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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과 109개의 기념비

편집/기자: [ 김가혜 ] 원고래원: [ 新华社 ] 발표시간: [ 2021-04-06 16:41:38 ] 클릭: [ ]
 
왕청현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김춘섭

“산마다 진달래 촌마다 렬사 기념비” 35년 전 저명한 시인 하경지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왔다가 감개무량하여 이와 같은 시구를 남겼다.

이 유서깊은 고장에 현성 하나가 있는데  바로 왕청현이다.

이른 봄의 산비탈에는 진달래 꽃망울이 아련하게 보인다. 꽃봉오리가 막 터치려고 하는 것이 마치 한 로인과 109개 렬사기념비와의 약속을 기다리는 듯 하다.

“력사가 우리 세대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청명 전야에 기자는 왕청현에서 김춘섭 로인을 다시 만났다. 2015년에 기자는 로인을 인터뷰한 적 있다. 6년이 지났지만 74세 된 로인은 여전히 허리가 꼿꼿하고 눈빛이 확고했다. 그 당시에 그는 이미 77개의 렬사기념비를 세웠다. 지금은 그 수자가 109개로 늘어났다.

왕청은 일찍 중공동만특별위원회의 소재지였으며 105차례의 항일전투가 일어났다. 항일렬사 묘지와 항일련합군 유적지가 177곳 있으며 600여명의 항일장병들이 이곳에 고이 잠들었다.

2005년, 퇴직을 한 김춘섭은 왕청현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직을 맡으면서 젊은이들이 혁명 력사에 대한 료해가 매우 적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한번은 농촌에 가는 걸음에 중공동만특별위원회 서기 동장영의 묘를 찾아갔다. 묘지는 높지 않은 작은 흙 언덕 우에 20~30개의 돌로 둘러싸여 있었고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동장영은 안휘 먼곳에서 동북으로 와 항일하였으며 희생 당시 27살 밖에 안되였다. 그런데 변변한 기념사적지조차 없다니 우리는 렬사에게 미안하지 않을수 없다.” 고 탄식했다.

그때로부터 김춘섭은 현지에서 희생된 항일 렬사들을 위해 묘비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력사가 우리 세대에서 끊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당시 왕청현은 여전히 국가 빈곤부축 개발사업 중점현이였으며 재정자금이 부족하고 기초조건이 락후했다. 김춘섭은 하나하나의 단위와 기업들을 찾아 다니면서 어렵게 돈을 마련했다. 자금을 모아올 때마다 김춘섭은 “왕청에서 희생된 렬사들을 대신해 감사를 드린다”며 머리 숙여 인사를 하군했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설계에서부터  시공에 이르기까지 김춘섭은 직접 나섰고 수백킬로메터 떨어진 채석장을 백번도 넘게 다녀왔다. 트럭, 뜨락또르… 어떤 공정용 차량이든지 모두 다 타봤다. 심지어 포크레인 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산을 오르기도 했다. 밀림의 풀숲에서 벌레에 물리고 벌에 쏘이는 것은 다반사였다. C형 간염에 감염되여 몸무게가 삽시에 20여근이나 빠졌는데도  이를 악물고 버티면서 공사를 하루도 지체하지 않았다. 매번 그를 보고 사람들이 “바보스럽다”,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고 말할 때마다 김춘섭은 “스물일곱살에 정의를 위해 용감히 싸우다 희생된 동장영에 비하면 이 정도 쯤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하군 했다.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이끌었다

“어린 영웅 김금녀는 적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견결히 자백하지 않았으며 희생 당시 겨우 12살이였다.”… 왕청현 비공유제기업 당건설지도봉사중심에서 랑련복(59세)은 기자에게 왕청현의 혁명사를 거침없이 이야기했다. 3년 전만 해도 평범한 철공예회사 사장이였던 그는 김춘섭의 인솔하에 이제는 선전설명 지원팀의 일원으로 되였다.

렬사를 위한 기념비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또 렬사를 위해 전기사적도 수립했다. 16년 동안 왕청의 항전력사를 명확하게 료해하고 후세들에게 영렬들의 눈물 겨운 영웅사적을 남겨주기 위하여 김춘섭은 여러곳으로 렬사들의 후손들과 항전 로병사들을 찾아 다녔으며 2만여킬로메터를 이동하면서 십여컬레의 신발을 바꾸어 신었다.

