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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에 종양김이 있다》중국종양의학의 창시자 김현택

편집/기자: [ 홍옥 기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5-23 14:26:12 ] 클릭: [ ]

천진시종양병원, 우리 나라 종양학과의 발상지이며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종양예방치료연구기지의 하나이며 의료, 교수, 과학연구, 예방을 일체화한 규모가 가장 큰 종양 전문 병원이다.

이 병원 정문옆에 이 병원을 대표하는 동상 하나가 세워져있다. 이 동상의 주인이 바로 중국종양의학 창시자인 김현택(金显宅)교수이다.

동상의 앞면에는 리서환이 쓴 덕고의수(德高医粹)라는 제사가 씌여져있다.

병원 정문옆에 세워진 김현택교수의 동상/ 사진 최화기자

김현택(金显宅), 중국종양의학 기틀을 다진 종양의학 전문가라는것만 알고 지난해 10월 중순 기자일행은 여러 경로를 통해 김현택교수가 근무했던 천진시인민병원, 지금의 천진시종양병원을 찾았다.

천진시종양병원 정보교류처의 호안(胡颜)이 우리를 접대했다. 그는 원장이 회의에 가고 자리를 비웠다면서 우리를 천진시종양병원 원사관(병원력사관)을 돌아보게 했다.

원사관은 3개 부분으로 나뉘여져있고 김현택교수를 소개하는 부분이 전체 원사관의 3분의 1를 점했다. 호안은 김현택교수님은 이미 1990년에 돌아가셨고 그의 세 자식 가운데 둘째딸 김용배(金蓉培)가 천진에서 살고있다고 알려주었다. 우리는 여러 부문을 찾아서야 김용배와 련락을 가지게 되였다.

올해 77세 나는 김용배는 매우 반가워하면서 많은 신문사, 잡지사, 텔레비죤방송국 기자들을 접대했지만 오늘 처음 조선족매체 기자들을 만난다고 무척 기뻐했다.

우리는 천진시종양병원으로부터 김현택교수님의 일부 상황은 알고있으나 김선생님을 통해 김현택교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싶어 찾아왔다고 의향을 밝혔다.

북경대학 의학원을 졸업한 김용배는 언변이 좋고 성격 또한 매섭고 예리해 보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거침없이 술술 이야기를 펼쳐갔다. 아버지의 손을 통해 많은 환자들이 새생명을 찾았는데 이 가운데 마인초에 대한 수술을 손꼽았다.

91세의 마인초 직장암수술, 세계 의료계 들썽

이름난 교육자이고 경제학자이며 인구학자인 91세 나는 마인초에 대한 직장암수술은 의학사상 기적이라는 평판을 받았으며 세계 의료계를 들썽했다.

1970년 마인초는 배변시 피가 섞여나왔다. 치질로 생각했는데 2년후에 직장암으로 진단받고 북경병원에 입원했다. 북경병원에서는 북경에 회의하러 간 전국의 외과전문가들을 초청해 합동진단을 하게 했다. 마인초는 91세 고령인데다 7가지 로인병이 있기에 수술을 고려할 여지조차 없고 화학치료만 할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인초의 사위 서탕신은 천진에 있는 왕덕원의사를 찾았다. 왕덕원은 직장암은 화학치료에 별 효과가 없다며 수술할수 밖에 없다고 직설했다. 그리고 자기의 스승인 김현택교수를 추천했다.

김현택교수는 왕덕원과 서탕신의 말을 듣자마자 《마인초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50년대초에 저의가 그의 병을 치료한적이 있습니다》고 했다.

김현택교수는 《마로인이 년세가 많으니 먼저 결장에 구멍을 내서 배변에 영향주지 않도록 한 다음 두주일후에 항문종양절제술을 하면 대장 기타 부분에 영향이 없이 수술이 잘 될거 갔습니다》고 판단했다.

김현택교수가 수술방안을 말하자 북경병원의 일부 의사들은 천진에서 온 로인이 미쳤다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날 저녁 북경병원의 군대표가 김현택교수를 찾아와 마인초는 보통인물이 아니니 오로지 성공해야 하지 실패해서는 안된다고 지시했다. 그바람에 김교수는 아예 손을 떼고 천진에 돌아왔다.

천진에 도착해서 얼마 안지나 김현택교수와 왕덕원은 북경에 오라는 전화를 받고 다시 북경에 갔다. 사실은 서탕신이 김현택과 왕덕원이 수술을 하도록 국무원에 단호하게 요구했고 주은래총리한테까지 보고가 올라갔던것이다. 주총리는 《환자 자신이 수술하겠다 하고 가족들도 결연히 수술을 요구하고있다. 의무일군들은 마땅히 수술을 고려해야 한다. 천진의 김현택, 왕덕원이 수술을 주관하고 회진을 조직한다. 토론후 다시 보고를 올리기를 바란다》고 서면의견을 표했다.

수술전에 주총리는 김현택교수를 만나 같은 류형 수술에서의 최고령을 물어보셨고 김교수는 87세라고 대답했다.

