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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사람들과 정을 나누며 새 편장 써내려가다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吉林日报 ] 발표시간: [ 2021-07-14 14:18:39 ] 클릭: [ ]

—돈화시 대석두진 삼도하자촌 당지부 서기 촌민위원회 주임 곡봉걸

사진설명: 효심마을 만두잔치가 삼도하자촌에서 열린 가운데 곡봉걸(왼쪽 세번째)과 마을 주민들이 로인들을 위해 만두를 빚고 있다.

초여름이 되면 만물은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생기발랄해진다.

돈화시 대석두진에서 남쪽으로 9키메터쯤 가면 여기저기에서 소들의 영각소리와 풀뜯는 양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삼도하자촌이 들려주는 향촌 진흥의 ‘행진곡’이다.

곡봉걸은 삼도하자촌의 ‘키잡이’로서 2010년에 촌당지부 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을 맡은 이래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당의 기층 보루를 다지고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가난의 뿌리’를 뽑고 ‘부자묘’를 키우며 촌의 환경을 미화하고 문명한 촌풍을 키웠다. 춘하추동이 열한번 흘러간 지금 삼도하자촌은 환골탈태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어제날의 ‘빈곤촌’, ‘민원(上访)촌’, ‘럭후촌’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부유촌’, ‘문명촌’, ‘생태촌’으로 탈바꿈하였다.

“우리 촌의 오늘은 좋은 서기 덕분이다. 그녀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부유한고 문명하며 환경이 아름다운 삼도하자촌이 없었을 것이다!” 곡봉걸을 말할라 치면 삼도하자촌의 촌민들은 너나없이 엄지를 내든다.

“촌민들을 잘 살게 하는 것은 공산당원인 나의 책임이다.”

아광호 국가습지공원과 린접해 있는 삼도하자촌은 저지대로 인해 ‘10년중 9년은 흉년이 드는’ 마을이다. 가난으로 인해 삼도하자촌은 일찍 민원을 올리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돈화시에서 유명했다.

삼도하자촌의 빈곤하고 락후한 면모를 개변하기 위하여 1998년 대석두진당위 서기는 곡봉걸의 남편 정지화를 찾아 그가 촌에 돌아와 당지부 서기를 맡고 촌민들을 이끌고 삼도하자촌의 ‘빈곤모자’와 ‘민원모자’를 벗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당시 곡봉걸 부부는 돈화시에서 음식점을 경영하였는데 장사가 잘 되여 년 수입이 수만원에 달했지만 정지화는 결연히 삼도하자촌에 돌아와 촌당지부 서기에 추천, 당선되였다. 남편의 매 하나의 언행은 곡봉걸을 깊이 감동시켰으며 남편의 사업을 지지하기 위하여 곡봉걸은 식당을 그만두고 삼도하자촌에 돌아와 원망 한마디 없이 남편의 뒤시중을 들었다.

몇년간의 노력을 거쳐 촌민들은 이전의 낡은 습관을 버리고 빈곤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기 위해 힘썼으며 마을에는 더는 민원을 제기하고 떠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풍운조화는 예측할 수 없다더니 삼도하자촌이 서서히 정상 궤도에 들어서던 2010년 5월, 정지화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일터에서 쓰러졌다. 농망기임에도 불구하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든 농사일을 제쳐놓고 정지화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며 곡봉걸과 함께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정지화의 후사를 치른 후 촌민들은 곡봉걸의 집을 찾아와 “로서기가 가니 촌에 키잡이가 없어졌구만. 우리가 당신을 믿으니 이 서기를 당신이 맡아주오.”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고통속에서 미처 헤여나오지 못한 곡봉걸은 사업할 생각이 없었으나 촌민들의 간절하고도 초조한 얼굴을 보고 이들을 위해 분투하던 남편의 사업을 생각났고 따라서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엄마, 아빠도 돌아가셨는데 엄마까지 더이상 하면 안돼요!” 딸 정기가 울면서 권유했다. 딸의 말은 곡봉걸의 마음을 찢어놓았고 눈물은 봇물처럼 흘러내렸다. 한참 지난 후 곡봉걸은 머리를 쳐들었다. 그는 눈물범벅이 되여 딸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원으로서 촌민들을 잘 살게 할 책임이 있단다. 이 또한 너의 아버지가 남긴 념원으로 나는 그를 대신해서 완성하여야 한다.” 두달 후의 촌당지부 서기 선거에서 마을의 16명 당원은 전체 통과의 형식으로 곡봉걸을 지지하였다. 이로부터 촌민들을 이끌고 빈곤해탈 치부의 ‘바톤’은 곡봉걸의 손에 넘겨졌으며 그녀는 삼도하자촌의 새로운 ‘세대주’가 되였다.

