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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이야기 44] 나의 ‘죽마고우’

안상근      발표시간: 2026-07-13 17:25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김삼철

‘죽마고우’란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 속마음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구를 말한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바로 김철훈이였다. 그는 나보다 훨씬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였다.

우리는 연길현 태양구 중심소학교를 함께 다녔다. 건국 전이라 집안 형편이 어려워 책가방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책은 보자기에 싸서 어깨에 멨고 발에는 짚신을 신고 7리 넘는 길을 매일 걸었다. 학교에서 뛰놀다 돌아오면 짚신은 인차 해져서 저녁마다 새 신을 엮어야 했다. 먹을 것도 부족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배고픔에 시달렸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는 뒤전이고 먹을 궁리부터 했다.

봄이면 강가에 가서 개구리를 잡아 끓여 먹었고 여름이면 물고기를 잡아 야외에서 끓여 먹었으며 겨울이면 새그물로 새를 잡아 끓여 먹기도 했다.

어느 겨울 밤, 철훈이와 함께 그물로 50여 마리나 되는 새를 잡아 우리 집 부엌에서 몰래 끓여 먹던 일이 어제일처럼 생생하다. 깨끗이 손질한 새를 기름 한 방울 없이 냄비에 넣고 끓였지만 새고기에서 저절로 기름이 흘러 나왔다. 그 맛은 정말 꿀맛이였다. 새고기가 부족할 때는 어머니가 데쳐놓은 배추나 시래기, 무우잎을 썰어 넣고 끓여서 한 사발씩 나눠 먹었다. 그래야 속이 든든해 잠도 잘 왔다. 철훈이는 그런 날이면 우리 집에서 자고 새벽에야 자기 집으로 가 아침밥을 먹고 나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먹을 것에만 집착하다 보니 숙제를 못해 선생님께 무릎 꿇고 두 팔을 올리는 벌을 받은 일도 한두 번이 아니였다. 너무 힘들어 울기도 여러 번 했다.

그 시절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소학교 2학년 때, 하교길에 총각선생님이 련애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우리는 겨우 열 살 안팎이였지만 그런 눈치를 챘으니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그날 이후 우리 둘은 그 이야기만 나오면 배를 끌어안고 한참씩 웃군 했다. 그런 사소한 일들이 당시 우리에겐 큰 즐거움이였다.

그렇게 늘 함께였지만, 우리의 삶은 잠시 갈라지게 되였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홀로 농사를 짓는 어머니를 돕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중병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서른여섯에 청상과부가 되셨다. 철훈이는 형편이 나아 조양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연변농학원 축목계에 입학해 대학생이 되였고 졸업 후에는 국영농장의 수의사로 일했다.

인연과 앞길은 정말 모르는 일이다. 나는 농민이 되여 농사일을 하면서도 열심히 청년단 조직에서 노력한 보람으로, 2년 뒤 촌정부와 구정부의 추천을 받아 상급 학교에 진학할 기회를 얻었다.

철훈이는 타시 국영농장에서 수의사로 일하다 부모님이 걱정되여 연변으로 돌아와 태양인민공사에서 일하게 되였다. 그는 마음이 너그럽고 소박했다. 항상 생산현장에 내려가 농민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그런 성실함 덕분에 1970년대 중반에는 《연변일보》에 ‘모범 당위서기’로 소개되기도 했다. 1980년대 말에는 주당위 조직부로부터 려명대학(당시 김시룡 새벽대학)의 당위서기 겸 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수백만 원의 해외 자금을 유치해 가난한 대학을 일으켜 세우고 전공을 확장하면서 훌륭한 학교로 가꾸는 데 힘썼다.

그 무렵 나는 룡정에서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학교에 필요한 텔레비죤, 랭장고, 록음기 같은 가전제품들을 싼값에 공급하며 학교 살림을 도왔다. 이를 계기로 우리의 만남은 다시 잦아졌다. 그는 매주 일요일이면 나를 찾아왔고 우리는 함께 식당에 가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지난날과 고향 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5, 6년 전까지만 해도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가 마를 새 없었다.

퇴직 후에도 그는 ‘자연농업연구소’를 세워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연구소에 책상과 의자가 없어 힘들어하자 내가 예전 일하던 단위에서 남는 물건들을 구해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다. 그가 연구한 ‘악취 없는 양돈법’은 해방군 후근부의 양돈장에까지 보급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연구소를 찾은 사람들을 위해 며칠씩 강습을 열고 직접 강의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리의 우정은 나이가 들어도 더욱 깊어졌다. 함께 연변팀의 축구팬이 되여 응원을 다니며 땀을 흘렸고 삼복더위에도 도문까지 달려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였다. 두 집 마누라들의 호된 질책도 들었지만 우리는 비밀리에 만나 또 뻐스를 타고 떠나곤 했다.

세 동갑내기 친구들이 60대 초반에 남긴 기념사진(왼쪽이 필자이고 중간이 허춘산, 오른쪽이 김철훈)

2000년대 초, 철훈이가 퇴직하던 해 고향 마을이 개발구에 편입되면서 50만 원의 토지 보상금 문제가 생겼다. 마을 책임자인 김주훈 씨가 이 소식을 전해왔고, 우리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룡정서점으로 달려가 관련 법률 서적들을 사들인 뒤 소송자료를 만들어 법원에 기소장을 냈다. 변호사 비용이 부담되여 내가 직접 변호인으로 나섰으나 첫 재판에서 패소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더 꼼꼼히 자료를 조사해 상소장을 작성했다. 1년 반이라는 긴 시간 동안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고향 사람들이 날려버린 50만 원을 되찾아 주었다. 감격한 고향 사람들이 베푼 연회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나눈 웃음과 희열은 지금도 가슴을 뿌듯하게 한다.

그렇게 50여 년을 함께 한 우리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철훈이가 간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수술과 치료를 위해 상해의 큰 병원을 여러 번 오갔고 우리의 만남은 잠시 뜸해졌다. 그러나 건강이 조금씩 나아지자 우리는 예전처럼 다시 만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마치 밀린 숙제를 하듯 그동안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을 꼭 털어놓아야 마음이 편했다.

그가 병상에서 나를 부르던 날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그의 안해가 전화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수척한 몸으로 침대에 누워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삼철이… 끝까지 동반하지 못해 미안하우. 당신 같은 친구가 있어 내 인생이 즐거웠소. 그리고… 학교에 가서 교장한테 꼭 전해주오. 내가 죽은 뒤… 절대 추도식을 하지 말라고…….”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자 마지막 약속이였다.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있노라니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수없이 함께 오가던 등교길, 함께 끓여 먹던 따뜻한 국물, 그리고 늘 함께 나누던 수많은 이야기와 호탕한 웃음소리가 머리속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학교에 가서 그의 유언을 전했다. 2020년 5월 10일, 연길 장례식장에서 그는 소박하면서도 엄숙한 추도식이 있었다. 친구 철훈이는 여든 살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가 떠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가끔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나는 쓴 술을 마시며 그의 이름을 부른다. 짝을 잃은 비둘기처럼 외로울 때도 많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했던 기나긴 세월, 서로에게 한 번도 짜증 내지 않을 만큼 마음이 통하던 그 시간들이 내 삶을 든든하게 채워주고 있음을 생각하면, 가슴은 다시 따뜻해진다.

나의 죽마고우, 김철훈!

그대는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친구였소.


编辑:안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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