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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박차순할머니의 명복을 빌며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1-19 15:54:48 ] 클릭: [ ]

소형록음기를 들으며 “아리랑”, “도라지”를 따라 부르던 고 박차순할머니.

1월 18일, 호북성 효감시 룡점구 룡점촌에 살고있던 박차순할머니(95세, 중국이름 모은매)가 세상떴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중국대륙의 마지막 조선족“위안부”할머니가 삶을 마감한것이다.

지난해 5월말, 박차순할머니를 찾아뵈였을 때 할머니께서는 “위안부”시절의 피맺힌 치욕의 력사를 가슴에 깊이 묻은채 종내 입밖에 번지려 하지 않았다. “일본놈들 사람도 아니였어! 울면 어떻게 다 울고 말하면 어떻게 다 말할수 있겠어!” 할머니는 주먹을 들어 "텅-텅-" 소리나게 가슴을 치시며 북받치는 분노를 눅잦혔다.

20세기 30년대초로부터 1945년 8월까지 일제의 침략전쟁에서 조선반도와 중국, 일본, 필리핀 등 아세아 여러 나라와 지역의 40만명에 달하는 녀성들이 전략물자의 하나로 강제 혹은 기편수단에 의해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 "성노예" "성폭행피해자"로 잔혹하게 유린당하였다.

한국전라남도 나주에 살던 박차순은 스물세살나는 해 1945년 6월, “양말공장에 취직”을 시켜준다는 일제놈들의 속임수에 걸려 중국 무한의 적경리(积庆里) 일본군“위안소”에 갇히게 되였다. 담을 높이 쌓고 기관총을 걸어놓고 하루종일 감시를 하는 “위안소”안에서 나어린 처녀들은 일제놈들의 성폭행에 여지없이 짓밟혀 죽어나갔다. 

임신을 하거나 성병에 걸려도 가차없이 처단된다. 일제놈들은 성병을 막기 위해 “위안부”들에게 “606”이라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놓군 하였다. 성병치료제인 살바르산이라는 이 주사는 수은치료와 함께 “위안부”들이 후날 아이를 가질수 없는 중요한 원인으로 된다.

무한에 살고있는 “위안부”동료의 방문을 기념하여

3개월이 지난 어느날 하늘에서 비행기가 날며 폭격이 쏟아지자 위안소안이 혼란한 틈을 타 그는 요행 “위안소”를 빠져나온다. 죽기살기로 뛰여 몇십리밖의 대황만이라는 시골에 이른 그는 거기서 선량한 마음씨를 가진 한족농민 황씨를 만나 가정을 이루었다. 남편은 그녀를 몹시 아끼고 사랑해주었지만 "위안부"로 참혹하게 유린당했던 할머니는 아이를 가질수 없었다.

새중국이 창건된후 50년대초 호적등록을 하였는데 누구도 "박차순"이라는 이름을 한자로 쓸수 없게 되였다. 촌사무실벽에 모주석의 초상이 걸려있는 것을 본 박차순할머니는 모주석의 덕분에 해방을 받았기에 자기 성을 "모'씨로 고치기로 하고 조선사람들이 좋아하는 은백색의 "은"자에 남편이 좋아하는 매화 "매"자를 넣어 이름을 "모은매"라고 고쳤다. 그맘때쯤 그는 두살짜리 녀자애를 양녀로 들이고 세식구는 서로 의지하며 아기자기 살아왔다. 마을사람들도 그녀를 많이 동정하고 보살펴주었다.

그 세월이 어느덧 60여년이 흘렀고 박차순할머니는 그동안 조선말을 까맣게 잊고있었다. 보통한어도 잘 번지지 못하는채 심한 호북 지방방언만 구사하고있었다. 그러나 조선말을 하는 우리들과 마주하고 옛날을 추억하는 박차순할머니는 되도록 한마디라도 조선말을 번져보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드디여 “전라남도 나주”라는 고향이름을 떠올렸고 “박가” “차순이”, “엄마” “아버지”를 외울수 있었다. 그러더니 이어 한서린“아리랑”을 한숨처럼 부르기도 하였다. . 어쩌면 노래소리가 울음소리보다 더 구슬프게 들렸다.

“위안부”할머니들을 위해 꾸준히 자원봉사를 해온 훈춘의 엄관빈선생을 만나 담소를 나누고있다.

우리와 마주하고있는 박차순할머니의 그 눈빛과 일거일동은 그토록 부드럽고 상냥하였다. 거처하는 집안이며 이부자리, 입고있는 옷가지며가 그토록 깨끗하였다. 박할머니의 일상생활이 워낙 깨끗하고 알뜰하며 작식도 잘해 린근에 소문이 있었다고 딸은 소개하였다.

딸내외는 키워준 은혜를 감사하게 여기며 박차순할머니를 그토록 존경하고있었다. “전쟁의 피해자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어머니에게 우리가 해드려야 할 일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라고 하며 그들은 어머니의 신상을 소홀함이 없이 보살피고있었다. 하여 박차순할머니의 얼굴에는 항시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사회적으로도 국내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에서도 지원자들이 찾아와 집안일도 도와주고 말동무도 해주고있었으며 지원금도 지원물자도 끊임없이 보내오고있어 할머니는 마음속으로 안위를 느끼고있었다.

할머니는 누군가 선물한 꾸레미속에서 화장품을 꺼내 얼굴에 찍어바르며 말씀하였다. “이제 이 세상에 살아있을 날이 얼마나 될는지...” 

그러던 할머니께서는 끝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 “위안부”의 한을 풀지 못한채 저세상으로 가고말았다. 

력사의 산증인으로 일제놈들에 대한 저주를 가슴에 품은채 "치욕"을 씹어삼키며 살아오신 박차순할머니, 지금도 전쟁범죄를 승인하려 하지 않고 “위안부”제도의 죄악을 덮어감추거나 왜곡하면서 도처에서 침략야심을 드러내고있는 일본정부와 그 우익세력의 만행에 치를 떨고있었으며 인류사회에 영원한 평화와 안녕이 깃들고 인류의 존엄과 인권이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바라며 저세상으로 가신것이다. 

박차순할머니, 전쟁과 폭행이 없는 저세상에서 부디 짓밟힌 청춘을 되찾으시고 행복할수 있기를 두손 모아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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