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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분투의 영웅모범들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공산당넷 ] 발표시간: [ 2021-06-30 16:32:41 ] 클릭: [ ]

 

우리 나라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개혁의 비범한 로정에서 한세대 또 한세대 분투자들은 완강하게 싸우고 끊임없이 분투해왔다. 이 가운데서 천지를 감동시키는 수많은 영웅모범들이 용솟음쳐나왔다. 그들은 지혜와 땀 지어는 선혈과 생명으로 국가의 부강, 민족의 진흥, 인민들의 행복을 위해 눈물겨운 장려한 편장을 엮었다. 각 력사 시기의 영웅모범 모두는 우리들이 우러르고 따라배워야 할 사람들이다.

신민주주의혁명시기

동존서: 용감히 앞으로, 정의 위해 목숨 바치다

동존서, 1929년생, 하북성 회래현 사람, 가난한 농민 가정 출신. 1945년 7월 팔로군에 참가, 194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선후로 대공 3차, 소공 4차를 세웠으며‘용감메달’3매,‘모택동메달’1매를 획득했다. 1948년 5월 25일, 아군의 륭화성 공격 전투가 시작된 가운데 동존서는 위급한 관두에 남포를 안고 적군의 엄페호를 향해 돌진, 왼손으로 남포를 받쳐들고 오른손으로 도화선을 당겨 또치까를 폭파시켰다. 희생될 때 겨우 19세.

류호란: 위대하게 살고 영광스럽게 죽었다

류호란은 1932년 산서성 문수현 운주서촌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열네살 나던 해인 1946년 6월, 중공후보당원으로 비준되였다. 1946년 10월, 국민당군이 문수현성을 침범, 1947년 1월 12일, 국민당군과 지주무당에 의해 체포되였다. 적들의 위협 앞에서 그녀는 굴함없었으며 태연자약하게 작두 밑에 누웠다. 희생될 때 겨우 15세. 모택동은 붓을 들어  “위대하게 살고 영광스럽게 죽었다(生的偉大,死的光榮)”는 여덟글자를 적었다.

강죽균: 지조가 굳센 녀걸

1920년 8월 20일, 강죽균은 사천성 자공시 대산포진 강가만의 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43년 당시 중공중경시위 지도자의 한사람이였던 팽영오의 조수로 통신련락 사업을 했다. 1945년 팽영오와 결혼, 1948년 팽영오는 불행히 희생되였다. 같은 해 6월 14일, 반역자의 밀고로 강죽균은 중경 사재동감옥에 갇혔으며 1949년 11월 14일, 중경 해방 전야에 사재동감옥에서 살해되였다. 그녀는 공산주의 리상을 위해 29세의 생명을 바쳤다.

선성해: 인민의 음악가

선성해, 본적 광주, 1905년 오문의 한 빈곤한 사공 가정에서 태여났다. 1929년 빠리 고학의 길에 오른 그는 1935년 귀국 후 항일구국운동에 투신, 전투성과 감화력을 갖춘 대량의 대중가요들을 창작했다. 1938년 연안에서 불후의 명곡 〈황하대합창〉을 창작, 이 기간 또 〈생산대합창〉 등 대형 작품 및 〈3.8부녀절가〉 등 대량의 가곡을 창작했다. 1939년 6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에 가입했다. 1945년 모스크바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라병휘: 인류의 행복을 위해 투쟁하다

라병휘, 1897년 운남 이량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여났다. 1915년 호국전쟁 및 북벌전쟁에 참가, 1927년 7월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같은 해 11월 부대를 이끌고 의거, 중국공농홍군에 참가해 퇀장, 려장, 종대장, 군장 등 직을 력임했다. 1934년 10월 부대를 거느리고 장정에 참가했으며 1939년 부대를 인솔해 환동항일근거지를 개척했다. 해방전쟁 시기 신사군 제2부군장 겸 산동군구 부사령원직을 맡았다. 1946년 6월 21일, 란릉에서 돌연 병세가 악화되여 세상을 떠났다.

