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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99] 정룡철, 연변이 낳은 우수한 조선족간부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2-13 16:14:45 ] 클릭: [ ]

저택에서 기자의 취재를 접수하고있는 전임 길림성정협 부주석 정룡철./최승호기자

-전임 길림성정협 부주석 정룡철을 만나보다

《당신들은 새해에 우리 집에 찾아온 제일 첫 소수민족 손님입니다. 당신들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하며 이 기회를 빌어 길림신문사 임직원과 독자들에게 새해의 축복을 전함과 동시에 〈길림신문〉이 올해에는 〈백년백인〉영웅호걸들의 사적만 싣지 말고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성적을 거두는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호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발견, 발굴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일전, 저택을 방문한 기자일행앞에서 전임 길림성정협 부주석 정룡철(郑龙喆)은 이같이 말을 뗐다.

정룡철은 1939년에 현재의 길림성 화룡시 토산진 화흥촌에서 부친 정원근과 모친 조해송의 슬하 여섯자식중 막내로 태여났다.

소년 정룡철은 일곱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항미원조에 참가한 큰 형님집에서 큰 형수,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면서 화룡현 서성향에서 초중을 다니고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내지에 가서 공부하고 취직했다.

청년 정룡철은 1960년대초에 내몽골자치구 포두강철기계설비회사 동력실험실로부터 화룡림업국에 전근한후 림업국 검사수리공장에 내려가 전공, 기계설비과 기술원, 부과장, 과장, 자동차운수관리처 부주임, 주임(공정사)겸 당총지서기, 부국장(고급공정사), 국장 등 직을 력임했다.

1985년부터 연변주림업관리국 부국장, 국장, 연변주정부 부주장 겸 연변주림업관리국 국장, 북경시 해전구 부구장, 북경시정부 연구실 부주임, 길림성정부 부비서장, 연변주당위 부서기 겸 주정부 대리주장, 주장을 력임하다가 1998년에 길림성정협에 전근하여 2003년까지 부주석으로 있다가 2009년에 정년퇴직하여 현재 장춘에 거주중이다.

화룡림업국 시절의 젊은 정룡철.

림업국 전공에서 자치주림업관리국 국장까지 20여년

삼림피복률이 80%가 넘는 연변땅에서 림업은 산업구조중 줄곧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있었다.

정룡철의 《벼슬길》은 바로 연변주 8대 림업국중 규모나 생산량 등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는 화룡림업국에서 시작되였다.

생산기술과 전공을 맡은 정룡철은 기계설비에 대한 지식을 탐구하여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는바 화룡림업국외에도 주내 여러 림업국에서 무릇 복잡한 기계에 고장만 생기면 정룡철을 찾아왔다.

정룡철은 20대후반에 직원 1000여명을 이끄는, 트럭 60여대를 가진 차량운수관리처 사업대 부대장직을 맡고 생산량을 넘쳐완수하기 위해 힘든줄을 모르고 불철주야 열심히 일했다. 당시 직원중 특히 항미원조출신의 제대군인이 많았는데 그들의 각오와 자질은 우수했지만 그들은 그들보다 나이가 한참이나 어린 정룡철을 믿고 따랐다. 그리하여 차량운수관리처는 전국 림업계통에서 줄곧 앞자리를 차지하여 림업부는 화룡림업국에서 전국현지회의를 소집했으며 그후에도 정룡철은 여러번이나 전국림업회의에 참가해 선진경험을 소개했다.

부국장시절, 정룡철은 동북림업대학에서 조직한 공장장경리강습반에 참가한적이 있다. 졸업시험에서 99점의 성적으로 1등을 했지만 틀림없이 만점이라고 확신한터라 교원을 찾아가서 틀리게 채점한것이 아니냐며 따지고들어 끝내는 100점으로 수정했다.

《어릴 때부터 무슨 일이든 착수만 하면 잘해야 하고 정통해야 하는 강한 승벽심은 구사회 녀성이지만 박식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인것 같다.》고 말했다.

화룡림업국 국장을 담임하던 시절, 정룡철은 밤낮으로 선두에 서서 림업작업을 지휘하였다. 한번은 련속 37일동안이나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대회전》을 지휘하면서 사무실 책상에서 잠을 잔적이 있었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전공 정룡철은 20여년의 련마를 거치며 《지도자의 능력은 로동자들과 한데 뭉칠줄 아는가 모르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도리를 터득하며 연변주림업관리국 국장으로 승진한다.

연변주 주장시절, 해당 책임자들과 함께.

《우연하게》 당선된 자치주 부주장

1988년, 49세의 중년 정룡철에겐 뜻밖의《행운》이 쏟아졌다.

그해 연변주 인대회의기간, 인대대표들은 당지 림업부문에 대한 의견과 원성이 수두룩했다.

설립된지 3년밖에 안되는 연변주림업관리국의 국장으로서 주인대 대표의 신분으로 인대회의에 참가한 정룡철은 회의 토론시 대표들이 제기한 문제에 일일이 대답해주어 인대 대표들의 주림업부문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았다.