부임한 후 곡봉걸은 촌민들의 ‘허물없는 친구’와 ‘대변인’이 되여 누구의 일이든 모두 념려해주었다. 촌민 형숙진로인의 다리병이 재발하자 곡봉걸은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일이 끝나는 대로 로인네 집으로 달려갔다. “다리가 어떠세요? 일이 있으면 저한테 얘기하세요.” 집에 들어서기도 전에 곡봉걸의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병때문에 이렇게 찾아오다니.” 곡봉걸을 보자 형숙진로인의 마음은 따스해났다. “봉걸인 정말 우리의 좋은 서기일세. 촌의 누구네 집 일이든지 그는 모두 관리하고 도와주는데 우리가 잘 살게 된데는 정말 그의 공로가 크다네.” 곡봉걸의 손을 잡은 형숙진로인은 반달 웃음을 지었다.

11년 동안 그는 실제 행동으로 인민을 위해 성심성의껏 봉사하겠다는 공산당원의 초심과 취지를 보여주었다. “군중이 나를 믿고 수요한다면 나는 더 성실하게 여러 분을 위해 봉사하고 그들의 일을 내 일처럼 해야 한다.” 곡봉걸은 이렇게 말했고 또 이렇게 해왔다.

어느날 70세가 넘은 리춘란이 부랴부랴 촌부로 달려와 목청 높여 소리쳤다. “봉자(凤子)야, 우리 집 땅 어떡하면 좋으냐?” 알고보니 봄 파종 시간이 곧 지나가는데 리씨네 집의 밭은 아직 써레질을 하지 못해 농작물을 파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리아주머니, 걱정 말고 저에게 맡겨주세요. 농사짓는 데 지장이 없도록 보증할게요.” 곡봉걸의 승낙으로 로인의 울화가 내려갔다. 그날 곡봉걸은 일군을 시켜 자기집 차를 몰고 가서 리춘란을 도와 밭에 써레질을 해주었을 뿐더러 씨앗까지 뿌렸다. “봉자는 진심으로 우리 백성들을 위해 일을 하기에 우리는 어려움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기를 원하지요.” 곡봉걸의 이야기를 꺼내면 리춘란은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마음으로 군중을 생각하고 흑토에 깊은 정을 붙였다.

삼도하자촌에는 곡봉걸이 가보지 않은 집이 없다. 고령 로인으로부터 시작해서 어린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싶어 한다. 누구네 집에 분쟁이 생기면 그는 혹서든, 혹한이든 언제나 제일 먼저 그 집으로 찾아가 조정해준다. 누구의 집이 어려움에 봉착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는 항상 제1시간에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도움을 준다.

당원간부는 오직 군중을 마음에 두어야만 군중으로 하여금 희망을 보게 할 수 있고 군중의 옹호를 받을 수 있다. 삼도하자촌의 몇차례 조직 기바꿈 선거에서 곡봉걸은 모두 높은 득표수로 촌당지부 서기와 촌민위원회 주임을 련임했다. 그는 이미 마을 전체 백성들이 떠날 수 없는 ‘기둥’이자 ‘대들보’로 되였다.

“목청을 돋우느니 실제적인 일을 해내는 것이 낫지요.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가식’은 취할 필요가 없지요.”

곡봉걸은 길림성 우수공산당원, 길림성 특등 로동모범이며 전국 로력모범, 전국 3.8 붉은기수, 전국 녀성 공적 모범(全国巾帼建功标兵)이다. “공산당원은 선봉모범 역할을 해야 하며 관건적인 시각에 앞에 나섬으로써 당이 시름 놓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곡봉걸은 늘 이 말로 자신을 엄격히 요구해왔다.

2017년 7월 23일, 돈화 지역에 50년 만의 특대 홍수재해가 닥쳤다. 곡봉걸은 목 척추 질환 발작으로 인한 현기증을 무릅쓰고 마을의 당원 간부들을 이끌고 홍수퇴치 제1선에 뛰여들었다. 밤새 비를 무릅쓰고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켜 전 마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 안전을 보장했다.

곡봉걸은 마음속에 군중을 두고 있었고 군중들도 마음속으로 곡봉걸을 걱정하고 있었다.

“서기, 우리 모두 나왔으니 서기도 어서 나오시게!”

이날 밤, 곡봉걸의 모습이 마지막까지 보이지 않자 마을사람들은 안절부절하며 위챗으로 거듭 호출했다. 이때 곡봉걸은 한사람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허리 높이까지 차오른 물 속을 헤치면서 집집마다 일일이 확인하며 마지막 검사를 하고 있었다.

“저는 촌간부입니다. 마을 사람들중 한사람이라도 남아 있다면 저는 철수할 수 없습니다.”

곡봉걸은 말했다. 곡봉걸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느라 자신의 집은 미처 돌보지 못했다. 그날 그녀는 마을 사람들은 모두 대피시켰지만 자신의 년로한 시아버지는 미처 대피시키지 못했다. 여러해가 지난 지금도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면 촌민 장염은 여전히 울먹거렸다.