1972년 5월 31일, 주총리의 관심하에 쟁론중의 수술이 시작됐다. 《정치적인 온당》을 위해 김현택교수는 가장 아끼는 제자중의 한사람인 장천택을 천진에서 불러왔다. 장천택의 당원신분이 이외로 발생할수 있는 일을 잠시나마 대처할수 있다싶어서 였다.

수술을 마친후 주총리께서 전체 수술조 성원들을 접견했다. 왕덕원은 계속 북경에 남아 직접 간호를 맡았고 3주후 마인초의 식사, 체온이 확실히 문제가 없을 때 천진에 돌아왔다.

수술은 세계 의학계를 뒤흔들었다. 그후 암세포가 더는 확장되지 않았고 마인초는 10년후에 세상을 하직했다.

조선의 망명학생 세계 1류 의학원의 수재로

1904년 음력 3월 7일 한국 서울에서 태여난 김현택은 서울사립배재중학교 3학년때 《3•1》운동 시위대에 나섰다가 일본군의 진압에 의해 요행 집으로 돌아왔다.

김현택의 아버지는 15살 나는 김현택을 중국에 보내려고 한 짐군에게 맡겼다. 김현택은 짐군의 지게에 업혀 중국 단동에로 밀항했다. 그는 조선독립운동가 김규식의 도움으로 김규식의 조카 김진성과 함께 하북 장가구에서 작은 병원을 차리고있는 형님 김현국을 찾아갔다.

1년후 형을 따라 상해에 간 김현택은 호강대학 부속중학교에서 공부하게 되고 성적이 뛰여나 호강대학 의학예과학부에 추천되였다. 호강대학은 미국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로서 교장과 교수 모두가 미국인이고 전부 영어로 교수했다. 김현택은 장가구에 있을 때 미국인 부부한테서 영어를 배운데다가 총명하고 열심히 공부를 한 보람으로 과목마다 《A》를 맞았다. 실험보고마저 《very good》라는 평가를 받았고 그의 시험지는 늘 모범답안지로 공개진렬됐다.

1926년 여름 김현택은 우수한 성적으로 세계 1류의 교육수준을 갖춘 북경협화의학원에 붙었다. 이 소식은 호강대학을 들끓게 했다. 김현택이 리극홍이란 학생과 나란이 호강대학에서 사상 처음 북경협화의학원에 붙은 학생이기때문이다.

북경협화의학원은 미국석유대왕 록펠러가 투자설립한 중화의학회로서 1915년 원 북경협화의학당의 전 산업을 사들이고 북경 동단의 원 예왕부(豫王府)의 전부 부동산을 사들인후 1921년에 새로 건설한것이다.

교육방침과 체계는 미국에서 가장 선진적인 하버드와 죤 홉킨스 의학원모식을 채용하고 8년 학제를 실행했다. 엄격한 선발제도로 도태률이 매우 높은 학교로 소문이 났다. 교원 대부분이 구미 유명 전문가들이며 해마다 국제적으로 권위가 있는 학자들을 객원교수로 모셔 세계 1류 의학교육수준과 선진과학연구 지위를 확보했다.

김현택은 중국에서 최정상인 의학전당에서 자기의 꿈을 키웠고 또한 우수한 성적으로 해마다 100원 장학금을 탔다.

 

   김현택교수 병문안을 온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리서환

1934년부터 종양의학 연구

협화의학원에서는 고급의학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8년제 학업을 완성한후에도 입원의사제(住院医师制)를 실시했다. 우수한 졸업생들을 뽑아 계속 양성시키는 제도였다. 해마다 한번 입원의사를 초빙하고 해마다 도태시키는데 3, 4년후에 최종 총입원의사 한명을 뽑는다. 입원의사임기를 마치면 전문인재로 되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협화학생들이 말하는 《보탑첨(宝塔尖)》이다. 조리입원의사들은 보탑첨의 빛을 향해 모든 힘을 다해 톺고 또 톺아오른다.

김현택에게 있어서 조리입원의사로 있는 기간은 일생동안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단련이였다. 매일 24시간 환자를 돌보야 하는 엄격하고 긴장하며 번거로운 일이다. 여기서 김현택은 기률을 엄격히 준수하고 로고를 참고견디며 곤난과 맞부딛쳐 나가는 사업작풍을 키웠다. 그의 이 사업풍격은 향후 그의 의료, 교수, 과학연구분야에서 모든 일을 침착하고 재치있게 처리할수 있는 기반이 되였다. 1930년 중국국적에 가입한 김현택은1931년 협화의학원을 졸업하고 미국뉴욕주립의과대학 의학박사 학위를 땄다.

1933년 협화의학원에서 중국에서의 첫 종양과를 창설했다. 이듬해 김현택이 3년 조리입원의사를 마친 그날 외과 주임인 하로드 레이크스가 김현택을 사무실에 불렀다. 《병원에서 종양과를 설립했는데 당신을 종양과주치의사로 추천하렵니다. 무슨 의견이 없는지요?》라고 물었다. 어리둥절해 있는 김현택을 보고 《종양과주임 죤슨 스피스가 벌써부터 당신을 마음에 두고있었고 병원에서는 신중하게 고려한 끝에 당신을 파격적으로 추천하는것입니다》고 해석했다.

