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온 집안이 기쁨이 넘치는 날’ 이 정도면 발음이 정확하지 않나요? 허허허...”
백산시 정우현 경산진에 자리한 행복촌, 촌민 84.3%가 조선족인 이 조선족촌에서 3기째 촌당지부 서기를 력임하고 있는 한족 사위 우련성(于连成)은 기자들에게 조선어 노래 한소절을 자신있게 흥얼거리면서 말했다.
가족이야기: 사랑으로 이룬 민족의 융합
우련성의 가족이야기는 조선족 안해 리정순을 만나면서 시작되였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어요.” 리정순은 당시를 떠올렸다. “부모님이 한족 사위는 절대 안된다며 강하게 반대하셨죠. 집에 갈 때마다 어머니께서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들어서는 저를 때렸습니다. 하지만 제 고집이 워낙 강해서 결국은 허락을 받았습니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정말 맞나봐요.”
결혼후 우련성은 조선족 가족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처음엔 벼농사 하는 법도 몰랐지만 장인어른을 따라다니며 낫 쓰는 법부터 차근차근 배웠어요. 조선어도 처음엔 한구절도 못했는데 귀를 열고 듣고 배우다 보니 이제는 조선어 노래까지 부를 수 있게 됐죠.”
이 한족-조선족 커플의 성공적인 결혼은 가족 내에서 선례가 되였다. 리정순의 집에는 1남6녀 일곱 형제자매가 있었는데 그녀를 시작으로 다섯째, 여섯째 녀동생도 모두 한족 남성과 결혼하며 민족의 벽이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지금은 명절만 되면 40명에 가까운 친척이 모이는데 조선족과 한족이 반반이다.

“음력설이면 근 40명 가족이 모인다”고 우련성이 말했다.
촌민과의 이야기: 한그릇의 수제비에 담긴 촌민을 위하는 마음
많은 분들이 처음에는 의아했다. 한족이 어떻게 조선족촌의 서기가 될 수 있는지, 소통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때면 우련성은 항상 이렇게 말했다. “제 안해가 조선족이고 오래동안 한마을에서 살아오면서 모두가 저를 알아주십니다. 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지난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행복촌의 조서족 로인 방순녀가 병으로 누워 지내게 되였을 때 병문안을 갔던 우련성은 참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여 그는 안해와 함께 ‘어떻게 하면 어르신 기분이 나아질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방순녀로인이 평소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시던 것이 떠올랐어요.” 리정순은 직접 인테넷에서 검색하여 ‘물고기 모양의 수제비(面鱼)’를 만들기로 했다. 신선한 밀가루를 반죽해 매끈한 농도를 맞추고 특수한 채에 밀가루 반죽을 넣어 끓는 국물에 떨어뜨리면 순식간에 작은 메기모양의 덩어리로 변했다. 여기에 신선한 김치, 파, 다진 고기로 맛을 내 은은한 신맛과 고소함이 어우러진 부드러운 국물료리를 완성했다.

행복촌 당지부 서기이며 촌민위원회 주임인 우련성
뜨겁게 끓인 수제비를 방순녀로인에게 가져갔을 때 로인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우련성은 “로인은 오래간만에 옛날 음식을 본다며 기뻐했습니다.”고 말했다. 로인이 작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우련성 부부는 모든 수고가 보상받는 기분이였다. “아쉬운 것은 방순녀로인이 2달뒤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고 우련성이 말했다.
그의 관심과 배려는 이 뿐만이 아니였다. 2015년, 빈곤호이자 독거로인인 리만일은 뇨독증말기 진단을 받았다. 당시 우련성은 여러 경로를 통해 8만원의 치료비를 모아 그의 치료를 도왔고 치료후 병세가 호전되여 일상생활을 스스로 해낼 수 있게 되였다. 그러나 2018년 병세가 악화되여 세상을 떠나게 되였는데 어린 아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능력이 안되였다. 우련성은 민정부문과 협의하고 촌민들을 조직하여 인력과 물적 도움을 제공하여 리만일의 장례문제를 해결했다.
유련성과 촌민들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는 민족을 넘어선 진정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고 그의 일상적인 배려와 관심이 바로 이 행복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으로 되였다.
행복촌의 이야기: 촌민들의 치부와 안전을 책임지는 작은 실천들
우련성은 산업이 향촌진흥의 핵심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가지고 있다. 행복촌에서는 촌당지부가 인솔하는 1개 경제합작사를 설립하고 23호 농가의 700여무 토지를 임대시켰다. 이를 통해 토지 임대 수익은 46만원에 달했으며 년간 1인당 소득은 8,000원 이상에 이를 수 있었다. 또한 촌민들의 언어우세를 리용하여 20명 촌민들이 한국으로 로무를 가도록 협조했다. 이를 1인당 년간 소득이 10만원에 이르게 되였으며 촌집체경제도 년간 15만원을 넘게 되였다.
우련성의 리더십은 촌민들의 일상적인 불편함을 해소하는 데서도 빛을 발했다. 촌민 방근주의 밭은 산중턱에 있었는데 농작물을 옮기려면 깊은 도랑을 지나야 했다. 특히 봄에 씨앗을 뿌리고 가을에 수확할 때면 농기계와 수레가 통과하기 어려워 가파른 산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이는 시간과 체력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안전사고의 위험도 컸다.

행복촌 당지부 서기이며 촌민위원회 주임인 우련성
우련성은 촌자치위원회를 이끌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에 나섰다.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모은 후, 관련 부서와 협력하여 도랑 주변의 진입로를 정비했다. 이제 농기계와 수레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다닐 수 있게 되였다.
료해에 따르면 다년간 우련성의 적극적인 쟁취로 행복촌은 완비된 기반시설과 깨끗하고 아름다운 주거환경을 점차 갖추게 되였다. 210만원 자금을 쟁취해 700메터에 달하는 홍지 방지벽과 800여메터에 달하는 아스팔트 도로를 건설했다. 또한 40만원을 쟁취해 촌문화활동광장을 보수했다. 이외에도 330메터의 농기계 전용 도로 건설, 74개의 가로등 설치, 700여메터의 배수로 보완 1만 5,000여그루 꽃을 심는 등 주민들의 생산과 생활 환경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한족인 제가 조선족 마을에서 서기로 일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요?!”
이웃이 건네주는 뜨거운 국물 한그릇에, 동네를 위해 놓은 새 길에, 가로등의 따뜻한 불빛에, 그리고 주민들을 위한 작은 문제 하나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로심초사하는 그의 발걸음이 담겨 있다. 우련성의 이야기는 민족단결은 단순한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스며들어 살아숨쉬는 실천임을 증명하고 있다.
/길림신문 정현관, 오건, 류향휘
编辑:유경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