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吉林朝鲜文报-吉林省委朝鲜文机关报
● 国内统一刊号: CN22-0030 邮发代号: 11-13
길림신문 > 기획

[그때 그 이야기42] 응답하라 1986

안상근      발표시간: 2026-07-07 13:16       출처: 길림신문 选择字号【

◎영희

안녕~ 나야, 영희. 

20대 대학생으로 처음 만난 그때, 우리 나이 겨우 열일곱, 열여덟 살이였지. 저마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큰 보자기에 싸서 서너 개씩 이고 지고 왔던 모습, 고향 선배나 친척들이 마중 나와 짐 풀어 주던 모습, 대학 생활(연변대학 조문계 82학번)을 시작한다는 설렘에 들떠 있던 모습, 이 모든 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라.

깔끔하게 정리된 침실에는 철제 이층 침대 다섯 개가 반듯하게 놓여 있었고 벽에 칠한 회가루가 옷에 살짝 묻어나는 것만 빼면 당시에 인기 짱이던 초대소 분위기가 물씬 났어. 집에서 쓰던 이부자리라 침대 사이즈와  맞지 않아 량쪽으로 집어 넣으며 각을 맞추느라 늘 씨름했었지.

네 면으로 둘러싼 숙사 건물들 한가운데에 롱구장, 배구장, 축구장이 있었던 거 기억나지? 그곳이 바로 우리의 젊음과 랑만이 넘치던 곳이였잖아. 수업이 끝나면 창문 너머로 남학생들 운동경기 구경하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했는지 몰라.

다른 학번이라도 우리 과와 다른 과가 붙으면 진짜 란리도 아니였어. 아는 오빠가 뛰는 팀이라면 더 신나서 응원했고 몰래 좋아하는 오빠라도 있는 날엔 눈에서 하트가 뿅뿅 튀여나오던 녀자애들, 홍조 어린 발그레한 두 볼이 지금도 눈에 선해. 눈길을 의식한 오빠들도 승부욕이 하늘로 치솟아 더 열심히 뛰였고 더 멋진 포즈를 잡느라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도록 엎어지고 그랬지.

아, 맞다! 어느 날 축구하던 웃학년 오빠들이 공을 우리 침실 유리창으로 제대로 날렸지 뭐야.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으나 누구나 모르는 척, 계속 공만 차길래 소리 지르며 항의했더니 결국 새 유리로 바꿔 줬어. 지금 생각하면 그 오빠들도 많이 당황했을 거야.

그래도 하루 중 제일 목 빠지게 기다렸던 건 뭐니 뭐니 해도 식당 가는 시간이였지. 메뉴라고 해봐야 가지수가 얼마 안 되는, 담백하고 소박한 음식들이였으나 먹을거리가 귀했던 그 시절, 우리에게는 진수성찬이였고 그렇게 꿀맛이였어. 류러우단(溜肉段), 훙쏘러우(红烧肉) 를 먹으려면 15분 이상 줄 서야 함은 기본이고 일주일에 한 번밖에 없는 생활 개선일에는 줄이 식당 문 앞까지 길게 이어졌지.

그리고 하나에 8전씩 하던 기름떡(油饼)은 기억나? 그거 진짜 맛있다고 소문이 자자했잖아. 다른 학교 친구들이나 부모님이 오시면 우리가 맛보게 했던 그 기름떡, 지금 생각해도 입안에 군침이 돌아.

한 달에 국가에서 주는 21원 조학금, 그걸로 식비랑 생활비를 맞추려니 빠듯하기 짝이 없었지.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우리는 둘씩 짝 지어서 손바닥만 한 알콜램프로 미역국이나 한 봉에 8전짜리 빨간 봉투의 '상해라면(上海方便面)'을 끓여 먹었어. 거기에 닭알 한 알을 깨서 넣으면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꿀맛이었던 거 기억나지?

주말에 집에 갔던 친구들이 한 주 동안 먹을 밑반찬을 가져왔거든. 작은 물통에 골똑 담아온 화숙이네 움배추김치를 여덟 명이 모여 손으로 쫙쫙 찢어 먹었지.

