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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96] 평생 조선족중학교를 두개 꾸린 리명춘

편집/기자: [ 박명화 김혜연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1-23 16:48:48 ] 클릭: [ ]

리명춘 프로필

1924년 길림성 왕청현 하마탕향 출생

하마탕향에서 소학교 졸업후 1944년 심양동광중학교 졸업

연변민주학원에서 공부후 당시 길림시에 있은 길림성민정사무청에서 사업

1948년 4월-1957년 7월 흑룡강성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 제1임 교장

1951년 9월 중앙인민정부위원회 12차회의에서 채택되여 흑룡강성인민정부 위원으로 임명됨

1957년 8월-1966년 내몽골자치구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 제1임 교장

1989년 울란호트에서 별세

리명춘교장/치치하얼조중 제공

리명춘은 평생 조선족중학교를 두개 꾸렸다. 하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이고 다른 하나는 내몽골자치구 흥안맹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이다.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는 흑룡강성 서북부지구의 유일한 조선족중학교일뿐더러 조선족문화중심이기도 하다.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는 내몽골 력사상 첫 조선족중학교이며 유일한 조선족완전중학교이다.

리명춘의 맏딸 리정숙이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하고 울란호트에서 거주하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는 지난 1월 4일 울란호트에 찾아갔다.

금년 69세의 리정숙은 남편 박종부와 함께 집에서 기자를 환대하며 아버지 리명춘에 대해 회고하였다.

 

지도부 성원들과 함께 있는 리명춘(중간)/ 치치하얼조중 제공

가난한 벽지에서 고생도 많았고 쉽지 않았다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948년 2월, 《서만지구조선인민련맹》은 당시의 눈강성(嫩江省) 간남현에 조선족중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학교자리문제와 경비문제를 토론하였다.

그리고 중학교 교원과 수준이 보다 높은 소학교 교원을 구하기 위해 눈강성문교청을 통해 당시의 길림성민정사무청과 련락하여 길림성민정사무청에서 사업하던 리명춘과 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한 연변의 아홉사람을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3.8절전에 기타 9명 교원과 함께 기차를 타고 배를 갈아타고 간남현에 온 리명춘은 제1임 교장으로 부임되여 1948년 4월 23일, 흑룡강성 간남현 흥농촌에서 열린 《서만지구조선인중학교》 설립식에서 사업보고를 한다. 이 학교가 바로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의 전신이다. 연변에서 온 9명 교원은 대부분 소학교 교원으로 사업했다.

당시 서만지구에 산재해 있는 조선족마을의 학생들이 멀리멀리서 이 학교에 와 공부했는데 북으로는 흑하, 눈강, 남쪽으로는 통료, 서쪽으로는 울란호트, 잘란툰, 후른베르맹, 동쪽으로는 통북에 있는 학생들이 망라되였다. 학생들 대부분은 소학교를 다니나마한 문화정도였다.

그때는 교원도, 교장도 월급이 없었다. 개학후 리명춘교장은 교원부족문제, 자금문제, 운영문제, 교재문제 등 모든 면에서 막대한 곤난에 부딪쳤다.

게다가 일부 학생들은 생활이 극도로 빈곤하여 좁쌀밥과 수수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개별학생들은 견디다 못해 중도 퇴학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먹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리명춘교장은 교원들과 함께 연자방아를 돌려 음식가루를 내고 농사를 짓고 사처에 가서 가 량식을 구해오기도 했다.

리명춘교장의 맏딸 리정숙은 커서 어머니한테서 《학생들의 량식이 떨어졌을 때 아버지가 아끼던 시계를 팔아 좁쌀을 사다 학생들에게 먹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연변고급사범학교를 졸업한후 1950년초에 이 학교에 분배받아 부교장, 후에 제3임 교장을 담임했고 퇴직후 장춘에서 로후생활을 보내는 지철교장을 27일 기자가 장춘에서 만났다.

그는 첫마디에 《리명춘교장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세월에 벽지에 와서 교육경험이 전혀 없는 교원들과 함께 학교를 운영해가느라 고생도 많았고 난관을 하나하나 뚫으며 민영학교를 성립학교로, 명성높은 학교로 개척해 나가느라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고 평가했다.

