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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원경지의 국경절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2-13 10:45:53 ] 클릭: [ ]

내 나이 올해 예순여덟이니 국경절을 예순여덟번 지냈다. 인상 깊게 보낸 국경절들이 많지만 제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원경지 오두막에서 맞이했던 1973년의 국경절이다.

그 날 신새벽, 감자 캐러 간 우리 생산대의 7, 8명 청년들은 오두막 밖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와지끈―

뚝!

쿵!

골짜기 건너편이면 림장이였기에 우리는 림업로동자들이 날 밝기전부터 나무를 베는 줄로 알았다.

그런데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가자니 문이 열리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힘을 모아 간신히 문을 여니 이게 웬 일이람? 밤새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문 아래부분이 두자가량이나 눈에 묻혀있었다.

림업로동자들이 나무를 벤 것이 아니라 눈에 나무가 넘어진 것이였다. 눈이 나무에 쌓이고 녹고 매달리면서 나무가 그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가지가 부러지고 중등이 꺾어지고 뿌리가 뽑히면서 쓰러진 것이였다. 여기저기에 송두리채 넘어진 아름드리나무들이 눈에 가지를 처박고 어지러이 널려있었다. 쩍― 짜개지면서 중등이 부러진 나무들, 부러져내린 나무가지는 여기저기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가벼운 눈송이의 힘이 이처럼 엄청나다니?!

무서운 파괴자인 홍수에 집재료와 수박이 떠내려오고 산돼지새끼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장쾌한 기분을 느끼던 때처럼 나는 자연의 놀라운 힘에 경탄을 련발했다. 감자를 채 캐지 못했는데 깊은 눈에 밭이 묻혔으니 실은 불이 발등에 떨어진 것이였다. 헌데 그것보다 못지 않게 우리들 눈살을 찌프리게 하는 일은 술도 안주도 장만하지 못했는데 국경절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 하는 걱정이였다.

그 때는 술이 금보다 귀했다. 명절 같은 때라야 집집마다 ‘쥐꼬리배급’으로 술표를 가졌는데 술이 귀하다 보니 남정네가 없고 술 마실 사람이 없는 집에서도 제 앞에 차려진 몫을 내놓지 않고 타갔다. 육류도 명절 같은 때 ‘공소부’에 오는 언 고기를 몇근씩 사서 맛이나 잃어지지 않을 정도로 입에 바르는 게 고작이였다(돼지는 키워서 ‘수구참’에 바쳐야 했다).

생산대에 돌아가야 보잘것없는 몫의 술과 고기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큰 눈에 골짜기의 길이 싹 묻혀버렸는데 어떻게 간단 말인가? 모두가 어깨가 축 처져있을 때 여름내 원경지를 지켜온 조기선령감이 피우던 담배를 훌―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마을에 갔다오겠네.”

“길이 종적이 없이 됐는데 어떻게 가요?”

김대장의 걱정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기도 했다.

“자주 다니던 길이라 괜찮을 거네.”

조령감은 아침을 대충 먹고 정갱이를 넘는 숫눈을 헤치면서 골어구로 내려가는 길에 들어섰다. 십리가량 내려가면 현성에서 향(그 때는 ‘공사’라고 했다.)소재지로 오가는 뻐스길이 있다. 골어구에서 뻐스를 잡으면 마을까지는 70리 쯤 된다. 뻐스가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씩 다니니 오전 뻐스를 타야 오후 뻐스로 돌아올 수 있기에 일찍 떠나야 했다.

순탄하게 다녀와도 오후에야 돌아올 수 있었지만 우리는 오전부터 밖에 나와 이야기하면서 조령감의 모습이 나타나기만 바랐다. 보리저녁때가 되여도 조령감이 돌아오지 않자 우리는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혹시 눈에 빠져 골어구까지 가지 못한 것이 아닐가?’

김대장은 늙은이를 홀로 보낸 것을 후회했다. 저녁해가 나무우듬지 사이로 가라앉아도, 땅거미가 어둑어둑 오두막 앞으로 기여들어도 조령감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술과 고기를 사오기를 바라던 마음 대신 그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진심으로 바랐다. 우리의 근심은 저녁어둠과 더불어 점점 짙어갔다. 원경지에서 골어구까지는 아름드리나무가 꽉 박아서고 곰도 출몰하는 곳이다. 곰이라도 만났으면 어쩌나 하는 나쁜 생각이 갈마들었다. 우리는 누구도 집안에 들어가지 않고 진대나무통에 줄느런히 걸터앉아 골어구만 목이 빠지게 바라봤다.