엽정: 렬화와 열혈이 명장을 만들다

엽정, 본명 엽위순, 1896년 광동 혜주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1924년 12월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5년 국민혁명군 제4군 참모처장을 맡았고 후에 독립퇀 퇀장으로 전임, 북벌전쟁에 참가했다. 일제 침입으로 국가가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해외에 있던 엽정은 결연히 귀국, 신사군 군장을 맡고 유격전쟁을 지휘하고 전개했다. 1941년 환남사변은 국내외를 놀래웠다. 엽정은 담판 시 불법 억류, 5년여 수감되였다가 1946년 3월 마침내 석방되였다. 4월 8일, 비행기 사고로 산서 흥현 흑차산에서 조난당했다.

양정우: 굴함없이 결연히 싸우다

양정우, 본명 마상덕, 1905년 하남성 확산현의 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1926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2년 가을 남만으로 파견되여 반석 홍석립자를 중심으로 하는 유격근거지 창건, 1936년 7월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을 맡았다. 부대를 거느리고 장기간 동남만 일대를 전전하면서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39년 경위려를 거느리고 몽강 일대를 전전, 홀몸으로 적들과 5주야 동안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1940년 2월 23일, 길림 몽강 삼도위자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류지단: 공산주의 신앙을 위해 끝까지 분투할 것이다

류지단, 1903년 10월 섬서성 보안현(지금의 지단현) 금탕진에서 출생, 1925년 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환, 1926년 가을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북벌전쟁에 참가, 1931년 10월 사자장 등과 서북반제동맹군을 편성하고 부총지휘를 맡았다. 후에 중국공농홍군 섬감변유격대로 개편, 총지휘를 맡고 섬감변혁명근거지를 개척했다. 1936년 3월, 홍군 28군을 거느리고 동정전역에 참가, 4월 14일 중양현 삼교진 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 때 나이 33세.

방지민: 중국은 기필코 밝은 전도가 있을 것이다

방지민, 1899년 출생, 강서 익양 사람, 1924년 3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전환. 대혁명 실패 후 감동북혁명근거지를 창건하고 중국공농홍군 제10군을 결성, 맑스주의 보편적 진리를 감동북 실제와 결부해 건당, 건군과 홍색정권 건립의 일련의 경험을 창조했다. 1934년 11월말, 령을 받고 홍군 북상항일선견대를 거느리고 북상, 1935년 1월 강서 옥산 롱수촌에서 체포되였다. 감옥에서 〈사랑스러운 중국〉, 〈청빈〉, 〈옥중실기〉 등 저명한 문장을 써냈다. 1935년 8월 6일, 강서 남창에서 영용히 희생, 그 때 나이 36세였다.

길홍창: 나는 항일을 위해 죽을 것이다

길홍창, 1895년 하남성 부구현 려담진에서 출생, 1913년 풍옥상 부대에 입대했다. 1930년 9월 소속 부대가 장개석에 의해 개편된 후 제22로군 총지휘 겸 제30사 사장 담임, 악예환혁명근거지  ‘포위토벌’  명령을 받았으나 태도가 소극적이였다. 1931년 8월, 장개석에 의해 병권을 해제당하고 강제 출국  ‘시찰’을 당했다가 1932년 귀국, 그 해 늦가을 북평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34년 중국인민반파쑈대동맹을 조직하고  《민족전기(戰旗)》보를 비밀리에 인쇄해 항일을 선전했다. 그 해 11월 9일, 천진 프랑스 조계지에서 체포되여 11월 24일 북평륙군감옥에서 피살되였다. 그 때 나이 39세.

양개혜: 나 한몸의 희생으로 큰 성공 불러오리라

양개혜, 1901년 호남 장사현 출생, 192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0년 모택동과 혁명 반려로 되고 기요, 련락, 비서, 인쇄, 총무 등 여러 직무를 한몸에 겸하고 모택동의 유력한 조수로 된다. 모택동을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상해, 소산, 광주로 전전하며 많은 사업을 전개했다. 1930년 체포, 모택동과의 부부 관계 해제 선포를 거절, 결연히 형장으로 향했다. 당시 29세.

