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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땅이 좋아 연화를 못 떠나는 사람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9-02 12:34:13 ] 클릭: [ ]

연화향의 개척민 2세 홍웅택, 김원호 로인의 이야기 들어본다

연화개척민 2세들인 홍웅택(오른쪽), 김원호 로인

지난 세기 1948년도에 유수시 연화조선족향의 개척민 1세대들인 부모님들을 따라 연화땅을 밟은 홍웅택, 김원호 등 개척민 2세들은 연화땅이 좋아 한평생 떠나지 않고 살아가고있는 얼마 남지 않은 연화력사의 토박이 견증인들이다.

지난 8월 19일, 기자는 연화향에서 홍웅택, 김원호 로인을 취재, 연화개척초기의 잘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안나이트같은 이야기들을 들어보았다.

올해 69세인 홍웅택로인은 3살나던 해에 화룡현 와룡구 백일평 갑산촌이라는 곳에서 개척민 부모님들을 따라 연화땅에 정착했다. 홍로인의 어릴적 기억이라면 연화벌은 당시만 해도 온통 갈대와 억새로 덮인 허허벌판이였다는 점, 토끼며 꿩 등 들짐승, 날짐승들은 물론 팔뚝 같은 물고기들도 많았다고 한다. 무리승냥이가 자주 출몰해 집돼지를 물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무리승냥이가 사람까지 물어죽이는 일이 발생했다고 하니 당시로서는 제일 두려운 존재가 바로 밤이면 출몰하는 무리승냥이였단다.

홍로인에 비해 김원호로인(79세)은 연화향에 올 때 이미 13살이 되여 기억이 더 생생했다. 갓 연화에 왔을 때는 광복이 되여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버리고 간 군마를 정부에서 농업지원용으로 여러필 주었다고 추억했다. 조선족농민들은 농사에 소를 쓰는것이 상례인지라 덩치가 큰 군마는 별로 농사일에 쓸수가 없어서 마을에 있는 말뚝에 매놓았는데 언젠부터인가 하나둘 모두 잃어졌다고 한다.

김원호로인은 과거를 생각하면 몹시 춥고 기후가 좋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개척 당시 이주민들이 한꺼번에 700~800세대나 모여오다보니 당지 한족집들에서 두세집이 살림을 합치면서 한집씩 내여 조선족들을 들게 했는데 여러세대가 한집에서 살다보니 비위생적이고 붐벼 어린애들이 전염병으로 많이 죽었다고 회상했다.

개척초기 연화는 온통 늪지대와 새밭들로 덮여있었다고 한다

개척초기 수전농사를 위한 제방을 쌓고 늪을 메우고 수로를 만들면서 논을 풀고 농사를 시작했는데 첫해에 홍수가 져서 농사를 망쳐버렸다고 한다. 또 해마다 논판에 산종으로 벼씨를 뿌려놓으면 그걸 먹으려고 죽기내기로 달려드는 물오리떼들때문에 밤낮으로 보초군을 세워 지키면서 애간장을 태웠다고 한다.

그런 렬악한 환경속에서도 개척민들은 수많은 어려움과 곤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낮과 밤이 따로 없이 수전개척에 나섰다. 당시 적잖은 개척민들은 연화땅을 못살 곳이라고 저주하면서 연변이나 부근 흑룡강지역의 다른 조선족마을로 다시 살길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오도가도 할수 없는 가난한 살림에 찾아온 곳이 곧 삶의 터전이라고 울며 겨자 먹기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 웃세대 어르신들은 연화땅을 개척하느라 누구나 밤낮이 따로 없이 소처럼 죽도록 일했으며 그래서 모두들 일에 지쳐 너무나도 일찌기 돌아갔다》고 홍웅택로인은 말했다. 당시에는 60세 이상 사는 사람들이 많지 못했다. 그때 고생했던 개척민 1세대들은 모두 너무 일찍 저세상 사람이 되였지만 연화향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들의 개척정신과 개척성과는 영원히 연화향의 력사에 기재되여야 할것이라고 홍웅택로인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홍웅택로인은 지난 1959년도에 조선복구건설호소에 연화향의 화신촌 등 5개 마을에서 98세대 근 500명이나 되는 인구가 조선에 나가면서 마을들이 많이 비워졌고 개척한 땅을 다루는 사람들이 없게 되자 린근마을 사람들에게 애써 개척한 땅이 적잖게 점유되였다고 안타까와했다.

땅을 다루는 사람이 없으면 주인이 변하기 마련인데 개혁개방이후 외국로무바람과 도시진출바람이 불면서 적잖은 사람들이 또다시 땅과 농촌을 떠나면서 적잖은 땅들이 다시 사라졌다고 말했다. 1세대 개척민들이 피땀을 흘려가면서 애써 개척해놓은 땅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아픔은 개척민의 고초를 알고있는 사람들만이 느낄수 있는 마음속 비애와 아픔이지 않을수 없다.

연화 고향집에서 여유로운 만년을 보내고있는 홍웅택로인

《옛날 고생하던 이야기야 어찌 한두입으로 다 말할수 있겠습니까? 더욱 안타까운것은 현재입니다. 사람들이 땅을 떠나고 마을을 떠나가면서 마을들이 황페해지고있으니 더욱 안타까울뿐이지요…》홍웅택로인의 말이다.

현재 홍웅택로인이 살고있는 이화툰도 과거에는 80여세대가 모여사는 꽤 큰 마을이였지만 지금은 10세대도 채 못되게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학교선생가족이 3명 있어 마을을 떠나지 않은외 거의 모두 한국나들이와 도시진출 등으로 마을을 떠나버려 마을은 생기를 잃은지 이미 오래다.

마을을 떠나간 사람들이 한국이나 청도 등 연해도시들에서 잘살고있지는 않다고 홍웅택로인은 말했다. 힘들고 어려운 해외로무와 도시생활에서 모두들 마음 편히 로후를 보낼 바람직한 생활형편들은 못된다는 얘기이다.

손수 채마전에 심어서 나는 무공해남새를 마음껏 먹을수 있고 환경과 공기가 청정한 고향마을에서 여유롭게 만년을 보내는것이 얼마나 좋은가고 홍로인은 주장했다.

《연화땅을 적셔 흐르는 라림강은 송화강상류에 속해 환경오염이 없고 땅의 개척사도 이제 겨우 70년밖에 안되니 토질이 비옥해 연화땅은 살기 좋은 마을이지요…》 홍웅택로인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갔지만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올 날이 반드시 있을것이라고 막연하게나마 기대했다.

환경이 좋은 마을에서 살아서인지 현재 연화에서 살고있는 로인들중 장수로인들이 적지 않다. 현재 홍웅택로인은 연화향로인협회의 회장직을 맡아하고있는데 협회에는 80여명의 로인들이 활동하고있다고 소개했다.

《연화땅은 우리 부모님들이 피땀으로 일궈놓고 선조들의 뼈가 묻혀있는 우리 땅입니다. 어디에 가서 산들 이보다 더 좋은 고장을 만나겠습니까?! 그래서 연화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연화개척민의 후세들인 홍웅택로인과 김원호로인은 죽는 그날까지 연화땅에서 살다가 연화땅에 묻히기를 소원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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