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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기념비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리현덕 ] 발표시간: [ 2018-12-11 16:18:12 ] 클릭: [ ]

- 중국조선족의 첫 중공당원 한락연동지의 탄신 120돐을 기념하여

올해 12월 8일은 한락연동지 탄신 120돐 기념일이다. 당과 국가의 지도자,각지 당사 연구부문과 각계 지명인사들이 한락연동지의 정채롭고 전기적인 일생과 그의 휘황한 혁명업적에 대해 극히 높이 평가했다. 한락연은‘위대한 혁명선구자',‘충성스러운 공산주의전사',‘동북지구 공산당조직 창시인의 한 사람',‘걸출한 예술선두자 ',‘국제반파쑈전사 ',‘동서방문화결합의 선행자',‘키질(중국 가장 오랜 불교 석굴사원)력사문물을 보호한 일인자',‘중국문화미술계의 첫 공산당원',‘조선족천재화가',‘은페전선의 불요불굴의 투사',‘훌륭한 통일전선 전범',‘민족단결모범',‘영생불멸의 혁명렬사',‘주은래가 중용하고 념려한 사람'으로 불리웠다.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에 길림성 연길시 룡정촌 토성보의 한 가난한 조선족 가정에서 태여나 청소년시기부터 애국계몽교육, 제국주의, 봉건주의, 일본군국주의를 반대하는 애국주의 교육을 접수했다. 1919년 3월, 룡정에서‘3.13'반일대시위가 폭발했을 때 그는 밤도와 시위에 참가하는 군중들을 위하여 대량의 기발을 만들어 주었으며 적극 시위활동에 참가했다. 그해 20살 난 그는 나라를 구하고 나라를 흥성시키는 진리를 찾아 천리길도 멀다하지 않고 10월혁명의 고향인 쏘련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조선조기 공산주의자인 리동휘를 만나고 나중에 그와 같이 상해로 돌아와 고려공산당을 조직 창건하는 일에 참여함과 동시에 독립구국의 진보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리동휘 등을 도와 《공산당선언》,《아까하다(붉은기)》,《신청년》등 진보적인 간행물을 번역해주었다.

한락연 초상

1922년 상해미술전업학교에서 학습하는 기간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조기 지도자 중의 한사람인 채화삼과 친분을 쌓게 되였고 1923년에 채화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는 중국 조선족으로서 공산당에 가입한 첫 중공당원이다. 그때로부터 그는 공산주의를 위해 종신토록 분투하는 길을 향해 견정하게 용왕매진했다.

1924년1월 그는 중공중앙의 파견을 받고 동북지구에 가서 당조직을 발전시키고 혁명활동을 전개했다. 봉천(심양)에서 그는 천주교를 신앙하는 청년회 골간인 염보항(阎宝航,후기 중국공산당 은페전선의 저명한 전략 정보 전문가로 되였고 주은래의 유력한 조수로 됨)을 만나 그의 도움과 엄호하에 청년회를 거점으로 대량의 혁명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다 1925년 2월-5월,중앙의 지시에 따라 쏘련에 가서 강습훈련을 받았다. 거기서 그는 여러가지 사진기를 사용하는 방법으로 정보를 취득하는 뛰여난 기술을 장악했다. 그후 그는 할빈, 가목사, 목단강, 수분하 등 지역에서 사진관을 엄페지로 정보소를 건립했다. 이런 정보소들은 주은래, 등영초, 라장룡 등 우리당의 대표들이 안전하게 모스크바를 오가며 중공제6차대표대회에 참가할 수 있도록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귀국 후 1925년, 그는 임필시가 파견해온 오려실, 임국정과 함께 봉천의 첫 당지부를 설립했다. 그때로부터 한락연은 염보항과 생사지교로, 친밀한 전우로 되였는데 염보항은 한락연을 자신의 ‘량사익우'라했다.

1925년 7월,한락연은 중공북방국의 파견을 받고 할빈에 가 학교미술교원을 양성한다는 공개적인 신분을 눈가림으로 혁명활동에 종사했다. 1925년말에 중공할빈특별지부위원회가 설립되고 한락연, 오려실, 초도남 등 5명이 지부 지도부성원을 맡았다. 1926년 4월에 중공할빈특별지부위원회는 중국공산당북만지방위원회로 이름을 고치고 오려실이 서기로, 한락연, 조상지 등이 지도부 성원을 담임하였다.

1927년 10월,한락연은 오려실과 함께 진위인을 협조하여 중공만주림시성위원회(중공만주성위원회의 전신임)를 건립했다.

1928년, 그는 치치할에 가 룡사공원의 감리의 신분으로 혁명사업에 종사했으며 공원에 격언정(格言亭)을 설계했다.‘래일사진관’등 사진관도 오픈했다. 1929년 가을, 중공중앙의 비준으로 한락연은 국제통일전선을 전개하러 프랑스로 류학갔다. 1931년에 그는 프랑스 루블대학에 입학해 미술을 전공했다. 프랑스 류학기간 한락연은 프랑스공산당이 령도하는 반파쑈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1934년에 〈중국 동북 4성 프랑스류학동학선언>을 발표,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침략정책을 폭로했다. 1936년에 한락연은‘전체 구라파화교항일련합회'사업에 참가했다. 1937년‘77사변’이후 그는 《빠리석간》의 기자 신분으로 여러차례 양호성장군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러다가 1937년 10월, 한락연은 중공구라파당조직의 지시를 받고 프랑스, 독일에 류학간 10명 학생들과 함께 귀국해 항일하려는 양호성장군을 호송했다.