김현택은 종양의학은 신흥학과이고 발전전망이 높은 의학이며 게다가 입원의사에서 주치의사로 발탁됨은 자기에 대한 학교의 중시정도를 설명한다고 생각하고《아무 의견도 없습니다. 종양과에 가겠습니다》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때부터 김현택교수는 생명의 려정을 중국 종양의학의 개척과 발전에 기여하고 필생의 심혈을 암과 싸우는 고난한 려정에 기울였다.

그후《9•18》사변, 《7•7》사변이 일어났다. 일본침략군이 비록 북평에서 날뛰기는 했지만 미국인이 경영하는 협화의학원에 대해서는 경솔하게 너서지 못했다. 협화의학원에서는 그전대로 교수, 과학연구를 계속했다. 일본군진압에 의해 고향을 떠났고 제 2 조국으로 여기는 중국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본군을 보면 김현택은 분노했고 고향의 비참한 운명에 더욱 가슴이 쓰려났다. 그는 더 열심히 배워 조국을 위해 위용을 떨치련다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1937년 7월 협화의학원에서는 김현택을 미국 뉴욕 맨하턴구기념병원종양중심에 보내 이름난 병리학자 유윈교수의 지도하에 종양병리를 배우게 했다. 그후로 김현택은 영국, 프랑스, 벨지끄, 독일, 단마르크, 스웨리예, 스위스, 이딸리아 등 8개국의 종양병원과 암중심의 의료연구사업을 고찰했다. 당시 미국의 종양연구기구에서는 김현택의 재능을 보아내고 그를 남기려고 애썼으나 김현택은 1939년 10월 의연히 귀국길에 올랐다.

1941년 12월 진주항사건이 발생했다. 북평에 있는 일본침략군이 협화의학원에 진입해 미국인이 20여년간 경영해온 세계수준급 의학원을 강제로 페교시켰다. 이미 두 딸을 둔 김현택은 실업자가 되였고 온집식구들이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였다.

당시 협화의학원의 교수로 있었던 변만년이 김현택을 찾아와《우리 언제까지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겠나, 천진에 아는 사람이 있으니 거기로 가자》고 했다. 변만년은 김현택보다 1년 먼저 협화의학원을 졸업한 선배였다. 변만년에 따르면 진선리라고 부르는 의사가 천진황가화원에서 은광병원을 꾸리고있는데 북평에 체류하고있는 협화의학원의 의사들이 은광병원에 가는것을 기대한다고 했다.

은광병원은 원래 부산과 하나뿐이던것이 내과, 외과, 소아과, 비뇨과, 이비후과, 구강과 등을 겸비한 종합진료소로 확대되면서 의술이 높고 진용이 어마어마하며 명성이 자자했다. 이들로 하여금 천진의 의료능력과 수준이 껑충 뛰여올랐다 한다.

업무량이 많아지자 은광병원규모를 확대해야 했다. 그러나 진선리의사는 더는 병원을 경영할 의향이 없었다. 김현택을 포함해서 몇명 교수들이 병원을 합자경영하기로 했다. 사람당 5000원씩 투자하여 병원기금으로 하고 투자는 하되 빼내지는 못하며 년말에도 분홍이 없고 단 수술비와 진찰비만 탈수 있다는《군자협정》을 체결했다. 김현택은 병원의 재무를 책임지는 외에 보통외과와 종양과 주임을 담당했다.

그러다 1945년 3월의 어느날, 장사를 하는 조선친구가 김현택의 귀에 대고 《일본군이 진황도까지 철거했다 하는데 군의가 모자라 당신을 데려가려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김현택은 반신반의했다. 며칠이 안돼 한 자본가로부터 일본군이 자기를 데려가려한다는 말을 또 들었다.

김현택은 같은 소식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한테서 들려올때는 꼭 영문이 있을거라고 판단하고 천진을 떠나기로 했다. 김현택의 안해는 가산을 팔아 황금으로 바꿨다. 그러나 김현택을 도와 안휘에 보내주겠다던 장씨 성의 사람은 김현택네를 강소 서주의 한 려관방에 안치하고는 김현택네 황금을 챙기고 종적을 감추었다.

얼마 안지나 일본이 투항하자 김현택은 천진에 돌아갔고 그때서야 장씨에게 사기당했음을 알게 되였다.

1945년 11월 김현택은 미국 시카고종양연구소 크트르박사의 초청을 받고 시카고종양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시카고대학 비린스부속병원에서 종양외과를 연수했다. 전에 미국에 갔을 때 김현택의 뛰여난 재능이 크트르박사의 신임을 얻었던것이다. 1년여 시간의 연구, 연수를 거쳐 그의 의료수준이 세계수준과 더 가까이 가게 되였으며 더 심도깊은 분야로 매진하게 되였다. 김현택은 크트르의 만류를 사절하고 다시 중국에 돌아왔다.

공산당도 병이 날것이고 의사가 수요된다

중국대륙은 포화속에 있었고 해방전쟁이 가열해졌다. 북평과 천진의 국민당세력이 점점 약해지자 관리와 부자들이 다투어 북평과 천진을 떠났다. 김현택의 안해도 정부 요직에 있는 친구를 통해 향항비자를 밟아놓았다. 집에 있는 기물들을 나무상자에 넣고 떠나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김현택은 이왕보다 더 침착했다. 병원일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자료를 찾고 론문을 쓰고 향항이란 두 글자는 입밖에 담지도 않았다.

