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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77]‘땅소나기’ 할아버지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3-29 11:15:59 ] 클릭: [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

◈김삼철(룡정)

당년의 ‘땅소나기’ 김병인로인(84세). 당시 조선에 사는 한 친척 화가가 놀러 왔다가 그렸다고 함.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연길현 태양인민공사 중흥대대 제7생산대(지금 연길시 조양천진 중평촌 제7촌민소조)에는 김병인이라는 로인이 계셨는데 목소리가 류달리 높아 그 소리가 10리를 갔고 마을사람들은 그를 ‘땅소나기’라 불렀다.

‘땅소나기’는 30여세 되던 때에 태양구 백석 골안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당시 마을에서는 울바자가 없이 터밭 채소농사를 지었다. 30여호 마을에서 집집마다 닭, 오리를 키웠는데 이전에는 여름이면 닭들이 채소를 쪼아먹어 절단하였지만 ‘땅소나기’가 이사 오면서 마을의 닭, 오리 등 도깨짐승들이 꼼짝 못했다고 한다. ‘땅소나기’가 산비탈에서 “독수리여!-”, “독수리여!-” 하고 소리칠 때면 10리 골안이 쩌렁-쩌렁- 진동하여 하촌에서까지 들리였고 닭, 오리들은 무서워 모두 제 굴로 들어가 떨었다고 한다. 날아가는 산새들도 기겁하여 멀리 피신했다고 한다. 참!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그러나 ‘땅소나기’의 셋째손자로 이 세상에 태여나 한집에서 살아온 나는 잘 알고 있다. 할아버지의 음성은 어찌나 높은지 집안에서 조용히 말해도 밖에까지 다 들려 우리 집에는 비밀이 없었다. 좀만 성이 나면 큰소리로 호령하는데 그 때면 온 마을이 쩌렁쩌렁하여 우리 집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는가 하며 마을 분들이 모여오군 하였다. 내가 10여살 되던 해부터는 내가 보이지 않으면 내 이름을 불렀는데 2리 밖의 아래마을에 놀러 갔다가도 부름소리를 듣고 인차 달려오군 하였다.

‘땅소나기’ 소문이 퍼지면서 태양구 구정부 간부들은 우리 할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연변주정부 정용선 간부는 태양구에 하향할 때면 꼭꼭 들려보군 하였다.

할아버지는 회갑이 되는 해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저세상으로 먼저 보내고 속을 태웠는데 몇년 지나지 않아 또 로친까지 앞세우다 나니 심병에 걸려 우울증도 심각했다. 한번은 독약으로 자살까지 시도한 것을 맏형님이 요행 빠앗아내여 물도랑에 던져버린 일도 있다. 할아버지는 심병에 걸렸던 몇년간은 우울해하면서 말수가 매우 적었고 소리도 치지 않았다.

그러다 맏손자가 결혼하고 증손들이 다섯이나 생기면서 화기를 찾았고 얼굴에 웃음이 피였다. 증손녀에 증손자까지 련이어 안아보게 되니 너무 반가워 매일 증손군들을 번갈아 업고 다녀 마을에서는 ‘보모할아버지’라고까지 친절히 불렀다. 그 때는 큰형님을 따라 가정이 룡정시교 광신촌에서 생활할 때라 ‘땅소나기’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4대 식구가 한집에서 생활하다 보니 세 손자의 자식들이 10여명으로 늘어나면서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는 것 같았다. 증손군들을 번갈아 불러들이다 나니 자주 소리를 쳐서 그런지 할아버지 소리는 그 진동력이 더욱 컸다.

년세가 80이 넘었는 데도 터밭 채소전을 알뜰히 가꾸었고 보통음성도 남보다 한옥타브 높아 처음 대하는 사람은 성부터 낸다고 좋아하지 않았다. 마을에서는 사람 찾는 일이 생기면 의례 우리 할아버지를 찾아오군 한다. 그러면 우리 할아버지가 한번 아무개- 하고 부르면 그 분들은 인차 달려왔다. 한번은 증손녀 영순이가 4리 밖의 룡지촌학교에 놀러 갔는데 할아버지가 “영순아!” 하고 소리치니 영순이가 인차 달려왔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소리만 높은 것이 아니라 방귀소리도 유별나게 높아 집에서 뀌는 방귀소리가 뒤집까지 들리여 마을사람들을 웃기였다. 한번 방귀를 뀔 때면 마치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련발하는데 그 소리가 높아 듣는 사람마다 놀라와하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방귀는 건강의 상징이였다. 방귀가 심하다고 병원까지 가보았으나 할아버지의 신체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1965년 겨울, 할아버지의 셋째손자 즉 나의 약혼녀가 처음 집에 놀러 왔었다. 모두들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방에서 점심상을 받으며 방귀를 뀌였다. 그 소리가 기관총소리처럼 요란하여 나의 약혼녀는 손에 쥔 숟가락까지 놓치며 배를 끌어안고 웃었다. 그러나 곁에 있는 10여명 식구들은 모두 말없이 조용하였다. 약혼녀가 머리를 들어 식구들을 둘러보니 모두들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은 자주 듣는 소리라 례사로왔지만 새 손비에게는 난생처음 듣는 놀라운 소리였던 것이다.

내가 할아버지 방귀 력사를 이야기하니 약혼녀는 또 죽겠다고 웃어대였다. 그 날 오후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그녀는 할아버지 방귀소리를 생각하며 길에서 실신한 사람처럼 계속 웃으며 걸어갔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후에 안해가 자식들에게까지 이야기하는 바람에 지금도 나의 세 자식들은 방귀소리만 나면 옛날 어머니가 로할아버지의 방귀소리에 놀랐던 이야기를 하며 한바탕 웃음판을 벌린다.

할아버지의 ‘땅소나기’ 음성과 기관총소리 같은 방귀는 확실히 할아버지의 건강비결이였던지 90세까지 병원 한번 가보지 않고 건강하게 생존하시였다. 돌아가시던 그 해 여름에도 오전에 한전 기음을 매고 점심에 오이랭국에 점심을 잘 잡수시고 목침을 베고 점심 낮잠을 주무셨다. 오후 3시가 되여도 깨여나지 않으니 큰아주머니가 방에 들어가 깨웠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사망하시였다. 병원의 의사를 불러 확인하니 할아버지는 자는 중풍을 맞아 사망하였다고 하였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피 한방울 보이지 않고 깨끗이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가시였다. 1976년에 세상을 뜬 우리 할아버지는 당시 사회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장수로인이였다.

‘땅소나기’로 이름을 날렸던 우리 할아버지는 일찍 청소년 때부터 붓글씨를 잘 써 표창을 받았고 례의범절이 밝아 촌 군중들의 존경을 받았는데 1950년대에는 중흥촌로인회의 총책임 ‘조니’(지금의 회장 직함)로 김주사라고 불렸다.

할아버지의 ‘땅소나기’ 유전자는 셋째손자인 나에게 전해졌는지 나는 지금 79세 나이에도 신체가 아주 건강하고 음성이 보통사람보다 몇갑절 높아 처음 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성을 낸다고 오해하군 한다.

‘땅소나기’ 별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웃음을 남기며 행복했던 시절은 인제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았다.

1935년 봄 필자의 할아버지 ‘땅소나기’ 4형제의 가족사진. 앞줄 오른쪽으로부터 두번째가 할아버지(안은 아이는 맏형님 김우철), 세번째가 할머니 최씨, 중간줄 오른쪽 세번째가 모친 박련옥, 뒤줄 오른쪽 첫 사람이 부친 김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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