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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47] 자식 공부를 시키던 나날을 회억하며

안상근      발표시간: 2026-09-01 15:19       출처: 안상근 选择字号【

나는 올해 88세 미수(米壽)의 로인이다. 퇴직한 지도 어느덧 30년이 되여 간다. 식사 후면 근처 공원에 나가 산책하는 것이 하루의 주요 일과다. 아파트 단지를 나서면 조선족 소학교가 눈앞에 나타난다. 교문 앞을 지날 때마다 등하교하는 아이들이나 운동장에서 뛰노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훌륭한 시설에서 마음껏 공부하며 행복한 학교생활을 누리는 아이들이 부럽기도 하고, 저도 모르게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1946년 가을, 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당시 민주련군, 리홍광지대라고도 불렀음)이 청원현 남성자진 사도감장이라는 우리 마을에 와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몰수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교도 세우고 아동단도 조직했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학교라는 곳을 가 볼 수 있었고 아동단에도 가입했다. 하학후에는 큰 형님들을 따라 다니며 보초를 서고 편지를 나르고 탄피를 줏기도 했다. 생활이 너무 가난해 겨울에도 고무신을 신고 다녔지만 학교에서 상으로 주는 종이와 쑥대 연필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후 국민당 군대가 들어 오면서 학교는 문을 닫았고 돈있는 집 아이들만 서당에 가서 천자문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학비(월사금)를 낼 수 없어 서당 창밖에 서서 수업을 엿듣군 했다. 훈장님이 "하늘 천, 땅 지"를 읽으시면 나는 종이와 연필이 아까워 나무 막대기를 주워서 땅바닥에 받아썼다. 그렇게 도적질하듯 글을 배우느라 어머니 림종도 지켜드리지 못한 큰 불효를 저질렀다. 그것이 평생 가는 첫 번째 유감으로 남았다.

해방 후, 나는 해룡현 산성진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성적이 좋아 매 학기마다 우등생으로 뽑혀 상을 받았다. 고중입시에도 합격했지만, 가정 형편이 어려워 결국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장래에 기술자가 되고 싶었던 나의 꿈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것이 두 번째 유감이 되였다.

1959년, 나는 해방군에 입대하여 5년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해룡현 매하구진 무장부에 배치되였다. 이후 촌마을의 처녀와 결혼하여 시내 외곽 복민촌에 살림을 차렸다. 그리고 아들 삼형제를 낳아 기르며 온갖 고생을 다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다섯 식구 살림에 아이들 교육비를 대려면 턱없이 부족했다. 마누라가 생산대에서 벌어들인 공수는 년말 분배 때 다섯 식구의 량식값을 갚기에도 모자랐다. 돼지와 닭을 키우고 황무지를 개간해 밭을 일구고 단위에 보조금을 신청하고 월급을 당겨 쓰는 등 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했다. 아이들이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농촌에 내려가 일을 돕는 집들은 기와집을 짓고 넉넉하게 살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초가집에서 허리띠를 졸라매며 살았다. 그런 우리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가난에 쪼들려 아이들 셋이나 공부시키느라 고생만 한다"고 비웃군 했다. 그럴 때마다 마누라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까짓 기와집이 뭐 대수야. 자식들이 공부 잘해서 출세해야 성공이지, 그게 진짜 행복이야!"

우리는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자식 교육만은 절대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지식을 넓히고 공부에 도움이 되도록 《소년아동》, 《청년생활》, 《대중과학》, 《참고소식》, 《길림신문》 등 신문과 잡지를 정기 구독했고 공부에 필요한 각종 참고서적도 빠짐없이 사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 능력으로 너희들의 호구를 시내 호구로 바꿔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라도 너희들 공부를 뒷바라지할 것이다. 너희들이 공부를 잘해서 나라의 훌륭한 인재가 되는 것이 바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다. 만약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학에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가문의 치욕이며 농촌에 내려가 땅을 뚜지는 수밖에 없다." 이 말에 아이들은 반드시 공부를 잘하겠다고 다짐했다.

아들 셋은 모두 해룡현 제11중학교(매하구 중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건립 초기라 숙식 여건이 매우 렬악했다. 그래서 우리집 애들은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통학해야 했다. 애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찬밥을 한 끼도 먹이지 않으려고 매끼마다 새로 밥을 지어 주었고 학교 가는 날마다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 주었다. 나도 비 오는 날이면 우산이나 비옷을 몇 벌씩이나 챙겨들고 애들 마중을 나가군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세 아들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제법 훌륭히 성장했다. 큰아들 윤룡식은 1982년 대학입시에서 길림성 문과 14등의 성적으로 중국인민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대학원까지 마치고 중일무역촉진회에 배치받았다. 

왼쪽이 일본 중의원 의장 사쿠라우치 요시오, 오른쪽이 리붕 총리, 가운데가 윤룡식

더욱 자랑스러운 순간은 1990년 8월 27일, 리붕 총리가 일본 중의원 의장 사쿠라우치 요시오(櫻内义雄)를 접견할 때 통역을 맡은 일이였다. 그날 마을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몰려와 텔레비죤으로 뉴스를 시청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큰아들이 리붕 총리의 통역을 하는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이는 윤씨 가문의 영광이자 온 마을의 영광"이라고 제집일처럼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큰아들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중앙 지도일군의 통역을 맡았으며 후에는 중국상표협회 리사 겸 향항지부 총경리 직을 력임했다. 둘째아들 윤문식은 대학입시에서 길림성 문과 13등의 성적으로 북경사범대학에 합격했고 일본에서 대학원을 마친 후 현재 동북대학 황금학원에서 교편을 잡고있다. 셋째아들은 대련수산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상해에 있는 모 일본기업에서 중국측 대표로 일하고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내가 이룬 일은 별로 없어 부끄럽지만 자식 농사만큼은 제법 잘 지었다는 자부심이 든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고중진학을 눈물로 포기해야 했던 나의 아쉬움을 자식들이 대신 이루어 주었으니 말이다. 이 세상에서 후대들이 가난 때문에 학업을 포기하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매하구시 복민가두 윤봉기 구술 / 문광호 정리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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