《여보 당신, 더는 지체할수 없어요. 비자에는 네사람으로 돼 있어요. 이제 더 지체하면 아이가 태여나게 된단 말이예요!》. 출산날자가 가까와오는 안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리 남기오, 가지 맙시다》, 《뭐라구요?》,《공산당도 사람이요. 그들도 병이 날수 있고 의사가 수요되오. 아세아인에 대한 외국인들의 경멸의 눈길을 참을수가 없소. 그렇지 않으면 내가 왜 두번이나 미국에 있을 기회를 포기했겠소?》. 마음먹은 일이라면 누구도 설득할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는 안해인지라 안해는 김현택을 따르는수밖에 없었다.

1949년 1월 15일, 총소리와 포소리가 잠잠해지더니 해방군이 천진시가지에 들어섰다. 김현택은 평소와 다름없이 은광병원에 갔다. 은광병원은 천진의 기타 병원과 마찬가지로 부상자들로 꽉 찼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인차 부상병치료에 나섰다.

그후 조선전쟁이 발생하고 김현택은 주동적으로 흑룡강성에 있는 지원군전지후방에  갔고 민관합작경영시에는 김현택과 그의 동업자들은 은광병원의 부동산과 은행저금을 몽땅 국고에 바쳤으며 김현택교수는 또 자기가 소중히 간직하고있던 100밀리그람되는 라듐(镭)을 인민병원에 내놨다.

《천진에 종양김이 있다》

새중국이 건립된 후 천진시의 많은 병원에서는 김현택의 의술과 명성을 보아내고 서로 김현택를 초빙하려 애썼다. 천진시위생국에서는 원래의 마의사병원을 접수한후 천진시립인민병원으로 개칭하고 김현택과 방선지란 의사에게 위탁해 종양과와 골과를 건립하려 했으며 북경일단병원에서도 종양과를 건립할 의향으로 김현택을 초빙하려 했다.

이 시기 김현택은 반달은 천진에서 근무하고 나머지 반달은 북경에서 근무하면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러다 몽골지도자를 진료하라는 특수임무를 맡았다. 몽골에 다녀온후 12지장위궤양수술을 받은 김현택은 천진의 일만 하게 되였다.

1952년 천진시립인민병원에서는 종양과를 내오고 김현택교수를 고문의사로 초빙했다. 이가 바로 새중국이 건립된 후 중국에서 가장 처음 건립한 종양과였다.

천진의 백성들속에는《천진에 종양김이 있다》는 말이 전해졌는데 이는 김현택교수의 조예깊은 의술과 숭고한 의덕에 대한 평가라 한다.

김현택교수는 종양외과에 깊은 조예가 있을 뿐만아니라 해부학을 정통하고 각 부위의 림파순환을 자기 손금보듯 잘 알았다. 그런 그인지라 그의 수술은 해부층면에서 시술한다는것이다.

과감하고 정확하며 재치있고 정밀하며 전체 수술과정이 조리정연하고 간결신속하며 합병증이 적고 치유률 또한 높다는것이 그의 시술에 대한 평판이다.

그의 시술을 본적이 있는 모든 국내외 전문가들은 그에게 존경과 탄복을 내비치며 한차례의 예술적 감상을 했다고 치하한다.

김현택교수는 일찍 1937년 세계에서 제일 처음 《기이적혈구증식성 림파육아종병(嗜伊红细胞增生性淋巴肉芽肿病)》을 발견했고 194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설암근치성합동절제술(舌癌根治性联合切除术)》을 창설했으며 1959년 국내에서 처음 《이하선하악내측부의 종양(腮腺下颌内侧部的肿瘤)》림상특점을 서술했으며 제일 처음으로 유선 및 머리목부위의 종양과 자궁경부암의 림상연구, 진단과 수술치료를 전국에 보급했다.

196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항암학술회의에서 김현택교수는 《유선암근치술과 근치술 치료효과확대 비교》란 제목으로 론문을 발표했다. 일부 전문가들이 그의 보고를 듣고 의심스러워 했고 회의장분위기가 삽시에 팽팽해지고 공기가 멈춘듯 조용했다. 이때 뽈스까에서 온 전문가가 일어서서 《저의가 김현택교수님의 수술을 직접 봤습니다. 수술은 절묘하고 그 효과에 감탄했습니다》라고 하자 순간적인 정적에 이어 열렬한 박수소리가 온 회의장에 울려퍼졌다.

1963년 김현택교수는 중국의 첫 종양학잡지 《천진의약•종양부간》(그후 《중국종양림상》으로 개칭)을 창간하고 1984년 중국항암협회 설립을 발기했다. 미국종양외과학회에서는 김현택교수에게 영예회원 칭호를 수여했다.

1981년 김현택교수는 위생부 과학위원회 위원, 중화의학회 종양학회 부주임위원으로 되였다.

