 식구의 입을 먹여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가. 아빠의 술주정이 늘어갔다.

이모 둘이 직장에서 나눠주는 흰 로동장갑을 가져오면 엄마는 그걸 풀어서 실옷을 떴다. 핑크색으로 염색하고 앞에 수놓이까지 하면 그렇게 이쁠 수가 없었다. 일이년 후에 입을 옷도 여벌로 떠놓았다. 체질이 약한 엄마는 항상 언제 갈지 모른다면서 미루살이를 하는 것이였다.

인구당 배당으로 공급하는 입쌀은 몇근 안되고 옥수수쌀도 얼마 안됐다. 쌀 몇근이라도 더 챙기려고 엄마는 입쌀 대신 옥수수쌀을 바꾸어 옥수수밥, 옥수수떡(锅贴) 같은 걸 해주었는데 가마에 붙는 가마치는 먹을 게 없는 그 시절엔 진짜 과자처럼 맛있었다. 밥이 적을 때면 서로 눈치를 보다 보니 오히려 밥이 남을 때가 많았다. 생활이 어려우면 더 빨리 철이 든다더니 그런 기억 때문인지 나는 지금도 밥에 옥수수 넣는 건 싫어한다.

다행히 우리는 1981년부터 식품상점으로 생활이 펴이기 시작했다. 학교 갔다 오면 나의 임무는 펌프를 자아서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는 일이였고 그다음 공부를 해야 했다. 그리고 상점일도 같이 돌봐야 했다.

식품상점이라 했지만 팔아봤자 몇가지 안된다. 과자는 둥근 밀가루과자와 네모난 기름과자 두가지 뿐이고 사탕은 새우사탕(虾糖), 과일사탕(水果糖)이 전부였다. 술도 찔광이술(山楂酒)과 이과두(二锅头) 두가지에 그와스(格瓦斯)라는 맥주 비슷한 음료가 고작이였다. 그리고 근들이로 떠서 파는 간장과 흰술이 있었다.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상업을 배우는 일터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살던 우리 생활에 보탬이 된 상점은 우리 가족에 희망을 안겨주는 불씨였다.

아버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직장에 출근하는 터라 일요일이면 유난히 바빴다. 장공장에 가서 간장, 된장을 실어오고 식품공장에 가서 사탕, 과자들을 실어오고 근들이로 파는 술도 밀차로 실어들였다. 우리 자매들도 시간 타서 아빠를 도와 같이 일을 거들었다. 배추김치 철이면 하루에 두세번씩 공소사에 가서 소금을 실어왔다.

지금처럼 아스팔트길이면 쉬웠겠지만 예전엔 비가 조금만 와도 길 전체가 흙탕물로 웅뎅이 천지여서 밀차에 무거운 짐을 싣고 끌기엔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아빠의 목엔 항상 세수수건이 하나 둘려있었다. 이러한 추억이 나를 악착같이 살게 하고 끈질기게 일하여 사업에서도 성공하게 하였으며 스스로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가게 하면서 애 둘을 다 잘 키우게 한 것 같다.

그런데 나에게는 지금까지 여직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다. 어느 날, 학급 애들이랑 줄 지어 가는데 아빠가 마침 장공장에서 밀차에 장, 간장 통을 가득 싣고 나오는 것이였다. 그러나 나는 모르는 사람처럼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그 때 그 순간 내가 아빠를 도와 안 드린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운지 모른다. 이 일은 4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내 맘을 후벼놓고있다. 난 정말 맹랑하고 못된 아이였던 것 같다. 정말 평생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만든 것이다. 당시는 자본주의길이요, 소생산이요 뭐요 하면서 비판도 받을 때여서 눈치를 볼 때였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핑게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리유건 어떤 핑게건 잘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아빠, 미안합니다. 그동안 속심말 한번 못하고 맘속에만 두고 있던 말들을 오늘 청명을 맞으며 구천에 계시는 아빠께 글로 써서 사과드립니다. 그래야 맘속에서 묵은 빚을 툭툭 털고 편히 살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우리 아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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