향경여: 녀성해방 위해 일생 분투

향경여, 1895년 출생, 호남 사람. 1919년 채화삼과 함께 프랑스 고학, 결혼, 채화삼의 당 창건 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1922년 귀국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녀성해방 운동을 호소하고 대량의 녀성 사업 간부를 양성해 녀성해방 운동사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했다. 상해 제사공장과 남양 담배공장 대파업을 뛰여나게 령도했다. 1928년 체포되여 33세로 희생되였다.

하명한: 주의만 바르다면 머리가 잘린들 대수랴

하명한, 1900년 출생, 원적 호남, 1921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공호남성위 위원, 농민부장. 농민운동 간부를 양성하고 농민폭동을 령도하고 발동해 정강산 근거지 창건에 유력하게 배합했다. 중공호북성위 상무위원. 1928년 3월 체포, 지금껏 전해지는 취의시를 휘호한 후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28세.

구추백: 모두를 위해 한갈래 광명의 길 개척하련다

구추백은 중국공산당 조기 령도자의 한사람이며 위대한 맑스주의자,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 리론가, 선전가이며 중국혁명 문학 사업의 초석을 다진 한사람이다. 1899년 강소에서 출생, 1922년 모스크바서 중국공산당원으로 전환했다. 1923년 귀국 후 《신청년》 등 간행물의 주필을 맡고 당의 사상리론 건설에 창조적인 공헌을 했다. 제4차, 5차, 6차 당대회 위원으로 중국공산당의 중요한 령도자의 한사람이다. 8.7회의 후 당중앙 사업을 주최했으며 로신과 어깨 겯고 싸우면서 좌익문화 운동을 령도했다. 중화쏘베트공화국 중앙정부 교육부장 등 직을 담임했다. 1935년 국민당군에 체포되여 살해, 당시 36세였다.

채화삼: 생명으로 자신의 맹세를 리행

채화삼, 1895년 출생, 호남 사람, 프랑스에 고학. ‘중국공산당’ 이름을 제기한 첫 사람이다. 1921년 귀국 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당의 선전사업을 책임졌다. 군중을 령도해 투쟁하는 탁월한 재능을 체현, 걸출한 군중 령수였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이어 비서장, 선전부장 등 겸임. 1931년 향항에서 체포되여 36세로 영용히 희생되였다.

등중하: 최후의 승리는 필경은 우리들의 것이다

등중하, 1894년 출생, 호남 사람. 중국공산당 조기의 탁월한 령도인이고 걸출한 로동운동 령수이며 우리 당의 중요한 리론가이며 학자이다. 북경대학 철학학부에서 공부, 중국공산당 최초 당원의 한사람이다. 중화전국총공회 비서장 겸 선전부장, 이름 난 성향대파업을 조직 령도했다. 상악서특위 서기, 홍2군단 정위, 전적위원회 서기, 상악서 무장투쟁을 령도했다. 전국적색호제총회 주임 겸 당단서기. 1933년 상해에서 체포, 남경 우화대 형장에서 희생되였다. 당시 39세.

장태뢰: 우리들 장래의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장태뢰, 1898년 출생, 강소 사람. 천진 북양대학 법학과에서 공부, 중국공산당 최초 당원의 한사람. 1921년부터 쏘련서 공산국제 대표를 배석해 여러 차 중국에 와 중국공산당 창건 준비 사업에 참가했다. 1924년 귀국 후 단중앙 총서기, 중공광동성위 서기 겸 군위 서기, 중공중앙 남방국 서기 겸 남방국 군위 위원 등을 담임, 광주무장봉기 총지휘를 맡았다. 1927년 12월 광주봉기가 폭발, 전투를 지휘하던중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29세.

진담추: 투쟁을 견지하며 목숨 바쳐 정의를 지키다

진담추, 1896년 출생, 1차 당대회 대표이며 당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일찍 무한에서 학생들을 혁명의 길로 이끌고 로동운동, 청년운동, 녀성운동을 령도했다. 대혁명 실패 후 비밀 투쟁 견지, 중공 강서, 산동, 만주, 강소, 복건 성위 서기, 비서장, 중앙 후보위원, 중앙집행위원, 중앙정부 량식부 부장, 중공쏘베트구역 중앙분국 위원 겸 조직부장 등을 력임했다. 1943년 9월, 모택민, 림기로 등과 함께 군벌에 의해 비밀리에 살해당했다. 당시 47세.

