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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전, 한쌍의‘커다란 눈' 때문에 전국을 울렸던 녀자애, 지금 어떻게 됐을가?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新华网 ] 발표시간: [ 2021-09-14 11:32:37 ] 클릭: [ ]

이 사진은 많은 사람들이 보았을 것이며 또한 수없이 많이 보았을것이다. 사진속의 반짝이고 기대에 찬 이 커다란 눈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흑백사진속의 이 녀자애는 낡고 해진 옷을 입었고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작은 손에 연필을 쥔채 책상앞에 앉아있다. 가냘픈 표정에 한쌍의 밝고 순진한 눈동자는 상대를 응시하고 있는데 강렬하고 갈망적인 눈빛을 내뿜고 있다. 이는 바로 무수한 빈곤지역 어린이들이 마음속으로부터 웨치는 “나는 공부할래요”라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듯 싶다.

1991년 <나는 공부할래요> 로 제목을 단 이 사진은 세상에 알려지자 마자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내심의 놀라움과 함께 심지어 눈물을 흘리게까지 하였다. 그때로부터 희망공정은 전 사회의 광범한 주목과 지원을 받았으며 무수한 실학 아동들이 다시금 교정에 돌아와 학업의 꿈을 이루게 하였다. 사진속의 주인공인 당시 겨우 8살밖에 안된 소명연은 사진을 찍은 후 의외로 ‘명인'이 되였는바 희망공정의 가장 영향력있는 대변인으로 되였으며 이로 하여 그의 인생도 바뀌게 되였다.

눈 깜짝 할 새에 30년 세월이 흘렀다. 사진속의 이 녀자애는 후에 어떻게 되였으며 어떤 인생을 보내고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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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소명연은 안휘성 금채현 도령향 장만촌의 한 평범한 농촌가정에서 태여났다. 아버지는 고기잡이와 누에치기, 양돈과 밭일, 밤농사를 하면서 한가족이 힘들고 빠듯한 농촌생활을 했다. 사진을 찍을 당시 소명연은 안휘성 금채현 장만소학교 1학년에 다니고 있었는데 매학기 6,70원 되는 학잡비가 가정에서 제일 큰 부담이였다.

산간지역은 교수조건이 차해 학생들이 공부하기가 매우 간고했다. 소명연은 그때 당시 장만소학교를 다닐때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교실은 낮고 헐망했으며 겨울이면 돈이 없어 창문유리를 넣지 못하고 비닐박막을 씌우자보니 광선이 좋지 않았기에 찬바람이 그대로 교실에 불어들었다. 학생들은 항상 추위때문에 몸을 옹송그리고 공부를 견지해야 했다.

금채현 희망소학교의 전신- 팽씨사당(자료사진)

1991년 5월의 어느하루, 소학교 1학년에 다니던 소명연은 한창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었다. 처녀애의 지식을 갈구하는 듯한 큰 눈은 학교에 와서 취재하던 기자 해해룡의 눈에 들어왔다. “그 눈빛은 매우 강한 관통성이 있었는데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연필을 쥔 소명연이 다시 머리를 들어 흑판을 응시할 때 해해룡은 재빨리 사진기 샤타를 눌렀던 것이다.

“나는 공부할래요“ 라고 제목을 단 이 사진은 발표된 후 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려주었다. 이 사진은 중국희망공정의 홍보표징으로 되였으며 국내 각 매체들에서 다투어 전재하였는데 소명연도 이와 함께 희망공정의 형상대표로 되였다. 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실학위기에 처한 농촌 빈곤아동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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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처음으로 소명연에게 지원의 손길을 보내준 것은 리만이였다, 그는 자신의 얼마 안되는 수당금을 모아 매 학기마다 소명연에게 100원을 보내주었는데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보내주었다. “중학교 공부를 할 때 맘씨 고운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어떤 꼬마친구들은 용돈을 모아서 보내주었습니다. 어떤 대학생들은 업여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저에게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천진시의 한 퇴직한 로인은 제가 초중부터 고중까지 공부하는 동안 해마다 명절때면 사탕과 생활용품을 보내주군 했습니다.”과거를 추억하면서 소명연은 감개무량해했다.