“산마루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모두 산마루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아닌게 아니라 산꼭대기에서 가느다란 사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여긴 치벽한 곳인데 누가 이 눈에 산꼭대기로 올라갔담? 밤중이 될 때까지 왜 산에 있을가? 혹시 조령감이 길을 잃고 산꼭대기로 올라간 건 아닐가?’

귀를 강구고 귀담아듣던 김대장이 무릎을 탁 쳤다.

“산꼭대기에서 나는 소리 아니라 산아래 쪽에서 나는 소리다.”

다시 자세히 들으니 산아래 쪽에서 난 소리가 산마루에 부딪쳐서 되울려오는 메아리였다. 모든 것이 똑똑해졌다. 조령감이 산 아래에서 올라오지 못해 소리치고 있었다.

눈빛이 깔렸지만 별 하나 없는 흐린 밤이라 우리는 저마다 오두막 바깥벽에 걸어두었던 ‘봋’에다 불을 붙여들고 산 아래로 달려내려갔다. 체소한 조령감은 골짜기 중간 쯤에서 눈에 빠져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눈 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어깨에 멘 불룩한 가방만은 꽉 부둥켜안고 있었다…

허벅다리까지 잠기는 눈을 헤치면서 간신히 골어구까지 내려간 조령감은 골어구에서 한나절이나 뻐스를 기다리다가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큰 눈에 뻐스가 통하지 못하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70리나 떨어진 생산대까지 걸어갈 수도 없는 일이였다. 생각 끝에 제일 가까이에 있는 차창대대 ‘공소부’에 찾아가서 딱한 사정을 말하면서 술 몇근 팔 수 없는가 청을 들었으나 씨도 먹히지 않았다. ‘공소부’에서 돌아나오다가 때마침 전날 ‘하방’을 내려왔던 공사의 당위서기를 만나자 당위서기의 팔을 꼭 붙잡고 다시 ‘공소부’를 찾아갔다. 당위서기가 말해주어서야 술 몇근에 돼지고기 몇근을 얻게 되였다. 조령감은 기쁜 김에 선자리에서 강술 몇모금 했는데 눈길을 헤치면서 골안으로 들어오다가 술기운이 퍼져 더는 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얼굴이 긁히고 기진맥진한 조령감에게 죄송한 마음보다도 술과 고기를 얻었다는 기쁨에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마치 축구경기중 우리 편이 부상을 당하면서 페널티킥을 얻었을 때 다친 사람에 대한 념려보다 꼴을 넣을 기회를 얻었다고 기뻐하는 심정과 같다고 할가?

한나절 꼬박 굶었던 우리는 배속에서 꼬르륵 타령을 부른 지 이슥하기에 다그쳐 고기를 씻어 솥에 앉히고 불을 지폈다. 고기를 삶는 냄새가 집안에 풍기자 모두의 얼굴은 아이들처럼 밝아졌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일생에서 제일 잊혀지지 않는 술을 마셨고 그 어떤 산해진미와도 비길 수 없는 감자돼지고기볶음을 감식했다.

그 뒤 며칠 동안 고랑도 알리지 않는 눈밭에서 벌건 손으로 눈무지를 헤쳤고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밭에서 한알의 감자라도 더 찾느라 흙투성이가 되여 앉아 뭉갰지만 그 때의 일은 고생스러웠던 것보다 늘 가슴속에 애틋한 그리움으로 일렁거린다. 그 해 따라 첫눈이 전에 없이 일찍 많이 내렸고 처음으로 산에서 눈에 갇혀 국경절을 맞이했기 때문일가?! 아니면 술도 안주도 없어 국경절을 쫄쫄 굶으면서 지낼 번하다가 기분 좋게 보낸 것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짙은 감격으로 남아서일가?!

강산이 네번 변하고 다시 절반 변했지만 매년 첫눈이 내릴 때마다, 국경절이 돌아올 때마다 그 때의 일은 늘 달콤한 감회 속에 추억의 등불을 밝혀주군 한다.

세월이 가도 그 날이 잊혀지지 않고 그토록 그리운 것은 펄떡펄떡 뛰던 내 인생의 아침나절을 담고 있는 고향에 대한 절절한 향수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향의 후더운 인심이 그리워서이며 그 때의 사람냄새가 사무치게 그리워서이다.

아, 잊지 못할 1973년의 국경절이여! 그 해의 첫눈이여! 경흥골 원경지의 오두막집이여!

 

                                                                               /허두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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