병실을 돌아보고있는 김현택교수(우로 두번째)

종양의학의《5호상장(五虎上将)》 양성

김현택교수가 종양의학과 과학연구면에서 기울인 노력과 쌓아온 실적은 더 의심할나위 없이 출중했다. 그러나 중국종양의학사업발전에 대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보귀하며 가장 중대한 의의가 있는 공헌이 바로 김현택교수가 갖고있는 종양의학의 연박한 학식과 깊은 조예를 빠짐없이 차세대에 전수한것이라 하겠다.

수십년간 한패 또 한패의 고급전문인재들이 김현택교수의 가르침을 받고 두각을 들어냈다. 이 가운데 김현택교수가 가장 아끼는 제자《5호상장(五虎上将)》이 있는데 이들 또한 종양의학에서 마멸할수 없는 업적을 쌓았다.

《5호상장(五虎上将)》이란 바로 병리에 능란한 왕덕연(고), 전면 발전한 장천택(고), 머리와 목 종양전문가 리수령, 골반강과 복부 종양에 능통한 김가서(고), 유선과 흉부 종양에 조예가 깊은 왕덕원(고)이다. 이들은 인민병원의 기둥이였다.

1952년 천진시립인민병원 종양과가 설립된 초기 20개 침대에 3명 의사뿐이 였다. 김현택교수는 무슨일에서나 인재가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한다는것을 알고있는터라 골간양성을 종양과의 첫째 가는 일로 삼았다.

그는 인민병원을 포함해 천진시에서 10명 학원을 모집하고 양성반을 꾸렸다. 낮에는 시간을 빼낼수 없어 저녁에 교수를 했다. 주로 방사치료의 물리기초와 방사생물학 기초부터 배워주었는데 1주일에 두번, 2년을 한기로 했다. 그때 학원들이 기록정리한 《종양학강의》가 나중에 김현택교수가 천진에서 꾸린 전국 고급종양의사연수반의 정식교재로 되였다. 교재는 다음기 연수반을 시작할때마다 수정했고 1988년까지 6판을 인쇄했다.

위생부의 위탁을 받고1954년 12월 김현택교수는 제 1기 전국 종양의사연수반을 주관,개강하고 그후 해마다 1기씩, 문화대혁명시기 7년간 중단된것을 빼고 줄곧 꾸려왔다. 이 연수반은 1993년까지 도합 23기를 견지했는데 선후 400여명학원을 양성했다.

프랑스 유명 방사치료학자 크투어교수한테서 방사치료를 배운 김현택교수는 직접 학생들에게 시범하면서 방사치료를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는 《종양의사로서 종양병리를 모르면 반 의사밖에 될수 없다》며 학원마다 종양병리를 배우게 하고 병리조각을 읽게 하고 지도해 주었다.

수술이라면 김현택교수의 가장 정채로운 부분이다, 그는 매 학원들에게 전형적인 근치술시범을 보여주고 절개부위 설계에서부터 수술진행과정을 한단계 한단계씩 배워주었고 주의사항도 세심하게 가르쳐주었다.

《김현택교수는 한눈에 확 트이게 알려줄 뿐만 아니라 똑똑하고 기억에 남게 교수한다. 그는 또 론문쓰기도 빼놓지 않고 가르쳐주었다》. 학생들의 평가이다.

중국공정원 원사이며 천진시종양연구소 소장인 학희산은 이렇게 말한다. 《1987년 조직에서 천진시종양병원 원장직을 저의 한테 맡기기로 했을 때이다. 김원장은 83세 나이에 병든 몸을 간신히 옮기면서 5층에 있는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그는 망설이고있는 저에게 크나큰 신심을 주신 분이다. 외국 손님들이 김교수를 방문할적마다 김교수는 언제나 류창한 영어로 저의 사업을 지지해줄것을 부탁했다》.

김현택교수의 가르침을 받은 학원 가운데 절강성종양병원, 중산의학원 부속종양연구소, 호북성병원과 종양연구소, 길림성종양병원과 종양연구소, 산동성종양병원, 산동성덕주시 지구종양병원, 성도군구 종양연구소, 하북성종양연구소 등을 창설한 이가 있다. 이외 일부 학원들은 여러 가지 종양학 잡지와 신문을 창간했다.

1980년 김현택교수는 천진시립인민병원 원장, 천진시종양연구소 소장을 맡았다. 1981년 초 천진에서 《전국 종양의사연수반 제1기 학술교류회》를 소집한후 1989년 10월 제2기 학술교류회가 재차 천진에서 소집하게 되였다, 회의에서 김현택교수를 《중국종양의학 지부》로 추대했다.

그리고 중국항암사업에 대한 김현택교수의 탁월한 공헌에 비추어 주비조를 설립하고 김현택동상을 세워 영원히 기념하기로 했다. 당시 김현택교수는 이미 중병에 걸린 상황이였다.

김현택교수가 자랑하는 제자중의《5호상장(五虎上将)》

눈을 감으면서 처음 사위 이름 부른 장인

《체면이 있고 그럴듯한 사람을 니 마음대로 고를수 있겠건만 하필이면 집안이 볼품 없고 재산도 없는 조선인한테 시집가다니, 뭘 볼것 있다고…》.