리명춘교장은 조선족가운데서 드물게 한어도 잘하고 일본어도 잘했다. 사회관계망도 아주 넓었는데 성 및 치치하얼시 령도간부들을 늘 접촉했고 사회각계 유지인사들과도 관계가 아주 좋았다.

정부의 관심과 리명춘교장의 노력하에 학교는 1949년 4월에 학교자리를 교통이 편리한 치치하얼로 옮기고 하반기부터 교원의 월급을 성문교청에서 발급하였다. 학교에 평균대(平衡木), 배구기물, 철봉 등 초라한 체육시설이 설치되였다. 교수는 전부 연변지역의 교수계획에 따라 배치하고 조선어문, 치어(治语),수학,정치 등 과목을 배정하였다.

해방된 1949년 년말, 성문교청은 학교건물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며 12월에 학교의 성질을 민영에서 성립(省立)조선족중학교로 변경하고 성문교청에 예속시켰다.

리명춘교장은 기쁜 나머지 그달로 연변고급사범학교와 련계하여 선후 5명 교원을 배치하고 기타 교원들도 초빙하였다. 학교는 교원 12명에 학생 100여명, 3개 학년이 있는 규모로 발전했다.

그해 단조직을 건립하고 단지부를 설립하였으며 1952년 7월 1일에는 당지부도 설립하였다.

학교의 일체 경비를 성문교청에서 직접 조달받게 되자 군중들의 지원에 의해 학교를 꾸리던 력사를 종말지었다. 일부 교수설비도 륙속 마련하였다.

리명춘교장은 학교의 일이라고 하면 《비위도 컸고 비라리도 잘했다》. 당시 성당위 서기의 동의하에 성당위사무실에 있던 독일제 피아노를 학교로 《모셔오고》 성정부 주석 우의부의 비준하에 인민페 3000만원(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3000원)을 지원받았으며 도서도 증정받았다. 정부에서 추운 겨울 옷을 한 트럭 실어다 주어 가난한 학생들에게 나눠입혔다. 후에 학교의 간판도 당시 성정부 성장인 진뢰(陈雷)가 써주었다.

그속에서 조선족고위급간부들의 도움도 아주 컸다. 리조린장군의 부인이며 흑룡강성 비서청에서 사업하던 김백문,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였던 리민 등 많은 조선족간부들이 이 학교를 수차 방문고찰하고 여러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1년, 흑룡강성 조선족소학교들의 교사대오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학교에 사범반을 설치하고 학생 54명을 모집하였다. 1952년 사범반을 두개 더 모집했는데 학생이 약 100명 되였다. 이 두반은 후에 중학반으로 변경되였다.

 

리명춘을 흑룡강성정부 위원으로 임명한 중앙인민정부 통지서/치치하얼조중 제공

1951년 9월 중앙인민정부위원회 12차회의에서 채택되여 흑룡강성인민정부 위원으로 임명되였다. 리명춘교장은 모택동주석이 서명한 통지서를 받고 희열을 감추지 못했으며 더 큰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사업에 뛰여들었다.

1954년 흑룡강성 조선족 소학교 교사들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성교육청은 이 학교에 소학교 교원 륜훈반을 설치하였는데 학제는 2년, 1956년에 졸업하였다.

1954년 학교는 자리를 옮기고 건물조건을 개선하였는바 사방 교실을 빌려쓰던 력사를 끝마쳤다. 1956년에 와서 학교는 9개 학급에 400여명 학생, 교직원 27명으로 늘어나고 건물면적도 2700평방메터로 늘었다.

이 시절 교수수준은 매우 크게 제고되였다. 1954년 고중 통일입학시험에서 전 성 초중 1등의 성적을 따내기도 했다. 1956년부터는 한어과 교수를 더욱 중시하기 시작했는데 동북3성 조선족학교들에서는 이 학교에 와서 한어교수경험을 습득하기도 했다.

리명춘교장은 체육 면도 상당히 중시했다. 전통체육항목인 축구와 녀자배구의 수준은 줄곧 시내 중학교에서 앞자리를 차지했다. 박화춘, 김영희, 리정렬 등 학생들은 성을 대표하여 동북지구 륙상, 수영 경기에 참가하였다.