그는 《왕청영렬전》 등 24권에 달하는 100여만자의 항전 력사자료를 편찬하고 《민족영웅 동장영》 등 4권의 항전 화책을 편집•인쇄하였으며 《함락흔적》, 《왕청 홍색기억》 등 력사자료 통합을 완성하였다... ‘왕청영렬넷’ 창설을 위해 그는 60세에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잘 보이지 않고 기억이 잘 되지 않자 외지에 있는 딸에게 거듭 가르침을 요청하기도 했다.

십여년이 지나면서 그의 주변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다. 처음에는 단지 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의 몇명 로동지들 뿐이였는데 지금은 이미 로•중•청년 여러 세대로 발전하였다. 이중에는 교원, 공무원도 있고 민영 기업가 등 각 업종 인사들이 참가한 자원봉사팀도 있다.

랑련복은 또 팀원들과 함께 화책 제작도 담당했다. 현재 그들은 이미 4 권의 시리즈 화책을 완성했다. 《민족영웅 동장영》은 첫번째 1차 인쇄량이 1만여부에 달했는데 모두 무상으로 사회에 기증했다. “다음에 우리는 애국 군관 왕덕림을 그린 화책을 내려고 한다. 각본은 다 썼다.” 그는 두꺼운 자료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선생님을 따라, 일하면 일할수록 힘이 납니다!” 랑련복은 이렇게 말하며 “사람이 이렇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고 말했다.

홍색씨앗이 뿌리 내리고 싹 트게 해야

학교 기발에 홍군의 오성 반짝이고,

발 아래 길은 새로운 장정을 이어간다.

우리는 새 일대 홍군의 꼬마 전사들,

선렬들의 뜨거운 피가 몸에서 솟구친다!

왕청현 가야하 기슭에 자리잡은 동장영홍군소학교 교정에서 랑랑한 <홍군소학교의 노래>가 들려왔다. 교장 장덕지는 기자에게 학교의 원래 이름은 왕청현제4소학교였다고 말하면서 김춘섭의 홍색이야기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소개했다.

10여년 동안 김춘섭은 각지를 돌아 다니며 근 100회의 애국주의교육 과목을 강의하였으며 21회의 청소년 애국주의교육 도편전을 기획하고 개최했다. 간 질환이 발작할 때면 김춘섭은 고통을 참고 견디면서 “내 나이가 적지 않다 보니 절박감이 있다. 살아 생전에 더 많은 일을 해서 홍색유전자의 전파자들을 대량 배출해 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김춘섭이 홍색교육을 전개하는 것에서 계발을 받아 2010년에 학교에서는 왕청현의 첫번째 ‘동장영 영웅중대’를 설립하였으며 ‘번호(番号)’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며 영광스러운 전통으로 되였다. 2017년에 전국홍군소학교건설공정리사회의 비준을 거쳐 학교는 명칭을 ‘중국공농홍군 길림왕청동장영홍군소학교’로 변경하였다.

교정에 들어서면 도처에서 홍색문화 전시판과 장롱을 볼 수 있었고 매 학급의 홍색도서 코너에는 풍부하고 다양한 홍색교육 독본들이 비치되여 있었다. 학교 덕육주임 량염은 표현이 우수한 학급에 영렬중대 칭호를 수여 하는데 꼬마 홍군복을 입으려고 학생들은 모두 우수모범 ‘홍군 꼬마전사’가 되기 위해 경쟁한다고 소개했다. 매주 목요일 점심시간에 학교에서는 또 ‘홍색기발’ 붉은 넥타이 라지오방송을 리용해 학생들이 혁명력사에 근거해 자체로 편집하고 제작한 홍색이야기를 방송한다.

렬사기념비 하나하나, 홍색항일 유적지 한곳한곳이 완공됨에 따라 왕청은 길림성 내지 전국의 홍색 랜드마크로 거듭나고 있다. 현재 전 현 42개 중소학교가 영렬중대(반)를 설립하여 ‘항전의 길 다시 걷고 민족혼을 고양’하는 활동을 조직, 전개하고 있다.

청명 전야에 많은 아이들이 선생님과 학부모의 인솔하에 소왕청 항일유격근거지 유적지를 참관하러 왔다.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친구가 해설자를 하는 것을 보고 1학년 소학생 하광동은 부러움을 내비치며 “저도 홍군소학교 선전대에 가입하여 김춘섭 할아버지처럼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고향의 항일영웅 이야기를 들려 주련다.”고 말했다.

/기사래원 신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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