하숙형: 생명으로 쟁쟁한 맹세를 리행

하숙형, 1876년 출생, 호남 사람, 1913년 37세에 호남성립제1사범 입학. 모택동과 깊은 우의, 함께 호남 대표로 중공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가했다. 중앙혁명근거지에 진입,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 내무인민위원부, 림시최고법정 등 요직에서 실사구시적인 조사연구를 중시했다. 1935년 유격전쟁 포위 돌파중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59세.

리대소: 두어깨에 도의를 떠메고…그 정신 후인들 계발

리대소, 1889년 하북성 출생, 일본 류학 시 애국운동에 앞장 섰다. 1916년 귀국 후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 경제학 교수로 있었으며 《신청년》 편집부에 근무, 신문화 운동 사령관의 한사람이다. 우리 나라 최초의 맑스주의 전파자로서 《신청년》에 〈나의 맑스주의관〉을 발표해 맑스주의 리론을 계통적으로 소개하고 맑스주의가 중국에서 널리 전파되도록 추동했다. 중국공산당 주요 창시자의 한사람이다. 당 창건 후 북방의 광범한 지역에서 맑스주의를 선전하며 로동운동을 전개하고 당조직 건립, 제1차 국공합작의 통일전선 건립에 중대한 기여를 했으며 대혁명 승리 추진에 탁월한 공헌을 했다. 1927년 북경에서 체포되여 투옥, 38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

상향옥: 덕과 예술의 향기 그윽한 예술가

상향옥의 좌우명은‘극은 하늘보다 넓다'이다. 그는 예술을 생명으로 대하였으며 시종 민족 희곡 예술에 대한 뜨거운 정감을 안고 일생을 중국 민족 희곡 사업에 바쳤다. 2003년 80세 고령인 그는 암으로 북경에서 투병중이였으나 올림픽중심 시공 현장에서 하남성 농민공들을 위한 공연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부축을 받으면서 무대에 올라 〈류하만〉의 한단락을 불렀다. 이는 그의 일생 마지막 무대였다.

용국단: 인생에 몇번의 박투가 있을가

용국단은 새 중국 창립 후 첫 사람으로 세계 우승을 따낸 선수이며 첫 세계 단체경기 우승을 한 일원이다. 그는 또 처음으로 녀자팀을 거느리고 세계 경기에서 단체 1등을 따냈다. 그가 웨친 “인생에 몇번의 박투가 있을가”라는 말은 지금도 중국의 체육건아들을 고무해주고 있다. 1937년생인 그는 일찍 향항에서 탁구 선수로 있다가 1957년 조국의 품속으로 돌아왔다.

도유유: 중약으로 인류의 질병을 고치다

도유유는 국가최고과학기술상,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이다. 2019년에는‘공화국훈장’을 수여받았다. 1930년생인 그는 북경의학원 약학부 졸업 후 청호소연구개발중심 주임으로 있으면서 줄곧 평범한 약초인 청호를 연구해나갔다. 2000년 세계보건기구는 도유유연구팀에서 개발한 청호소약물을 말라리아 치료 우선 약물로 지정, 세계적으로 말라리아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모이승: 중국 현대 교량의 아버지

모이승은 강소성 진강에서 태여났으며 1916년 20살 되던 해에 미국 류학, 1919년 23살에 공학박사를 취득하고 그 해 12월 조국으로 돌아왔다. 1933년 3월, 전당강대교 설계에 착수, 1937년에 공사가 완공, 이 대교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자체 설계한 철도 및 자동차 도로를 겸한 쌍층 교량이다. 1955년부터 1957년 사이 모이승은 무한장강대교 기술고문위원회 주임위원을 담임하고 우리 나라 첫 장강대교 건설 임무를 맡았는데 계획보다 2년 앞당겨 완공, 우리 나라 남북을 련결하는 교통 대동맥으로 되였다.