특히 빙상운동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용솟음쳐 나왔다. 이 학교를 졸업한 리태권, 리복련, 로성옥, 김미옥, 김룡희, 리성률 등 선수들은 국가팀에 참가하여 국제경기에도 여러차례 출전하였다. 그중 리태권은 중국의 첫 쇼트트랙운동건아이기도 하다.

리명춘교장은 조선족사회에 명성을 날렸다. 성내외 여러 단위에서 리명춘에게 전근요청을 거듭 보내왔다. 그러나 리명춘교장은 누구도 생각지 못한 결정을 하게 된다.

오늘의 울란호트역

치치하얼서 울란호트에 가 중학교 하나 더 세우다

리명춘은 1957년 7월까지 9년동안 혼신을 쏟았던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를 떠나 흙먼지 날리고 낮설은 내몽골 흥안맹 울란호트로 떠난것이였다.

이 선택은 주위 사람은 물론 부인마저도 리해할수 없었다. 왜 하필 조건 좋은 고장과 직장을 만류하고 내몽골에까지 가서 고생한단 말인가고?

리명춘은 친구로부터 내몽골에 조선족중학교를 세워달라는 요청을 받았던것이다. 그 친구는 당시 내몽골자치구의 정협위원이며 자치구 농업청 계획재정처 처장인 박제훈이였다. 두 사람은 1948년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 설립건으로 처음 만났으며 그후 동지로, 가까운 친구관계로 발전했던 터였다.

리명춘보다 8살 우인 박제훈은 1947년에 목단강의 730여명 조선족들을 거느리고 집체적으로 내몽골 아영기에 정착하여 신발조선족향을 건립했다. 두 사람은 그후 1969년에 사돈지간으로 되였다.

그때 친구의 요청도 요청이겠지만 우리 민족 중학교를 내몽골에 세운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아버지는 생각했기때문이라고 딸 리정숙은 말한다. 그는 《어머니는 떠나올 때 울며 따라왔다》고 회억했다.

내몽골초원에서 우리 민족이 집중되여 사는곳은 그래도 흥안맹이라 할수 있었다. 많을 때는 도시에만 조선족이 5000여명이 있고 린근 교외에 크고작은 조선족마을이 10개나 되였다.

내몽골자치구 당위와 정부는 건국초기 경제형편이 아주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소수민족교육을 관심해주었다.

일찍 1950년 봄, 울란호트시 흥안중학교에 조선족 초중반을 증설하고 학생 10여명을 뽑아 3명 교원이 조선어로 강의하였다. 교재와 교수계획은 연변교육국에서 편찬한것을 통용하였다. 1953년 조선족학생 15명이 졸업하게 되자 조선족고중을 세우는가 마는가 하는 문제가 의사일정에 올랐다.

리명춘의 맏딸 리정숙과 남편 박종부가 울란호트조중 앞에서

1956년 8월, 정부에서는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지었다. 당시 초중반이 3개 학년, 고중 1학년 한개 학년 등 4개 교수반이 있고 학생이 160여명 되였다. 중학교의 설립으로 하여 내몽골자치구 조선족문화교육은 새로운 발전단계에 들어서게 되였다.

교수질을 더한층 높이기 위하여 교장을 물색하던터 흑룡강성의 지원을 받아 리명춘교장을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의 교장 겸 당지부서기로 전근시켰던것이다.

새 학교의 교장으로 부임되자마자 리명춘은 또다시 민족중학교를 창업하는 일에 달라붙었다. 먼저 학교자리를 선정하고 흙을 파고 벽돌을 날라다 흙집으로 된 학교건물을 지었다. 그리고 산비탈을 깍아서 운동장을 닦았다.

학교를 살리고 학생들을 먹이기 위해 교원들과 함께 또 학교주위에 무우를 심고 농사도 지었다.

교수경험이 풍부한 리명춘교장은 교수질을 높이자면 인재를 구해야 한다며 연변대학, 동북사범대학, 내몽골사범학원 졸업생가운데서 우수한 조선족졸업생을 선발하여 교사대오를 충실하게 키웠다. 이는 학교교사대오에 새로운 력량을 주입시켰다. 또 조선족형제학교에서 우수한 교원들을 뽑아 채용했다.