후에 또 다른 의연자들이 소명연을 도우려 했지만 선량한고 후덕한 아버지가 소명연에게 “이 돈을 우리는 가질 수 없다. 왜냐 하면 우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기 때문이다. 아빠, 엄마가 아직 일할 수 있고 너와 네 동생을 뒤바라지할 수 있다”하고 말했다. 의연자가 기부금을 다시 돌려보내는 것을 거절한 상황에서 소명연은 이 돈을 전부 희망공정에 보내주었다.

1998년 소명연은 공청단제14차전국대표대회 대표의 신분으로 북경에 가서 대회에 참가했다. 전체 대회당에서 그는 가장 나어린 회의참가 대표였다. 소명연은 많은 꽃다발과 박수와 주목을 받았지만 시종 순박한 본분과 평상심을 잃지 않았다.

2002년 9월 소명연은 안휘대학 직업기술학원 금융전업에 입학했고 2005년도에 졸업한 후 중국공상은행 안휘성 분행에 배치되여 사업하고 있다.

사업에 참가한후 소명연과 동년시절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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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진은 소명연의 인생을 개변시켰지만 그는 이로 해서 길을 잃지 않았다. 도움을 받은 것은 소명연의 인생궤적개변의 시작일뿐이였다. 무수한 애심인사들의 도움과 감화로 어린 소명연은 다른 사람 돕기 공익행사에 나섰으며 지금까지 중단하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1997년, 갓 초중 2학년에 올라간 소명연은 주동적으로 지원받은 600원을 녕하의 한 회족 녀자애한테 부쳐보내여 그가 학업의 꿈을 이룰 수 있게 했다.

2002년, 안휘대학에 입학한 후 그는 근공검학을 견지하면서 매 학기마다 발급받는 900원의 정액 보조금을 전부 다른 빈곤학생에게 돌렸다.

사업에 참가한후 소명연은 제일 처음으로 탄 로임을 전부 희망공정에 기부했으며 그후 매달 수입의 일부를 떼내여 기부하고 있다. 해마다 그녀는 1000원의 돈을 내여 빈곤학생들을 도와주고 있는데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2006년 소명연과 해해룡은 함께 ‘큰 눈 녀자애' 사진의 저작권을 경매했는데 경매에서 얻은 30여만원을 서장 라싸시 곡수현의 한 희망소학교 건설에 지원해 수백,수천명의 장족 아이들이 다닐 학교가 있게 되였다.

2018년 소명연은 3만원을 내놓아 ‘소명연조학기금'을 설립하고 더욱 많은 빈곤 학생들을 돕는데 발벗고 나서고 있으며 사랑과 희망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있다. 이 공익 기금은 이미 2개 소의 희망소학교를 지원건설하는데 참여했으며 아울러 45명의 빈곤대학 신입생들을 도와주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속에서 성장한 소명연은 지원을 받던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주는 의연자로의 전변을 실현하였다.

30년전 그녀는 역경에 처해있었지만 30년후인 오늘은 열반중생하였다.

지금 소명연은 이미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으며 어머니로 되여 귀여운 자식을 키우고 있다. 그녀는 아이와 함께 동영상에서 해해룡에게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리면서 관중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한적이 있는데 많은 관중들이 눈물을 흘렸다.

“자신이 비에 젖어보았기에 다른 사람에게 우산을 받쳐줄 생각을 하게 되였습니다.” 이 말은 소명연에게 딱 맞는 말이다.

그녀는 과거에 수혜자였으나

지금은 더욱 더 실천자이다.

30년전 소명연은 한장의 사진이 일생의 개변을 가져오리라고 생각지 못했다.

30년래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에서 계주봉을 이어받아 선량함과 희망을 계속해서 엮어나가고 있다.

미래에도 사랑과 희망으로 구축한 이 꿈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더욱 빛을 뿌릴 것이다.

/래원: 인민일보 편역: 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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