군중들은 곡봉걸을 매우 안쓰러워하며 그녀에게 “봉자, 자네는 녀자의 몸으로 마을에서 홀로 일을 떠맡고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네. 우리에게 아이디어만 내놓으면 돼.”라고 말하군 했다. 곡봉걸은 “목청껏 큰소리를 내느니 앞장서 행동하는 게 낫다. 말만 하고 일을 하지 않는 ‘가식’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빈곤호인 범봉군, 범봉리, 범봉재 삼형제가 삼도하자촌으로 갓 이사 왔을 때 병으로 로동능력을 상실하고 후손도 없는 것을 알고 곡봉걸은 삼형제의 식사와 병간호 비용을 주동적으로 부담했다.

“당신도 돌봐야 할 가정과 아이가 있는데 어찌 그들까지 돌보려 하는가?”

어느 한 촌민은 곡봉걸에게 권고했다.

“그들이 우리 마을로 이사 온 이상 나는 서기로서 그들을 돌봐야 합니다.”

곡봉걸은 말했다. 따뜻한 보살핌은 삼형제를 감동시켰고 그들로 하여금 생활의 신심을 되찾게 하였다. 후에 촌에 빈곤구제 공익일터가 생기자 곡봉걸은 범봉리를 위생청결원으로 배치하였다.

“동생, 안심하게. 내가 반드시 일을 잘할테니!”

범봉리는 곡봉걸을 안심시키며 당차게 말했다. 그 후 범봉리는 줄곧 성실하게 일했다. 그가 맡은 구간은 줄곧 삼도하자촌에서 가장 깨끗한 곳이였고 그 자신도 빈곤호에서 일약 ‘스타 청결원’로 변신했다. 2020년, 범봉재는 병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는 림종을 앞두고 자원적으로 유체기증의 방식으로 사회에 환원했다.

2010년 이래 곡봉걸은 마을의 5명 빈곤 촌민을 도왔다. 빈곤퇴치 난관돌파 임무가 시작된 후 곡봉걸은 규정에 따라 전부 그들에게 카드를 작성해주었고 빈곤가구에 포함시켰고 정부가 규정한 빈곤구제 임무를 완수하는 동시에 매년 자신의 자신의 경장지 수확에서 일부를 떼내여 그들을 도왔다. 해마다 명절이면 그녀는 위문품을 구입하여 빈곤한 가정에 보내주었고 누구든지 생활의 어려움에 부딪히면 선뜻 손을 내밀어 이끌어주었다. 다년간 곡봉걸이 자기의 주머니를 털어 빈곤군중들에게 보내준 후원금은 루계로 17만여원에 달했으며 전 촌의 모든 빈곤호를 도와 성공적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게끔 했다.

그는 청렴결백하게 일하면서 공적인 리익을 챙기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매년 출장회의 때나 사무물품 구입 때 촌을 위해 수만원을 지불했지만 단 한푼도 돌려받지 않았다. 코로나19 전염병 발생 기간 그녀는 련속 45일 동안 자신의 승용차를 무상으로 ‘촌급 방역 당직소’로 사용했고 또 1,000원을 지불하여 방호 마스크, 약품 등 방역 물자를 구매하여 집집마다 나눠주었다.

농촌 기층 당조직은 농촌의 당의 전반 사업과 전투력의 토대이다. 곡봉걸은 촌급 당건설사업을 매우 중시하여 촌에서 ‘5호 당조직’ 활동을 개척하고 전체 당원간부들을 교육하여 당성 관념을 확고히 하였으며 근면하게 직책을 리행하여 곳곳에서 모범적이고 솔선수범적인 역할을 발휘시켰다. 그녀는 ‘신시대문명실천소’에 의탁하여 리론학습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 당원들의 ‘소분대 선전’을 조직하여 집집마다 방문하여 당의 새로운 사상과 리론을 선전하였다. 그녀는 또한 먼저 ‘촌급 사무 당원 대행’ 활동을 제기하고 전개하였으며 촌급당원사무봉사소를 건립하고 14가지 당무 혁신조치를 실시하여 촌민을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실제적인 일을 했다. 촌에서 신흥산업을 발전시킴에 있어 당원간부들이 솔선수범하여 촌민들의 뒤근심을 덜어주었다. 촌민들이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당원자원봉사대는 늘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주었다.

당조직의 보루 역할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주축’이 되게 하였다. ‘일이 있으면 서기를 찾고 발전은 지부에 의지’하고 ‘당의 말을 듣고 당을 따라가는 것’은 촌민들의 공동한 인식으로 되였다. 현재 618명의 촌민중 22명의 정식 당원과 7명의 입당 적극분자가 있으며 최근 또 12명의 촌민이 입당 신청서를 제출했다.

/출처: 길림일보, 편역: 김태국 김가혜 김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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