이는 1932년 김현택교수의 안해 오패구(吴佩球)가 김현택과 결혼을 하련다고 통보한후 오패구의 아버지가 발칵 성을 내며 내뱉은 말이다.

1932년 12월 25일 결혼식에서의 신랑 김현택, 신부 오패구

오패구는 천진시 4대 매판자본중의 하나인 회풍은행(汇丰银行) 천진분행 제 1임 화장방경리 오조경(吴调卿)의 손녀이고 오패구의 아버지 오희원(吴熙元)은 천진, 당고 방직업의 거두였다. 오패구는 오희원의 큰딸이며 총명하고 담량이 크며 인물 또한 출중했다.

1928년 여름방학 김현택은 기독교회에서 조직한 북경서산불사에서 있은 청년여름캠프에서 천진에서 온 오패구를 만났다.

오패구는 예쁘장하게 생겼을 뿐만아니라 테니스, 바드민턴, 말타기, 스케이팅…못하는것이 없었다. 그는 캠프에 참가한 100명 청년남녀들의 화제로 되였다. 그러나 김현택은 자기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할 일만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테니스경기장에서 오패구를 만나게 되였고 혼합팀추첨에서 둘이 한팀을 묶게 되였다.  테니스경기에서 둘은 소통이 잘 되고 손발이 잘 맞아 2등을 했다.  

오패구는 김현택이 운동건장일 뿐만아니라 협화의학원의 최우수생이며 자기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즐긴다는것을 알았다. 또한 김현택의 성실하고 듬직하며 소박하고 출중한 재능은 오패구로 하여금 흠모의 마음을 가지게 했다.

1929년 오패구는 연경대학 가정학부에 붙었고  김현택과 함께 연경대학 합창대에 입대하기로 약속했다.아름다운 선률이 이들의 사랑을 움트게 했다. 

1932년 12월 25일, 오패구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현택의 형님일가와 친구들만 참가한 가운데 김현택과 결혼식을 올렸다.결혼식이 끝날무렵 오패구의 어머니와 할머니께서 결혼식장에 들어섰다. 김현택을 보던 오패구의 할머니는 《참말로 멋지게 생긴 신랑이구나, 그렇다니까 나는 손녀의 눈설미를 알고도 남지...》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 딸인 김용배는 《천진해방 2년전인가 우리는 외할아버지께서 생명이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북경에 갔다. 그때 외할아버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자 (字)<달암(达庵)>을 부르며 머리를 끄덕이시더라》, 《어머니께서 결혼해서 15년만이지요. 실제 마음속으로는 언녕 아버지를 인정했으나 그 자존심때문이죠》라고 했다.

김용배에 따르면 연경대학 가정학부를 졸업한 어머니는 해방초기 천진시위생국의 부탁을 받고 천진의학도서관을 창설, 부관장으로 있다가 아버지가 병에 걸리면서 가정주부로 되였다. 비록 《공가》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아버지를 잘 섬기고 자식들을 훌륭히 키워 후회하지 않았다 한다.

오패구는 김현택과 57년 넘는 인생을 함께 했으며 2008년 97세에 세상을 떠났다. 김현택교수가 살던 천진 5대도의 목남도 69호 (天津 五大道 睦南道 69号)는 천진 명인옛집으로 남아 천진시 주요 유람지의 하나로 되였다.

리서환 제사: 덕고의수(德高医粹)

1994년 중공중앙 선전부의 비준을 거쳐 김현택교수의 동상이 천진시종양병원 정문앞에 세워졌다.

동상 정면에는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전국 정협 주석인 리서환이 쓴《덕고의수(德高医粹) 》란 제사가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김현택교수의 간력이 적혀있었는데 본적이 한국 서울이란 글도 있었다.

문화대혁명후 김현택교수는 중국의 암발병률이 해방초기의 10배로 높아졌음을 감지하고 종양의료와 과학연구 능력수준을 하루빨리 향상시켜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의 노력으로 1977년 국무원에서는 900만원 전문 자금을 조달해 천진시종양병원 건설을 비준했다. 10년간의 노력을 거쳐 1987년 천진시종양병원이 일떠섰다.

《김원장한테서 유명전문가란 티가 나지 않는다. 환자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애롭고 병마와 싸우도록 용기와 신심을 주며 그는 포기란 말을 입밖에 꺼낸적이 없다》. 병원 의무일군들의 말이다.

천진시 하서구 겸덕장에서 살고있는 한 주민의 아버지가 암말기 환자였다. 환자는 만일 김현택의사에게 병을 보일수만 있다면 위안이나 받고 눈을 감으련만…라고 아들한테 말했다. 이 사실을 친구 왕병한테서 알고 김교수는 혼자서 도보로 환자집에 다녀가 환자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종업원들의 업무향상을 념두에 두고 병원의 발전을 위해 김교수는 외국전문가들을 초청해 특강을 조직하고 여러 가지 기회를 빌어 젊은 의사들이 국외에 가 연수하도록 애썼다.

특히 응당 가져야 할 직함명액을 위해 친히 해당 부문에 뛰여다니는 원장이다. 그는 종업원들이 다채롭게 여유생활을 보내도록 직접 운동장소를 마련해 주며 종업원들을 이끌고 여러 가지 운동을 하군했다.

