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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피창혁명렬사릉원, 별들의 이야기는 오늘도...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4-06 14:41:58 ] 클릭: [ ]

ㅡ청명날 렬사릉원에서 93세 로인을 우연히 만나 영웅 형님의 이야기를 듣다

올해의 청명은 무엇인가 통한 하루였다. 날씨도 통하고 인연도 통한 것 같다. 전날까지 으르렁대던 6, 7급 광풍은 언제 그랬냐 싶게 꼬리를 내리고 하늘을 덮었던 미세먼지 대신 날씨는 이름 그대로 청명하다. 그리고 전혀 의도치 않게 아무런 약속도 없이 기대도 없이 백오십리길을 달려 혼자 무작정 찾아간 렬사릉원에서 93세에 나는 전투영웅의 친동생을 우연히 만나고 그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여 너무나 행운 같은 하루였다.

화피창혁명렬사릉원을 찾은 김윤식렬사영웅의 동생, 93세 김태식로인.

길림시 창읍구 화피창진에 있는 화피창혁명렬사릉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해방전쟁에서 희생된 조선족렬사가 가장 많이 안장되여 있는 곳으로서 이곳엔 무려 650여명의 영령들이 잠들어 있다. 대부분 연변 각 지방에서 참군한 조선족전사들로서 1948년 2월 길림시 해방을 코 앞에 두고 당시 길림을 지키면서 장춘으로 도망가려던 국민당군대와 화피창 부근의 고점자와 전오가자라는 마을에서 치렬한 조우전이 벌어졌는데 밤부터 이튿날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아군은 무려 600여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말 그대로 처절한 싸움이였다.

1949년 11월 4일, 김윤식은 156사에서 추대한 23명 렬사영웅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당지 로인들의 회억에 따르면 그해 겨울 눈이 무릎까지 깊게 내렸는데 마파리로 희생된 전사들의 유체를 실어나르는데만 열흘이나 걸렸다. 엄동이라 당장 묻을 처지가 못돼서 먼저 학교 교실에 희생자들의 유체를 집결했다가 학교 바로 옆에 웅덩이가 있어 그곳에 합장하고 눈을 덮었다고 한다. 그후 봄이 되여 4월에 기념비를 세우고 길림과 장춘 지역의 다른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들의 유체도 이곳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화피창혁명렬사릉원으로까지 이르게 되였다.

연변 돈화에서 30여년만에 두번째로 친형님이 잠들어 있는 화피창혁명렬사릉원을 찾은 93세 고령의 김태식로인은 정부에서 천연대리석에 새로 새겨넣은 렬사명단에서 형님 이름을 찾았다면서 감개무량해한다. 그리고 이번 걸음을 위해 연길에서 료녕성에서 딸들이 모처럼 달려와 년로한 아버지를 모시고 동행해 나섰다.

“저의 형님 이름은 김윤식이고 1924년 9월 생이지요. 1946년 6월에 참군했어요. 잘 싸워서 살아 있을 때 영웅칭호도 받았지요.”김태식로인은 이렇게 형님을 회억했다.

아버지 김태식로인을 모시고 큰아버지가 잠든 화피창혁명렬사릉원을 찾은 세 자매.

156사 실전록에는 김윤식영웅의 사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윤식은 희생되기 전에 독립 6사 17퇀 7련 8반의 부반장이였는데 이 8반은 바로 김윤식이 희생되여 얼마 안돼 장춘해방전역이 끝난후 사장 등극명으로부터‘강철 8반’이라는 영예를 수여받은 그 이름난 영웅반이다.

1947년 10월, 구태 강밀봉전투에서 우리 군의 진격이 렬세에 처하자 부반장 김윤식은 자진하여 6명 돌격대성원 중의 일원으로 나섰다. 그는 포화를 무릅쓰고 적의 또치까 안까지 들어가 돌격대성원들과 함께 육박전을 벌였는데 눈 깜박할 사이에 36명의 적을 찔러 눕혔다. 이렇게 전투는 한시간만에 승리하고 돌격대는 ‘전투영웅소조’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강밀봉전투가 끝난지 얼마 안돼 치른 철가산전투에서 김윤식은 또 한번 용맹을 떨쳤다. 그는 부상당한 몸으로 혼자 적의 또치까로 살그머니 들어가 자기보다 훨씬 키가 크고 억대우 같은 적 기관총사수와 육박전을 벌여 쓸어눕혔다. 그번 전투에서 김윤식은 단독으로 소속한 7련의 진공로를 개척하고 30여명의 적을 격사했으며 8명을 생포했다. 전투가 끝나고 1947년 12월 19일 돈화에서 열린 길동군분구 영웅모범대회에서 김윤식은 영광스럽게 갑등전투영웅칭호와 함께 모젤권총을 수여받았다.