1937년 겨울 ,한락연은 프랑스로부터 무한에로 돌아와 주은래의 결정에 따라‘동북구국총회' 령도직위에 오른 후 당조성원으로서 선전, 련락 등 항일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다. 그해 11월에 그는 곽말약이 인솔한 작가 예술가방문단을 따라 연안에 가서 모주석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으며 중국녀자대학에 가서 연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9년 봄,리제심을 통해 국민정부전지(战地)당정위원회 소장(少将)지도원으로 된 후 국민당이 이끄는 국군과 공산당이 령도하는 팔로군 주둔지 및 위립황(당시 국군의 2급 상장) ,범한걸 등 국민당군대의 방어구역과  팽덕회, 좌권이 령도하는 팔로군 전선본부 및 려정조의 부대 지간을 실북나들듯 오가면서 정황을 료해했고 보고를 작성해 올렸으며 또한 비밀리에 국민당고급장령을 상대로 항일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기도 했다.

1939년 10월, 중경에서 항일구국사업에 종사하는 류옥하(刘玉霞)와 결혼했다.

1940년,보계에서 대립(戴笠)이 국민당특무를 조종해 암암리에 한락연을 체포했다. 옥중에서 한락연은 용감하게 적들과 투쟁하였고 1943년초에 당조직과 리제심 등 인물들의 적극적인 구조로 출옥했다.

한락연은 출옥 후 당조직의 지시대로 서북지구에서 그림을 그리며 사생(写生)하는 걸로 엄페해 국민당서북구 상층 요원들의 통일전선사업을 진행했으며 동시에 실제와 생활에 심입하고 로동인민들 속에 심입하여 열정적으로 서북 각 민족인민들의 로동생활을 구가했다. 그가 창조한 회화예술은 당시 서북 각 민족인민들의 로동, 생활의 진실한 화폭으로서 그는 그속에서 참신한 회화주제를 개발하기도 했다. 그는 거기서 키질벽화를 연구한 ‘첫 중국화가'로 불리웠으며 선후로 20여차되는 개인화전을 펼치여‘중국의 피카소'로 불리웠다. 그의 예술조예와 성취는 또한 그가 국민당 서북 고층인사와 소수민족 상층 인사들에 접근하여 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는데 편리를 제공하여 서북의 대해방을 위한 준비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추진했다.

1947년 7월 30일, 한락연이 탄 국민당 257호 군용비행기가 디화(신강 우룸치의 옛칭호)를 떠나 란주로 향발해 가던 도중 실종되였다. 국민당 당국에서는 비행기사고라 할뿐 사후 그 어떤 조사도 없었으며 관련 보도도 하지 않았다. 한락연은 당시 49세 밖에 안되였다. 한락연은 신강 고고학에 대해 연구할 5년계획을 세웠었고 서북박물관을 건설하여 실크로드의 예술작품을 소장하자던 꿈을 실현하지 못한채 인간세상을 떠났다. 새중국의 탄생을 위해 한생을 분투해온 그는 오매불방 그리던 대서북의 해방을 보지 못했고 새중국의 탄생을 보지 못했다.

전국이 해방된후 당과 인민정부에서는 한락연을 혁명렬사로 추인하고 그의 135폭의 유작을 중국미술관에 소장했다. 1962년 주은래 총리는 특별히 염보항에게 “방법을 강구해 한락연의 자료를 정리, 수집해 한락연전기를 써내야 한다.”고 분부했다.

 
 
 
 
반세기 넘어 각급 지도자와 각급 당사연구부문, 각계 전문가 학자들의 간고한 노력으로 오늘날 주은래 총리의 지시정신은 이미 실현화되였다. 한락연 탄신 119돐, 그리고 그이가 조난된지 70주년 되는 지난해에 제9기 전국정협 부주석이며 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중국인민해방군 상장인 조남기가 책명을 쓴, 424페지에 그림,사진과 글을 담아 양장본으로 묶은 충혼여채-《한락연을 추억하며》가 출판되였다. 이어서 한락연구회, 한락연기념관이 설립되였고 한락연과 관련된 드라마, 영화제작 사항도 의사일정에 올랐다. 특히 중국미술관에서는 2011년 중국공산당 창건 90돐기념일에 즈음하여 한락연화전을 거행했으며 중국미술관에서는 올해 5월 23일부터 9월 2일까지 전례를 타파하고 100일간 《한락연화전》을 펼치는 것으로 한락연 탄신 120돐을 기념했다.

오늘 우리가 한락연동지를 기념하고 추억하는 것은 한락연동지의 혁명정신과 우수한 품격, 고상한 지조를 더한층 학습, 계승, 고양하고 긍정적 에너지를 격발하여 민족부흥의 시대의 주선률을 격조 높이 전해가기 위해서이다.

한락연동지는 우리 마음속의 영원한 기념비이다!

한락연동지는 영생하리!

글 중국기자협회서기처 전임 서기 리현덕

편역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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