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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병사의 이야기] 장백산에서 운귀고원까지, 30여년의 책임과 동행

리미연      발표시간: 2026-08-27 12:25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71세 퇴역군인기업가 김성수의 창업이야기

8월 2일, 김성수 리사장이 장백현에서 기자와의 인터뷰중 지난날의 창업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장백산아래 압록강 발원지가 자리한 장백조선족자치현. 그곳에서 한 소년이 자랐다. 그는 군복을 입고 료녕성 안산병영의 혹한을 견뎠고 일본 류학을 거쳐 운귀고원에 호접란 꽃바다를 일구었다. 이후 또 일본 육우 가공기술을 도입해 기업을 일떠세웠다. 퇴역군인 김성수(71세), 그의 발걸음은 장백산에서 운귀고원까지 30여년에 걸친 간고하고도 파란만장한 려정이였다.

군대에서 배운 인내와 책임

“군복은 벗었지만 가슴속 그 정신까지 벗을 순 없지요.”

김성수의 눈빛은 40여년전 안산병영의 그 새벽을 여전히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다. 1973년말 기건공정병부대에 입대해 료녕성 안산에 주둔하며 매일 아침 혹한의 훈련장에서 웨친 구령, 함께 땀 흘렸던 전우들. 그때의 경험은 후날 그에게 가장 중요한 두가지를 남겼다. 끝까지 버티는 인내, 그리고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는 책임감이였다.

1970년대 대학시절 군복차림의 김성수

안산 부대에서 4년간 복무하며 수차례 모범병으로 선정된 그는 1977년 12월 부대에서 대학교 입학시험에 응시, 1978년 2월 서안야금건축학원(현 서안건축과학기술대학) 건축공정계에 입학했다. 1982년 졸업후 원 부대로 복귀했으나 더 넓은 세상을 향한 포부를 접지 않았다. 1983년 하반기 복원하여 안산강철그룹건설회사 부과장을 거쳐 1985년 당시 야금공업부가 주관하는 일본 류학 시험에 합격했다.

일본 류학 — 시야를 넓히다

1990년대 일본 건설회사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김성수

1987년 4월, 김성수는 국비류학생으로 일본땅을 밟았다. 일본 규슈공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일본 건설회사에서 일하던 중 그는 일본 화훼시장, 특히 호접란의 전망을 예리하게 읽어냈다. 당시 모두가 건설업계 호황에 들떠있을 때 그는 오히려 거품경제 붕괴를 예감하고 중국 시장을 준비했다. 동생 부부를 일본 후꾸오까 호접란 재배회사에 보내 기술을 익히게 하는 한편 일본측의 중국내 협력제안을 받아들였다.

전국 답사, 곤명에서 기회를 잡다

1990년 귀국한 그는 한달간 전국 10여개 성을 답사하며 직접 발품을 팔았다. 북쪽의 찬바람부터 남쪽의 따가운 해볕까지, 비행기와 기차를 오가며 기후와 자원을 직접 확인했다. 운귀고원에서 호접란 재배에 적합한 온도와 값싼 물이끼자원을 발견한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당시 생각했습니다. ‘이거다!’”

1990년대 일본 후꾸오까 호접란온실에서 호접란을 살펴보고 있는 김성수 사장

여러차례 고찰 끝에 1992년 4월, 그는 일본 건설회사, 화훼회사와 합작해 ‘곤명경성(庆成)화훼유한회사’를 세우고 사장직을 맡았다. 자본금 6,000만엔(당시 환률로 인민페로 약 450만원), 운남성 곤명시정부로부터 땅 60무를 우대 조건으로 임대했다. 일본에서 호접란 모종을 들여와 재배한 후 다시 일본으로 수출하는 방식이였는데 모든 시설과 자재를 일본에서 수입해 현대온실을 건설했고 준비하기까지 1년 남짓 걸렸다.

1993년 12월, 호접란 3만그루가 최초로 상해를 거쳐 일본 나가사끼로 수출됐다. 항공료 40만원을 제외한 순리익은 20만원. 김성수는 그때를 이렇게 회고했다.

“이번 수출은 단순한 첫거래가 아니였습니다. 중국 화훼 수출력사상 화물기를 전용으로 임대한 첫사례였기에 더욱 뜻깊었습니다. 군인으로서 첫전투를 치르는 심정으로 모든 준비에 만전을 기했고 그 순간 저는 이 길이 반드시 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옥계동포식품유한회사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김성수 리사장

그후 거의 매달 한편의 항공기를 직접 후꾸오까로 띄우는 성공으로 이어졌고 국내 최초로 일본 전자동 화훼재배온실을 도입해 면적을 1만 5,000평방메터까지 확장했다.

인건비와 물류비 상승을 고려해 시장을 국내로 돌리기 시작한 무렵, 1994년 국경절을 앞두고 한통의 전화가 김성수의 사무실에 울렸다. 관계 부처로부터 북경 인민대회당 국경절 연회장 화훼 장식 공급 제안을 받은 것이다.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중국 최고의 국빈 연회장에 자기 회사의 호접란이 놓인다는 것은 단순한 납품 이상의 의미였다.