김원장이 너그럽고 붙임성이 좋으며 동료들을 잘 관심해준다는것은 누구나 다 알아주는 일이다.

문화대혁명때 김원장을 《고발》한적이 있는 한 의사는 진급, 출국연수 등에서 김원장으로 인해 순조롭지 못할가 근심이 태산 같았다. 그러나 김원장은 관건문제에서 막기는커녕 도움을 주기까지 했다. 그 의사는 《김교수는 진정 무엇보다 사업을 첫자리에 놓는 분이다》고 감명깊게 말했다.

《1988년 큰병원들이 위생원과 합작하여 의료활동을 하는 바람이 불었다. 기층병원에서도 전문가의 이름을 걸고 환자들을 끌어들였다. 김원장은 <누가 기타병원과 합작해 진료활동을 한다면 그를 면직시키겠다>, <천진의 어느 한 병원에서 출근할 필요 없이 내 이름만 내걸게 한다면 한달에 400원씩 주겠다고 한다. 나는 이런 일을 절대 안한다>, <당신들은 사업을 해야 하지 돈을 벌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천진시종양병원 리려경의 말이다.

1985년 김용배의 오른쪽란소에 물체가 생겨 수술을 받아야 했다. 김용배는 아버지가 있는 병원에서 수술했으면 했는데《암환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있다. 이같은 작은 수술은 다른 병원에 가서 해라》는 아버지의 말에 섭섭한 대로 다른 병원에 가 수술을 받는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에서의 《이상한》 축구팬

김현택교수의 가족(뒤줄 좌로부터 큰딸 김운배, 아들 김문배, 둘째딸 김용배)

축구를 엄청 즐기는 김현택교수는 학교다닐때는 학교축구선수로 활약했고 의사로 있는 그 바쁜 와중에도 시간만 있으면 일부러 북경에 가 국제축구경기를 구경할 정도로 충실한 축구애호가였다.

김용배는 《언제인가 아버지가 민원체육장에서 있은 중국 대 조선 축구친선경기를 관람하고 와서 <어느 팀이 꼴을 넣든지 나는 소리지르고 필사적으로 초모자를 하늘에 던지며 응원했다. 곁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던만 그들이 나의 마음을 알길 없지>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그 심정을 내가 잘 알고있지요.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고 했다.

김용배에 따르면 자기네 3남매 모두가 타민족과 결혼했지만 슬하 자식 모두, 다음세대까지 호적에 조선족으로 올렸다 한다. 현재 언니 김운배(金芸培)와 남동생 김문배(金文培)는 미국에서 살고있다. 언니는 국가수영선수로 활약한적이 있으며 남동생은 미국에서 마취의사로 있다. 김용배는 김씨 가문에 의학에 종사하는 후대들이 거의 7,8명은 잘 된다 했다.

《중국에서 생활한지 수십년이 지나도 아버지는 소고기무우국, 불고기, 김치랑 랭국이랑 즐겨 자셨다. 특히 식사할 때 랭수에 밥 넣고 드시기를 좋아했다. 가정학을 배운 어머니라 물에 밥 넣고 자시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그 습관을 고치지 못했다》. 김용배는 이렇게 말하면서 어머니는 시집 친척들이나 조선족친구들 한테서 조선족음식 만들기를 배웠고 김치도 늘 집에서 담그셨다고 말한다.

81세에 입당, 소원 이루다

일본침략군의 시달림에 모대기는 조국을 살리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해내기 위해 의학을 배운 김현택, 공산당이 령도하에 새중국에서 종양연구에 몰두할수 있었던 그도 다른 로지식분자들처럼 공산당에 가입하는것이 소원이였다.

그러나 그의 복잡한 사회관계때문에 그의 소원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53년 국가수영선수로 있던 김현택교수의 큰딸 김운배가 기타 선수들과 같이 웽그리아 부다페스트로 가 훈련할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아버지의 국적심사에서 떨어졌다. 그때 김현택교수가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발이 있었다. 《순풍에 돛을 올리듯 일생동안 순조로울리가 없다. 곡절이 있기마련이니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

1952년의 일이다. 김교수가 김용배를 데리고 북대하에 가 휴가를 보내게 되였다. 검표구를 지나는데 경찰이 《당신이 김현택의사 아닙니까? 당신은 외국인이기에 등록해야 합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내내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하시더라고 김용배는 당시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후 문화대혁명때 《반동학술권위》란 모자를 쓰고 로동개조를 했으며 오씨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몰수 당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하지만 공산당에 가입하려는 김현택교수의 의지는 굽히지 않았다. 1979년에 쓴 김현택교수의 입당 신청서중의 내용을 보자.

《공산당이 구사회를 개조하고 새중국을 건립한후의 하나 또 하나의 성공을 보고 특히 소수민족에 대한 정책은 나를 감동시켰다. 멸시를 받고 압박을 받았던 소수민족이 나라의 주인중의 일원으로 되였다. 기쁘고 감탄한다. 공산당이 없으면 중국인민은 세계인민들속에서 우뚝 설수 없다…》

《1985년 아버지가 관상동맥경화증으로 천진 대고로 인민병원에 입원했을때이다. 천진시위 조직부에서 직접 병원에 와 상급 당위에서 아버지를 중공 예비당원으로 비준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아버지가 베고있던 베개수건이 흥건히 젖어있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견지하는 <진심을 터놓고 영욕을 같이 한다>는것이 어떤것임을 알게 되였다》.김용배의 말이다.