맥현득: 강철같은 의지의 인민영웅

맥현득은 1945년 광동성에서 출생, 1964년 3월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했다. 군관학교 졸업 후 해군 호위함 41대대 4중대 611호 호위함에 배치받았다. 1965년 8월 5일, 대만 국민당 해군이 복건성 동산도 부근에 침입, 치렬한 해상 격전에서 맥현득은 파편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혼수상태에서 깨여난 그는 극심한 아픔을 참아가며 다른 전사들과 함께 기계를 조종하고 고장 난 부위를 고쳐나가면서 호위함의 정상적인 운행을 보장해 마침내 국민당의 전함을 침몰시켰다. 1966년 2월 23일, 국방부는 맥현득에게‘전투영웅’칭호를 수여했다.

신기란: 녀성 모범 인민대표

신기란은 1929년에 산서성 평순현에서 태여났다. 1953년 전국로력모범에 당선돼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며 1954년 제1기 전국인대 대표로 당선, 그가 대회에 제출한 “남녀가 동일한 로동에 동일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제안은 새 중국 헌법에 들어갔다. 신기란은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13기까지 전국인대 대표를 련임한 기록을 세웠다. 1973년부터 10년 동안 산서성부련회 주임으로 있은 그는 퇴직 후 다시 고향에 돌아가 고향 건설에 일생을 바쳤다.

초유록: 현당위 서기의 훌륭한 본보기

초유록은 비록 42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사적은 몇세대 중국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초유록은 1922년 산동성 치박시 북고산촌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1946년 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62년 12월, 조직에서는 초유록을 란고현에 파견, 선후로 현당위 제2서기, 서기직을 맡았다. 간암으로 앓으면서도 그는 란고현의 가난한 면모를 개변하기 위해 필생의 정력을 바쳤다. 1966년 신문에  〈현당위 서기의 모범ㅡ초유록〉이 발표된 후 전국 각지에서는 그를 따라배우는 열조가 일어났다.

뢰봉: 사업에 적극적이고 열심히 남을 돕다

7살에 고아가 된 뢰봉은 20살이 되던 해인 1960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 그 해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나사못’정신으로 매사에 열정을 다했으며 평범한 일터에서 평범하지 않은 업적을 따냈다. 부대에 있은 2년 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여러 번 표창을 받았으며 무순시인대 대표로 당선되였다. 1962년 8월 15일, 운수 임무 집행중 불행히 순직, 당시 22세였다.

모안영: 험난을 아랑곳 않고 용감히 앞으로 전진하다

모안영은 호남성 장사에서 태여났으며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상해, 광주와 무한 등 곳을 전전하면서 생활했다. 1936년 쏘련에 가서 학습하고 후에 쏘련보위전쟁에도 참가했다. 1946년에 연안에 돌아온 그는 그 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50년 항미원조전쟁이 일어난 후 자진해 조선에 나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로어 번역과 비서를 담임했다. 1950년 11월 25일 오전, 작전실에서 긴장하게 사업중이던 모안영은 미군 공군의 폭격에 장렬히 희생되였다. 당시 28세.

황계광: 자신을 희생하며 영용히 싸우다

황계광은 1931년 중강현의 한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여났다. 1951년 3월, 황계광은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가, 전투임무를 출중히 완수하여 여러 번 표창을 받고 3등공 1차를 세웠다. 1952년 10월 상감령전역에서 황계광이 소속된 부대는 서측 597.9고지를 점령하라는 전투임무를 받았다. 통신원으로 있은 황계광은 자진하여 폭파 임무를 맡고 적진으로 달려갔으며 자신의 몸으로 적의 기관총 사격을 막아나섰다. 황계광이 희생된 후 조선 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했다.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의 새 시기

양업공: 마음에 사업을 두고 사명에 충성하다

1945년 2월 호북 응성 출생, 1963년 8월 입대. 생전에 원 제2포병 부참모장이였으며 2004년 7월 과로로 사망했다. 90년대초, 우리 군 사상 첫 신형 미사일부대를 건립하고 당년에 신형 미사일의 각 지휘 기능을 파악함과 아울러 부대를 거느리고 제2포병 사상 첫 신형 미사일 발사에 성공했다. 2005년 중앙군위는 양업공을‘사명 리행에 충성하는 모범 지휘원'으로 추서했다.