김성수는 부총경리를 북경으로 급파해 연회장을 둘러보며 규모와 분위기를 살피게 하는 한편 본인은 회사에서 밤을 새며 호접란을 선별하고 직접 배치를 설계했다. 국경절 당일, 인민대회당 연회장 주석단 화단에 그의 호접란이 놓여있었을뿐더러 연회장에는 호접란 500그루로 만든 꽃동산이 장식되여 연회장 전체가 화려하고 우아한 분위기로 가득찼다.

“호접란으로 꽃바다를 이룬 인민대회당 연회장을 본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른 꽃들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서 국빈들을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벅찼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 이 길이 틀리지 않았구나!’하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납품은 업계와 관련 부문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고 운남성은 화훼산업을 담배에 이은 18대 중점산업중 2위로 격상시켰다.

고향사람 40여명과 함께

그런데 그의 성공 뒤에는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다. 곤명에 터를 잡자마자 그는 장백현의 동생, 동창생, 친구, 이웃들에게 련락을 돌렸다.

“함께 갑시다! 나만 잘되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잘살아봅시다.”

그렇게 20여가구, 40여명의 고향사람들이 낯선 운남땅을 밟았다. 이들은 온실 관리, 포장, 일본어 통역, 사무 업무를 분담하며 회사의 기둥이 되였다. 동생 부부는 후꾸오까에서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화훼회사의 핵심 운영을 맡게 되였다. 고향사람들은 지금도 김성수와 가족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함께 내려온 이들중 많은 이는 이후 독립해 자체 사업을 일구거나 전문기술자로 성장했다.

옥계동포식품유한회사 소갈비 가공 작업장에서 직원들이 제품을 정리하고 있다.

“창업에서 함께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고향사람이든 현지 동료든 함께 땀을 흘렸다면 모두 제 식구입니다.”

호접란에서 육우 가공으로, 새로운 전장을 열다

1999년, 일본 경제 침체와 원가 상승으로 부득불 화훼회사를 중국측 팀에 넘겨야만 했던 그는 이미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 건조 무우·무우말랭이 등 농산물의 일본 수출로 방향을 틀었고 2010년부터는 위탁가공 방식으로 전환하며 효률을 극대화했다.

2008년, 그는 일본 그로게 와규(黑毛和牛) 사업에 뛰여들기로 결심했다. 종원(种源) 문제, 기후와 사육 환경, 일본측의 기술 이전 장벽 등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6년 남짓 걸친 시행착오 끝에 2015년, 운남 옥계에서 국산 ‘설화소고기’(雪花牛肉) 가공으로 방향을 전환해 현재 년간 가공량 300톤, 매출 약 3,000만원을 올리고 있다. 옥계동포(东浦)식품유한회사는 현지 종업원 10여명이 인당 년간 생산액 200만원 이상을 기록할 정도로 옥계지역 평균보다 훨씬 높은 임금과 복지를 제공하고 있다.

공장 설립초기부터 생산직과 사무직 모두를 옥계 현지에서 채용하고 일본 고급육우 가공기술을 전수했다. 현지 종업원은 “김성수 리사장은 우리를 단순 로동자가 아닌 기술자로 키우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대로 저는 지금 생산라인 전체를 관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가훈 — 평생의 기준

“아버지께서 늘 하신 말씀이예요. ‘사람은 정직하게 살고 일은 성실히 하며 절대 속임수를 쓰지 말라!’라고요.”

이 가훈은 어린 시절부터 김성수의 몸에 새겨졌다. 아버지 김신룡씨가 1970년대 길림성로력모범의 영예를 따낸 분이였는데 집안은 늘 정직과 성실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다. 군대에서 배운 책임이 더해지면서 이 가훈은 그의 사업 전반을 관통하는 철학이 되였다. 호접란 사업에서도, 육우가공공장에서도 그는 단 한번도 속임수로 승부를 보려 한 적이 없다.

“성공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이 얼마나 성장하느냐에 달려있다.”며 “고향사람들이든, 운남 현지 종업원들이든 그들의 성장이 곧 나의 성공”이라고 강조했다.

후배들에게 전하는 한마디

“군복을 벗었다고 그 정신까지 벗어버리면 안됩니다. 인내와 책임, 신의는 이미 우리 몸에 익혀있습니다. 창업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함께한 사람들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진짜 사업입니다!”

김성수는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라고 청년들에게 당부한다. 돈보다 사람을 먼저 챙기라고, 무엇보다 끝까지 버티는 인내심을 잃지 말라고 강조한다.

“여러분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십시오! 동료들과 진심으로 함께한다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장백산아래에서 시작된 그의 인생은 일본류학을 거쳐 운남으로 이어지면서 황금빛 인생을 걷고있다. 꽃을 키우던 손은 이제 육우를 다루고 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함께 일하는 사람을 동료 이상의 가족으로 여기고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해내겠다는 마음이다.

“사업을 하면서 가장 보람된 순간은 돈을 벌었을 때가 아니라 함께했던 사람들이 자립하여 각자의 자리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였습니다.”

/박명화 정현관 리미연 기자

编辑:유경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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