리명춘교장은 가정생활이 곤난한 학생들로 하여금 마음놓고 공부하게 하기 위하여 정부의 인민조학금제도를 쟁취하여 학생들이 혜택을 받도록 했다. 교수조건을 개선하기 위하여 자금과 물자를 끊임없이 투입하여 리화실험실, 도서실 등을 이어 설치하였다.

리명춘교장이 부임되면서 학교의 면모는 일신되였다. 3년간의 발전을 거쳐 1959년에 와서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는 교직원이 40여명에 이르고 교수학년이 9개가 되며 학생이 350여명 되고 교수설비가 비교적 구전한 완전중학교로 성장하였다. 1959년 7월 첫 고중졸업생중 31명 학생이 대학에 붙는 기꺼운 성적을 따냈다.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이 10년사이는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가 대발전중 대단히 큰 성과를 거둔 10년이였으며 내몽골정부로부터 표창과 장려도 많이 받았다.

10년사이 8기에 걸쳐 180명 고중졸업생중 101명 학생이 선후 대학교에 붙었다. 그들은 내몽골자치구 여러 분야에서 기둥일군으로 평생 사업하였다.

이 시기 학교 또한 아주 흥성했다. 학생이 300-400명에 이르고 무용대, 악대, 축구대, 배구대, 스케트대를 무었다. 전 시 시합에 나가면 무용은 말할것도 없고 장거리달리기를 비롯하여 어느 하나 빠지는것이 없었다. 배구대는 전국시합에 참가한적도 있다.

리정숙은 《아버지는 군중관계가 좋았다. 마음에 항상 군중들을 담고 살았으며 군중들과 함께 휩쓸려 배구를 치고 기타 운동도 즐겼다. 조선족뿐만 아니라 당지 목축민들과도 사이가 아주 좋았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시작된후 1968년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는 운영을 중지했다. 중학교에 부설되여 있었던 소학교는 울란호트사범학교 부속소학교로 변했다가 1976년에 역시 중지되였다.

《문화대혁명》후 내몽골정부의 관심하에 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는 《첫진으로 잘 꾸려야 할 중점중학교》에 속했으며 1980년부터 인민조학금제도를 회복하였다.

현재 이 학교는 현재 유치원•소학교•중학교를 통틀어 학생수 275명, 교원 88명 규모로 운영되고있다. 학교는 북경대학에 3명 학생과 청화대학에 2명 학생을 수송하였다.

아버지 대가 맺어준 리정숙 박종부 부부, 기자에게 부친의 사진과 서류를 보여주고있다.

쾌활했던 아버지, 어흠하는 법 없었다

리정숙은 아버지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쾌활했다. 6남매 자녀들을 데리고 잘 놀아주었고 옛말도 많이 해주었다. 자녀들과 씨름도 하고 간질구도 하고 장난을 세게 쳤다. 출장을 갔다오면 출장갔던 고장의 이야기를 곧잘 들려주었다. 절대 어흠하는 법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갤 때면 자기 이불은 자기가 개야 한다. 이것을 어머니를 돕는다고 생각지 말라. 할 일이 있을 때는 다같이 나서 서로 받들어야 한다.》고 아버지는 늘쌍 말해왔다.

묵은 밥이 있을 때는 누구나 다 한숟가락씩 먼저 먹고나서 햇밥을 먹었다. 절대 어머니혼자 묵은 밥을 먹지 못하게 말렸다. 그래서 친척들은 우리 《집안이 화기스럽고 민주가정》이라고 치하했다. 학교에서도 교원과 학생들한테서 인기가 좋았다. 아버지는 학생들을 데리고 원족을 잘 갔다.

아버지의 가정교육은 자손들에게 평생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를 따라 6남매가 다 출세했는데 그중에는 고급교원도 있고 수리전문가도 있다. 손군가운데는 지금 도꾜중국인총상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손자도 있고 미국에 있는 손군도 있다.

/ 박명화기자 김혜연(울란호트조선족중학교 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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