그때는 배달앱은커녕 주변에 식당도 별로 없었지. 대신 기숙사 입구 량쪽에 쭉 늘어서서 음식을 팔던 아줌마들이 우리의 '배달 요정'이였어. 음식이 식을가 봐 솜이불로 꽁꽁 감싼 큰 항아리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 시래기국, 미역국에 만두, 꽈배기, 감자튀김, 찰옥수수죽까지... 교내 식당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진짜 집밥들이 우리들의 발목을 확 잡았지. 게다가 밥표로 바꿔 먹을 수 있었거든.

학교 근처 작은 매점에서 마른 명태 찢으며 마시는 그 근들이맥주(散装啤酒), 현금 대신 밥표로, 그것도 모자라면 학생증을 저당 잡히고...

겨울에 매점 바깥벽에 슬쩍 볼일 보군 해서, 나중에 얼기설기 얼어붙은 오줌을 보고 집주인 아줌마가 고함치며 욕을 퍼붓던 그 광경, 진짜 이거 빼면 섭섭한, 꿀잼 추억이 맞지?

TV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친구들 떼지어 공원 영화관으로 영화 보러 가는 게 엄청난 문화생활이였어.

녀학생이 적은 수학과랑 남학생이 적은 우리 과가 합쳐, 한창 류행했던 사교무를 추군 했던 일이 아직도 눈에 생생해. 그날이면 녀자애들은 예쁘게 화장하고 제일 아끼는 옷을 차려입고 나갔잖아.

컴퓨터, 핸드폰 게임, 숏폼(短视频)도 할 수 없었지만 우리는 심심한 줄 몰랐어.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았던지, 침실 등이 꺼진 후에도 한참 재잘대며 웃고 떠들고서야 사르르 꿈나라로 빠져들었어.

'우호침실(友好寝室)' 남자애들이 침실로 놀러 오면, 무반주로 떼창하며 흥이 나서 놀아제낄 때도 많았어. 간드러지게 노래 가락 뽑던 경자, 기타 치며 '남조선 류행가'를 불러 주던 영범이, 멋들어지게 손풍금을 연주하던 춘봉이, 경쾌하게 왈츠를 추던 동웅이까지--- 반주도 무대 장치도 필요 없었어. 그저 흥이 오르면 즉흥적으로 터져 나오는 끼와 재능이 그 자리에서 우리만의 특별한 무대를 만들어 냈지.

다른 과 남자애들과 축구 시합하던 날, 골키퍼 동웅이가 상대방 공을 받아 안았는데, 그 공이 다시 튕겨 우리 팀 골문에 쑥 들어간 거 있지? 응원 갔던 우린 모두 하늘이 무너진 듯 상심해서 돌아왔던 그날의 허탈함, 지금은 왜 그때일이 이렇게 재미있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어.

우리 녀자애들은 늘 하나같이 파마(空心卷)를 말았고, 앞머리에 머리기름 '뽀마도'를 듬뿍 뿌려 처마처럼 치켜 세운 헤어스타일에 즈뤄란(紫罗兰) 분으로 얼굴을 뽀얗게 칠하고 다녔어.

어느 해, 여름방학을 보내고 돌아오니, 여러 녀자애들이 똑같은 틀에서 나온 것 같은 쌍꺼풀 수술을 하고 나타난 거 있잖아. 놀란 최호가 놀리듯 한마디 던지니, 제 무안에 창피했던 친구가 성내며 받아쳤던 게 기억나. 우리 반 외꺼풀 녀자애 중 단 한 명---화숙이 빼고 다 쌍꺼풀 수술을 받았는데, 화숙이도 그때 못한 걸 내내 후회하다가 결국 졸업 후에 했다는 우스운 후문도 있어, 하하하.

그래도 우리는 정이 많았지. 같은 반 누가 아프다 하면 그렇게 아끼던 밥표도 선뜻 모아 가져다 주었고 어느 해에는 농촌에 있는 명자네 집에 남자애들까지 함께 가 모내기를 도와주고 명자 엄마가 해 준 맛있는 산나물 무침에 먹기 드문 떡까지 배 터지게 먹고 왔었던 적도 있었잖아.