길림과 장춘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는 계속되였다. 1948년 2월 16일, 화피창 부근의 전오가자 전투에서 김윤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상황에서 아픔을 참아가면서 적들이 숨어있는 지주집 토성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가 수류탄을 빼들고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고 웨치자 80여명의 적들이 겁에 질려 손을 들고 투항했다. 안타깝게도 김윤식은 전우와 함께 포로를 끌고 나오는 도중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희생되였다.

새중국이 건립된 후 1949년 11월 4일, 156사 영웅모범대회에서 김윤식은 그 공적을 높이 인정받아 23명 렬사영웅 중의 한명으로 추대되였다.

“형님이 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어디에서 희생되였으며 어느 곳에 뼈가 묻혔는지 40년이 넘도록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길림신문》에 실린 기사를 통해 선색을 알게 되고 또 생존한 형님의 전우로부터 연락을 받게 되였어요.그렇게 되여 1990년인가 형님의 그 전우분과 함께 여기 화피창혁명렬사릉원을 처음으로 찾게 되였지요.”김태식로인은 30년 전의 아련한 추억을 이렇게 떠올렸다.

렬사기념비를 향해 소년선봉대 거수경례를 올리는 소년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올해 청명날, 화피창혁명렬사릉원을 찾은 사람들은 이들뿐이 아니다. 렬사릉원 길 맞은쪽에서 세차장을 꾸리고 있는 업주는 안해와 어린 아들 그리고 직원까지 넷이서 함께 꽃을 사들고 찾아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기념비를 향해 소년선봉대 거수경례를 올리는 소년의 모습이 대견하다. 길림시내에서도 차를 운전해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부근의 다른 향진인 좌가진에서 왔다는 20대 초반의 두 젊은이에게 다른 일로 왔다가 릉원을 찾은 것인가고 물으니 역시 모처럼 찾아왔다고 말해 감동을 준다.

별들의 이야기 그리고 별들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는 사람들, 혁명력사와 혁명전통은 이렇게 대를 이어 계승되고 유지되는 것이다. 올해 청명에도 화피창혁명렬사릉원으로 향한 조용한 발길들에 의해 비석에 이름을 남긴 렬사들 그리고 이름 석자도 못남기고 돌아간 무명렬사들, 그대들의 령혼은 위로가 되였겠지요.

취재후기: 화피창혁명렬사릉원을 찾아보고 장춘으로 돌아오는데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렬사릉원 관리인 마장유로인으로부터 전화가 오길래 차를 세우고 전화를 받았다. 연변에서 90세가 넘은 렬사유가족 로인이 찾아와서 릉원을 돌아보고 지금 되돌아가려 한다는 것이였다. 그래서 나는 전화로 그분들더러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하고는 바로 차머리를 돌려 다시 화피창진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우연하게 30여년만에 친형님 김윤식영웅을 다시 찾아온 동생 김태식로인을 만날 수 있게 되였으며 렬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였다. 그리고 한시간을 달려 장춘과 반대 방향인 길림역까지 로인을 모셔다 드리고 다시 귀로에 올랐다.

이튿날, 김태식로인의 자녀분으로부터 이런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화피창혁명렬사릉원에서 뜻깊은 취재로 인해 아버지가 너무 감개무량해 했습니다. 마치 형님 때문에 가슴에 걸려있던 가시를 뽑기라도 한듯요. 신문사 기자 앞에서 형님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의 기회였습니다.그리고 길림까지 차에 태워주어 마치 형님이 보내준 고마운 사람 같았을 겁니다.이제 기사가 나오면 소식 전해주세요. 가족을 대표하여 정말 고맙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고맙다는 말은 우리가 렬사들과 그들의 유족들에게 올려야 응당하다. 총탄에 의해 육신에서 뜨거운 피가 쏟아지고 젊음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수많은 영웅들, 그리고 친인을 잃은 고통을 참고 견뎌야 했을 김태식로인과 같은 렬사유족들에 비하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매일매일 행운 그 자체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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