《해방전에 나는 외과수술을 해 가정을 먹여살려야 했다. 공산당이  령도하는 새중국이 없으면 나는 전문 종양연구에 몰두할수 없다. 공산당이 나에게 종신사업을 할수 있는 생명을 주었다》. 김교수의 의의깊은 말이다.

 《골회를 발해에 뿌려다오》

1987년 9월, 83세 나는 김현택교수는 68년만에  고향땅을 다시 밟게 되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아버지는 고향행을 잊지 못하고 그냥 흥분에 겨워 있었다. 그는 병이 나아지면 함께 금강산구경도 해보자고 하면서 조선노래를 부르셨다. 아버지는 남중음으로서 노래를 참 잘 부르셨다》.

1990년 9월 4일, 김현택교수는 흉선암으로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86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당시 전국 정협 주석인 리선념이 화환을 보내고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서환이 화환과 조전을 보냈으며 전국 정협 부주석이며 93학사 중앙주석 주배원 등도 화환을 보내왔다. 천진시위, 시정부의 당정 지도자들이 추도식에 참석했다.

리서환동지가 보낸 조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김현택동지는 우리 나라 종양의료사업의 창설과 발전을 위해 필생의 정력을 몰부었는바 돌출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암환자들의 통증을 해소하고 위험에 처한 생명을 구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했다》.

김현택교수의 둘째딸 김용배와 남편 방우문이 가족들을 소개하고있다/ 사진 최화 기자

김용배에 따르면 올해는 김현택교수 탄생 110돐이 되는 해이다. 4월 4일 천진시종양병원에서는 천진시 관련 지도자와 의료계 학자, 한국원자력병원 원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좌담회를 가졌다. 천진시종양병원에서는 또 천진시우정국과 공동으로 김현택기념우표 발행을 추진하고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기간 김현택교수는 골회를 발해에 뿌려 인천을 마주보게 해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다 한다.

김교수의 유언대로 안해 오패구는 김용배와 특별히 미국에서 온 아들 김문배를 데리고 골회를 발해에 뿌렸다.

조선의 망명학생이 중국에서 의학을 배우고 중국을 제2고향으로 여긴 김현택교수, 그는 중국 조선족으로서 우리 나라 종양의학을 창설하고 발전시키는데 자신의 모든 힘을 이바지 했다.

김현택(金显宅) 략력

김현택교수

1904년 음력 3월 7일 한국 서울 출생

1919년 압록강 건너 중국 밀항

1923년 상해 호강대학 의학예과학부에 추천

1926년 북평협화의학원 입학

1930년 중국국적 입적

1931년 협화의학원 졸업, 미국뉴욕주립의과대학 의학박사 학위 취득

1934년 협화의학원 종양과 근무

1937년 미국뉴욕시맨하턴구기념병원 학습

1939년 협화의학원 부교수, 종양과 주임

1942년 동료들과 은광병원 운영

1946년 미국 시카코대학비린스부속병원 종양외과서 연수, 종양연구소 연구원

1951년 항미원조지원의료팀 참가

1952년 새중국 첫 종양과 창설

1954년 위생부 위탁으로 전국종양림상 의사연수반 개강

1957년 천진시93학사 가입

1960년 천진시 제 2기 정협 위원

1963년 중국 첫 종양의학잡지 《천진의약잡지종양학 부간》창간

1966년 《반동학술권위》모자 쓰고 로동개조, 재산 몰수

1972년 고령인 마인초에게 시술

1980년 천진시립인민병원 원장, 천진시종양연구소 소장

천진시 정협 부주석

1981년 중화인민공화국 위생부 의학과학위원회 위원

198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30돐 경축모임 참가

1983년 전국 정협 상무위원회 위원

천진시인민병원 명예 원장

천진시종양연구소 명예 소장

전국 93학사 제4기 중앙위원회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

1984년 《중국항암협회》건립 제기

미국종양외과학회 영예회원

198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국항암학회 설립, 명예리사장

1987년 한국 고향 방문

1988년 미국종양학회 회원

1989년 《중국종양의학 지부》로 추대

93학사 중앙참의위원회 위원

1990년 9월 4일 서거

주요 론문과 성과

세계적으로 처음《기이적혈구증식성림파육아종병(嗜伊红细胞增生性淋巴肉芽肿病)》발견, 관련 론문 발표,

《설암근치성합동절제술(舌癌根治性联合切除术)》창설,

《메틸콜란트렌이 골섬유유발에 대한 관찰(甲基胆蒽诱发骨纤维的观察)》론문 발표,

《암세포혈류전이에 관한 인식》론문 발표,《이하선하악내측부의 종양(腮腺下颌内侧部的肿瘤)》림상특점 서술,

유선 및 머리목부위의 종양과 자궁경부암 림상연구,

진단과 수술치료를 전국에 보급,

《독소루비신1회정맥주사 쥐종양 및 기타 병변 야기》론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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