리향군: 홍수와 맞서 싸우다

1978년 해남 경산 출생, 1996년 12월 원 광주군구‘탑산수비영웅퇀’9련 전사로 입대했다. 1998년 8월 4일, 휴가중 부대로 돌아가 호북성 공안현의 홍수 방지에 뛰여들었다. 과로로 희생될 때 그의 나이는 20세 밖에 안되였다. 원 광주군구는 그가 있던 반과 련을‘리향군반', ‘리향군련’으로 명명했으며 1999년 중앙군위는 리향군에게‘새시대 영웅전사’영예칭호를 수여했다.

왕영: 적담충심 철골유정(赤胆忠心 鐵骨柔情)

1961년 사천 아바장족챵족자치주서 출생. 남강현규률검사위원회 서기로 있은 2003년 3월, 한 녀성이 파출소에서 자살, 직무태만으로 인한 치사라는 고발 편지를 받고 조사에 착수해 사건 관련 10여명 인원들이 법적제재 등 처분을 받게 했다. 2006년 7월, 페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홍수, 지진 구조, 사건 조사에 나섰다. 2008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임장하: 책임 지고 백성 위해 집법하다

1964년 하남 정주 출생. 1998년 정주시공안국 기술정찰지대 대장으로 있으면서 7개 폭력조직을 짓부셨다. 2001년 4월, 등봉시공안국당위 서기, 국장으로 있으면서 10여년간 루적된 고소 사건 3,000여건을 해명하고 범죄자 4,000여명을 나포했다. 2004년 4월 14일 저녁, 사건 조사 도중 차사고로 희생되였다. 개인 1, 2등공을 기입받았다.

허진초: 한다 하면 으뜸, 경쟁하면 1등

1950년 산동 영성 출생, 산동항구청도항전만컨테이너부두유한책임회사 공정기술부 탬퍼(固机) 고급 경리. 1984년 컨테이너 궤도주행식 크레인(橋吊) 운전사로 되였고 컨테이너 하역 세계 기록을 9차례 갱신했다. 랭장컨테이너에 기기를 설치해 전년 전기료 600만원을 절약하고 타이어크레인 기술개조로 2,000만원 이상의 자금을 절약했다.

공번삼: 고원에 뿌린 뜨거운 열정

1944년 산동 료성 오리돈촌에서 출생, 1979년 서장 지원 간부로 시가쩨지구 감바현당위 부서기를 담임했다. 1988년 두번째로 서장에 진출, 라싸시 부시장, 아리지위 서기로 있으면서 라싸시 학교들을 전부 돌아보고 아리의 발전 우세를 찾고저 106개 향중 98개 향을 찾았다. 1994년 11월 29일, 신강 쵸췌크시 고찰 후 돌아오는 길에 차사고로 순직했다.

허해봉: 령의 돌파, 나라 위해 영예 따내다

1957년 복건 장주시 출생, 1983년 국가팀 올림픽 합동 훈련에 참가. 1984년 7월 29일, 로스안젤레스올림픽에서 권총 종목 우승을 따내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사마란치가 직접 허해봉에게 금메달을 걸어주었다. 1995년 중국사격팀 녀자 권총 종목 코치로 사업, 아틀란타올림픽에서 리대홍이, 시드니올림픽에서는 도로나가 각기 금메달을 땄다.

사고화: 시장 활성화 위해 과감히 담당

1931년 절강 구주 출생, 1982년 5월—1984년 12월 의오현당위 서기직 담임, “의오 소상품 시장을 개방하며 문제가 생기면 내가 책임진다”고 말했다. 1982년 9월, 의오현정부는 세멘트판으로 두줄의 간이 매대를 만들고 정당하게 장사하도록 했다. 이는 의오의 제1대 길모퉁이 시장이였다. 의오 소상품 시장은 세계에서 가장 큰 소상품 집산중심으로서 년 판매액이 5,000억원을 넘어서고 있다.