며칠후 인대회의의 주정부 해당 책임자 선거과정에 뜻밖의 《이변》이 발생했다. 회의전에 이미 부주장 추천인선이 있었는데 정룡철이 예상외로 부주장에 선거되였던것이다. 림업부문에 근 30년간이나 몸 담그어온 정룡철국장의 탄탄한 실무자질을 바탕으로 한 인대회의기간의 답변이 대부분의 인대 대표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은 선거표를 정룡철에게 몰아왔던것이다.

연변과 북경 교류합작의 길 열다

1990년, 정룡철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북경시 해전구 부구장직을 맡게 되였다.

그해, 중공중앙 통전부와 선전부, 인사부는 해전구에서 현지회의를 소집했는데 전국 각지 민족지방으로부터 온 33명의 소수민족간부가 참가했다. 회의 결속후 그들은 북경시 및 산하 각구 정부부문에서 3개월동안의 단련을 거치고 전부 원래의 일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정룡철은 해전구 조리구장에서 북경시정부 연구실 부주임직으로 전근했다.

비록 짧디짧은 1년 3개월이였지만 그동안 정룡철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연변주와 북경시사이에는 교류와 합작의 장이 펼쳐졌다.

해전구정부에서 아빠트도 분배하고 가족들까지 북경에 이사시켰지만 정룡철은 여러 국가기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주저없이 고향에 돌아왔다.

1995년,두번째로 연변에 시찰온 강택민총서기와 악수를 나누는 정룡철주장.

총서기 제사정신 받들어 연변을 3가지 《모범자치주》로 건설

1995년, 당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스마이 아마이티를 단장으로 하는 로씨야방문단 성원에 정룡철주장이 지명되였다.

마침 이날, 정룡철이 북경으로 떠나는 날은 당시의 중공중앙 총서기 강택민동지가 1991년에 이어 두번째로 연변시찰을 오는 날이였다. 정룡철은 연길공항에서 당시의 성당위 부서기이며 주당위 서기인 장덕강 등 책임자들과 함께 강택민총서기를 영접한후 방문단에 합류하기 위해 곧장 북경으로 향발했다.

강택민총서기는 연변 첫 방문시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전국모범자치주로 건설하자!》는 제사를 써주셨고 장덕강은 제사정신을 연변사업의 최대의 정치임무로 간주하고 락착하도록 지시하여 연변주를 모범자치주로 건설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몇년래 연변주는 훈춘, 도문, 룡정, 화룡 등 변강시(현)에 문화무대를 건설했다. 주장으로 승진한 정룡철은 장덕강서기와 함께 연변주내의 105개 변강 향진에 대해 전부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사업을 배치했다. 불과 몇해사이에 연변주는 전국 《산아제한모범자치주》, 《문화모범자치주》, 《삼림방화모범자치주》 등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1996년, 당시 국무위원이며 국무원 비서장인 라간(罗干)과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인 장만년(张万年) 등 중국 당정대표단이 조선방문을 마치고 연변에 들린 기회를 놓칠세라 정룡철주장은 국가에서 두만강류역에 국방도로를 투자,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피력하고 당장에서 긍정적인 답복을 받았다.

이듬해, 정룡철주장은 해당 부문 책임자들을 거느리고 국가교통부 부장 황진동(黄镇东)을 찾아가 국방도로와 연변고속도로 전기(前期)비용 등 도합 3.8억원의 투자를 승낙받았다.

한복을 차려입은 정룡철과 부인 김미자.

한복 입고 중앙지도자들앞에서 우리말을 한 자치주 주장

1994년 9월 29일, 파란색 한복에 중절모를 눌러쓴 우람진 몸매의 한 조선족사나이가 북경 인민대회당에 나타났다.

국무원에서 국경 45주년을 맞으며 성대히 소집한 제2차전국민족단결선진표창대회에서 연변주가 처음으로 민족단결 선진집단으로 선정되여 표창을 받게 된것이다.

한복차림의 정룡철주장은 연변주를 대표해 표창대회에 참가하여 주석대에 올라 발언했다. 정룡철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온 정룡철입니다.》라고 우리 말로 자기를 소개한후 이어서 한어로도 소개하고 연변의 민족단결선진경험을 소개했다. 당시 그의 발언은 강택민 등 당과 국가 지도자들과 전국 각지에서 온 소수민족대표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시상식에서 강택민총서기는 제일 첫 상장을 정룡철주장에게 안겨주었다.

표창대회가 끝난후 정룡철주장은 각지 각급 대표들이 앞다투어 기념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한복모델》로 인기를 다시 한번 발산했다.

민족간부등용과 문예, 교육을 중시한 주당위 부서기, 주장

지난 세기 90년대 중엽, 연변주당위 서기 장덕강은 두만강하류의 개발개방과 훈춘특구 건설, 장령자통상구건설, 권하통상구 회복, 연길공항 등 공정을 의사일정에 올려놓았고 연변에서는 공정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주장 정룡철과 손잡고 연변의 당정, 행정 사무를 보아왔다. 특히 장덕강서기는 간부등용시 주당위 부서기직을 겸임한 정룡철주장의 의견을 매우 존중했다.