침실까지 배달되는 우편 손편지는 예상보다 늦게 오기 일쑤였고 분명히 부쳤다는 련애편지는 왜 자꾸 중간에서 사라지는지... 학교 목욕탕은 표제로 일주일에 딱 한 번, 머리는 알코올램프에 물 끓여서 일주일에 두 번 감았지. 한겨울, 복도 맞은편 세탁실에서 찬물로 세수하고 빨래해서 두 손이 빨갛게 시려와도 누구 하나 불평한 적 없었어.

입학률 5%를 뚫고 대학에 입학한 80년대 초, 우리에게 공부는 선택이 아닌 삶의 전부이자 필수였어. 지식의 궁핍함과 필요성을 절감하고, 지식과 인재를 존중하는 분위기가 막 형성되던 그때, 우리는 '지식만이 자신과 나라의 운명을 바꾼다'고 진심으로 믿었어.

문학도와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조문학부를 선택한 우리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어.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이나 교실로 직행하는 것은 기본, 저녁 자습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지. 불이 꺼진 침실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손전등을 켜고 밤을 새우던 친구들, 암기하다 잠꼬대로 외우기에 재미로 다른 문제를 던져 보니 한 글자도 틀림없이 대답했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 계단식 강의실 앞자리를 맡으려고 방석으로 미리 자리를 맡아 두는 애들도 꽤 많았던 기억이 나.

우리는 오직 공평한 환경에서 실력과 노력만으로 승부를 가르는 것을 당연한 리치라 여겼어. 시험 답안을 베끼거나 교수님을 찾아가 점수를 올려 달라고 사정하는 일은 상상도 못 했어.

그런 우리였기에 지난 40년간 많은 일들을 이뤄낼 수 있었던 거야.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우리 후세들에게 우리 글과 언어를 가르치고, 학술 연구에 매진했으며, 각종 간행물, 신문사, 방송 매체에서 민족 본연의 정체성을 수호하고 문화 전통의 맥을 계승해 오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왔어.

적어도 우리의 글과 언어로 과거와 미래, 국내와 세계를 잇고, 민족의 뿌리와 혼을 지킨다는 사명감을 안고 혼신을 다해 왔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일에 온전한 열정과 성의를 쏟아내며 남다른 책임 의식과 헌신적 소명 의식을 간직했던 모습은 우리 세대 모든 대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것 같아. 이러한 정신은 후날 사회 전반에 교육 붐을 불러일으키고 개혁개방의 흐름 속에서 지식의 진가를 발휘하는 데에 지침돌이 되였다고 자부해.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들 사이는 가을 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사이였어.

우리는 가정 배경이나 경제 사정을 비교하지 않았어. 서로 지지 않으려고 바득바득 애쓰면서도 한편으로는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해 줬던 것 같아.

리해득실을 따지지 않았고, 시기나 질투, 상처를 주지도 않았어. 평화롭고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가진 것을 있는 대로 나누고, 그저 재미나고 행복하게 젊음과 청춘을 만긱하며 소박하고 단순하게 꿈만 쫓았던 거야.

물질적으로는 부족했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고 충만했으며 행복했던 시절이였지.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졸업 꼭 40주년이 되는 지금, 그 시절 우리들의 젊음과 청춘이 아름답게 느껴져 주절주절 써 봤어. 세월이 새겨 준 년륜의 흔적이라든가, 손주 녀석들 재롱 속에서 여유를 즐기는 요즘 이야기는 이 글에서 쏙 빼기로 하자. 그냥 우리, 스무 살 대학생에서 헤어나오지 말자구~ 이 순간만큼은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무지무지 행복해 지자구~ 그리고 너무너무 멋있었던 우리들의 20대 청춘에 조용히 박수를 보내자!

동창들아, 언제 한 번 다 같이 만나서 그때 이야기나 하면서 소주 한 잔 하자. 내가 살게~(밥표 대신 카드로 ㅋㅋ)

~영희가


编辑:안상근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