원경: 대담하게 혁신하는 개혁 선봉

1917년 4월 광동 보안 출생, 1938년 혁명에 참가, 1949년 후 쟈까르따 주재 중국 령사로 있었다. 1978년 61세 나는 원경은 투자유치국집단 상무부리사장으로 임명되였다. 1979년 심수 사구에 중국 최초 외향형 공업단지—사구공업단지를 건설, 전국적으로 솔선해 기업 관리, 분배 체제, 간부 인사 제도, 금융 개혁 등 일련의 개혁 실험을 추진, 24가지  ‘전국 제1’을 기록했다.

호복명: 실천은 참된 지식을 낳는다

1935년 7월, 강소 무석 출생, 남경대학 정치학부 교수, 강소성당위서 사업. 1978년 5월 10일, 호복명의 글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다〉가 중앙당학교 내부간행물 《리론동태》에 발표, 5월 11일에 《광명일보》는 특약론평원 명의로 이를 공개 발표했으며 신화사는 당일 전문을 전재했다. 1978년 12월, 당중앙 11기 3차 전원회의에서는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 문제에 대한 전국적 대토론을 높이 평가했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 새시대

종남산: 의사로서 정성 다해 생명 보호

종남산은 국가과학기술진보상 1등상을 획득, 2020년‘공화국훈장’을 수여받았다. 중국공정원 원사인 그는 2003년 사스 역정 전승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2020년 종남산은 코로나19가 ‘사람간 전염’ 현상이 존재한다고 제기하고 엄하게 방역할 것을 제출했다. 또 코로나19 치료 방안 편찬을 지도해 역정 방역, 중증 구조치료, 과학연구 난관돌파 등을 추진했다.

두부국: 지뢰, 폭파물 제거에 앞장 서다

두부국은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지뢰 제거 영웅전사’영예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등공을 1차 세웠다. 두부국은 지뢰 제거 임무를 집행한 3년 사이 루계로 300여일 작업하고 지뢰 제거 폭파통을 15톤 남짓이 운반하였으며 각종 폭파물 2,400여매를 제거하고 위험 상황을 20여차 처리하였다. 2018년 10월 11일, 두부국은 지뢰 제거 행동중 혼자 나서서 상황을 알아보다가 두손과 두눈을 잃었다. 부상 후 그는 여전히 부대의 작식 시간을 지키며 군인의 표준으로 자기를 요구하였다.  

황문수: 빈곤부축에 청춘을 바치다

황문수는 2021년 ‘전국 빈곤해탈 난관공략 모범’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북경사범대학 석사연구생 졸업 후 2018년 3월 주동적으로 광서짱족자치구 백색시 락업현 백니촌 제1서기를 맡았다. 노력을 거쳐 전 촌 사탕귤(砂糖橘) 재배면적을 1,000여무에서 2,000여무로 발전시키고 팔각(八角)을 600여무에서 1,800여무로 발전시켰다. 2019년 6월 17일 새벽, 그는 사업터로 돌아가는 길에 산사태를 만나 불행하게 희생되였다. 그 때 나이 30세.

황대년: 마음속에 조국을 간직하고 지성껏 나라에 보답하다

황대년은 우리 나라  ‘심층 탐사 관건 의기 장비 연구 제작과 실험’의 수석 과학자로서 길림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의 우수한 과학연구일군 수백명을 조직하여 심층 탐사 관건 장비 난관돌파 연구를 개시하였다. 황대년이 알심 들여 난관을 돌파한  ‘항공 중력 사다리계(梯度儀)’는 마치  ‘투시안(透視眼)’처럼 지구를 CT하고 지하의 구석구석을 환히 들여다볼 수 있다. 2017년 1월 8일,황대년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 58세였다.