한번은 연변주의 주관부문 책임자가 다음기 간부등용방안을 갖고 정룡철주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방안이 합리하지 않은것을 발견한 정룡철은 너무도 격분한 나머지 그 방안을 와락 손에 거머쥐고 조직부 책임자의 발치에 콱 던져버렸다. 《당시에 왜서 그랬냐?》는 기자의 물음에 정룡철은 《장덕강서기의 신임을 저버릴수 없었고 당과 민족에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기때문이였다.》면서 《간부등용시 항상 당의 간부로선과 소수민족자치조례의 원칙에 따라 실행해왔다.》고 말했다.

주장시절, 정룡철은 문예는 연변의 《얼굴》이라며 예술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재정이 넉넉치 못한 상황하에서도 그는 65만원의 자금을 자금난에 봉착한 연변가무단에주어 대형가무 《장백정》을 성공적으로 펴내게 하였다. 이리하여 《장백정》은 전국에 소문났고 국가문화상까지 수상했다. 

그는 연변주내 중점고중들인 연변1중과 연변2중을 각각 시찰, 현지회의를 소집하고 100만원씩 조달하여 실험실과 체육관을 건설하게 했다.

국가에서 전국 대학교들에서《211공정》을 실시하자 정룡철은 연변대학의 종합경쟁력을 높이고 연변대학을 국가중점대학항렬에 들어서게 하고저 연변대학과 연변농학원, 연변의학원, 연변예술학원,연변사범학원 등 대학을 합병하도록 건의를 제기하였다.  

항간에서는 장덕강이 연변주당위 서기를 맡고 정룡철이 주당위 부서기 겸 주장을 맡아하던 때를 《연변주의 황금시대》라고 평가하고있다.

전국정협 부주석 조남기와 뜨겁게 악수를 나누고있는 정룡철.

진달래를 《주화》로, 미인송을 《주수》로 확정

주장담임시기 정룡철주장은 주인대 상무위원회에 진달래를 자치주의 《주화(州花)》로, 미인송을 《주수(州树)》로 확정지을데 관한 건의를 제기하였는데 그것이 대회에서 채택되였다.

그외 정룡철주장은 《천리길, 천리꽃》공정을 추진하였다. 그때로부터 연변주내 여러 촌툰의 마을어구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하여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루었다.

《슈퍼축구팬》주장, 연변오동팀을 최고봉에 이끌다

정룡철은 당시 연변의 기둥기업중의 하나인 길림오동약업그룹유한회사의 리수림리사장을 만나 경제형편이 어려운, 《연변의 명함장》-연변축구팀에 대한 경제적지원을 부탁했고 리수림의 적극적인 답복을 받아냈다.

한국 한양대교수 최은택이 연변팀 감독으로 부임되여오자 정룡철주장은 최은택감독을 접견하고 좋은 성적을 따내줄것을 부탁했다.

1997년, 연변팀은 전국 갑A리그 4등이라는 직업경기 력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두며 전국 언론의 열점으로 부각되였으며 그해말에 《슈퍼축구팬》정룡철은 길림성정협 부주석으로 발령받았다.

길림성정협 제안답복 공개제도 건립

길림성정협 부주석을 담임한 정룡철은 5년동안 제안, 사회법제, 대만 향항 오문 교포 등 분야를 주관하였다.

그는 성정협의 제안답복 사무회의를 소집하고 제안의 진척상황을 제안을 제기한 위원들에게 공개적으로 답복하는 제도를 건립하였는바 사평에서 현지회의를 열고 전 성적으로 보급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지금까지 실행하고있다.

고향을 그리며

주장시절, 고향마을의 교통이 불편한것을 발견한 정룡철은 길림성빈곤부축판공실의 해당 책임자들을 요청하여 현지고찰을 하게 한후 성의 빈곤부축 전문자금으로 화룡시 토산진 소재지에서 화흥촌에 이르는 10리 흙길을 7메터 너비의 아스팔트길로 변모시켜주었다.

《장춘에 와서 사업, 생활한지도 18년째 되지만 매번 고향에 돌아갈 때마다 교하를 지나 연변의 서쪽문인 황니허에 도착하면 〈내 고향 연변에 돌아왔구나. 그동안 고향의 인민들은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있겠지? 고향의 산천초목은 하나도 다친데 없겠지?〉하는 생각이 저절로 갈마듭니다. 나는 어쩔수 없는 연변 사람인가봅니다.》

《연변이 낳은 우수한 아들》-정룡철의 고향에 대한 애착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지금도 여전하다.

정룡철은 중국림업문학예술사업자련합회 주석을 력임하다 지금은 명예주석, 길림성장애자련합회 명예주석, 길림성로령사업위원회 고문, 길림성체육협회 고문 등 직을 맡고 여열을 불태우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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