장부청: 공명을 가슴깊이 묻어두고 초심으로 살다

1948년에 참군한 장부청은 서북 야전군으로부터‘특등공’을 기입받았으며‘전투영웅’영예칭호를 2차 받았다. 1955년 퇴역하여 제대할 때 장부청은 조직의 배치에 복종해 호북에서도 제일 편벽한 래봉현에 가 일하였다. 제대한 그 날부터 장부청은 모든 공훈 기억들을‘묻어두고’자녀들에게도 한마디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다 2018년말 나라에서 퇴역군인 정보를 등록할 때에야 장부청이 반세기 남짓한 동안 숨겼던 공훈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번금시:돈황을 벗으로 삼고 의지 굽히지 않아

번금시는 2019년에‘문화재 보호 걸출 공헌자’국가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1963년 북경대학 력사학부 고고전업을 졸업할 때 번금시는 기어이 돈황을 선택했다. 번금시의 발기와 직접적인 참여하에  〈돈황 막고굴 보호 조례〉가 2003년 반포, 실시되였으며 돈황연구원은 국내외 3개 기구와 련합하여〈돈황 막고굴 보호 총체적 계획〉을 편찬하였다. 번금시는 기록성 고고보고 《돈황석굴전집》 제1권 《막고굴 제266—275굴 고고 보고》 편찬을 주관했다.

리보국: 산간지구에 뿌리 박고 과학적으로 빈곤부축 돕다

리보국은 생전에 하북농업대학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였다. 그는 완정한 산간지구 생태 개발 모식을 창설하고 경제 사회와 생태 효과를 함께 제고시키는 빈곤부축의 새로운 길을 탐구하여 태항산의  ‘살아있는 우공’으로 불리웠다. 리보국은 토지를 폭파하는 방법으로 흙을 모으고 물줄기를 축적하여 수목의 생존률을 원래의 10%에서 90%로 올렸으며 전남곡의 식물 피복률을 94.6%에 달하게 했다. 2016년 4월 10일, 리보국은 심장병이 돌발해 세상을 떠났다.

료준파: 열심히 일해 지역 부흥 도모하다

료준파는 생전에 복건 남평시당위 상무위원, 부시장, 정화현당위 서기직을 맡았다. 료준파는 항상 기층에 내려가지 않으면 기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있었다. 2017년 3월 18일,료준파는 무이신구에 회의를 주재하러 가는 길에 불행하게 교통 사고를 당해 순직했다. 2011년 6월, 료준파는 정화현에서 일할 때 몇년간의 노력을 거쳐 전 현 재정 수입을 2배 더 올렸으며 련속 3년 전성 현역 경제 발전‘앞 10위’안에 들게 하는 등 빈곤현으로 하여금 천지개벽의 변화를 이루게 하였다.

줘가와 양중 자매:고향은 옥맥이고 나라는 중국

줘가와 양중 자매는 모두 공산당원이며 서장자치구 륜제현 옥맥향의 목민이다. 지난 세기 60년대부터 두 자매는 아버지 쌍제취바의 인솔 아래‘고향은 옥맥이고 나라는 중국’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안고 몇십년을 하루와 같이 방목하며 변강을 지켰다. 옥맥향은 면적이 3,000여평방키로메터, 평균 해발이 3,600여메터이다. 오늘날 줘가와 양중 자매의 인솔 아래 점점 더 많은 간부와 군중들이 변강을 지키는 대오에 가담, 신성한 국토를 지키는 수호자, 행복한 집터를 가꾸는 건설자로 나서고 있다. 줘가와 양중 자매는‘가장 아름다운 분투자',‘시대의 본보기’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왕계재, 왕사화 부부: 섬을 지키고 나라를 보위함에 후회없다

1986년 7월, 왕계재는 조직의 파견을 받고 황해 전초의 개산도에 가 근무하였다. 같은 해 안해 왕사화도 교원직을 그만두고 남편을 동반하여 섬을 지켰다. 30여년래 왕계재 부부는 섬을 집으로 삼고 간고하게 생활하면서도 매일 국기를 게양하고 순라를 견지했으며 군사 시설과 민용 시설을 관리하고 어선과 어민을 구조하며 해상과 공중 상황을 관찰하였다. 2018년 7월 27일, 왕계재는 근무중 질병이 돌발해 구급에 효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 나이가 58세 밖에 안되였다. 2019년 왕계재는‘인민의 본보기’국가 영예칭호를 수여받았다.

/공산당원넷 /편역: 심영옥 김정함 리철수 홍옥 박명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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