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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춘절수기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2-13 10:28:21 ] 클릭: [ ]

해마다 춘절(春节—음력설) 림박이면 어쩐지 기쁨과 흥분을 억누를 수 없다. 스스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답시고 아침 기상부터 저녁 취침까지 판박이 시간관리를 하는 나는 웬만한 명절 때도 별로 흐트러짐 없이 소정의 일과 대로 하는데 이 때만은 손에 ‘일’이 잘 잡히지 않는다. ‘세모의 설레임’이라고 할가? 그래도 원단(元旦—양력설)에는 습관적인 일정에 따라 책도 읽고 필도 긁적거리면서 자기 성찰로 지나간 한해를 뒤돌아보며 새해에 할 일들을 체크하는 차분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음력설 때만은 웬 일인지 오래전부터 몸에 배인 룰이 엉망이 된다. 그 설레임, 그 어떤 기다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기다림이란 물론 먹을거리가 빈핍했던 시절 식료품배급통장에 의해 겨우 차례진 초라한 설밥상 같은 물질적인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정신적 차원에서의 기다림이라고 할가?

그런 기다림은 벌써부터 방송과 텔레비죤에서 분주하게 쏟아져나오는 ‘춘절려객수송(春运)’ 보도와 함께 점점 부풀어오른다. 어느 철도편, 항공편의 표가 매진된 지 오래다느니, 그래서 림시 철도편, 항공편을 얼마 늘인다느니, 또 그래서 남방의 어떤 농민공(农民工)들은 아예 모터찌클을 타고 장거리 귀향한다느니… 전국이 기다림의 이동으로 시끌벅적하다. 이런 귀향의 대렬 속에는 집을 떨쳐나갔던 불효자와 세상만리 떠돌아다니던 나그네, 그리고 호구지책(糊口之责)을 떠멘 기러기아빠들도 있을 것이다. 뉴스를 보고 들으면서 지나간 시절 나에게도 있었던 귀향길이 떠오르며 감회가 참으로 새롭다. 어디 그 뿐이랴. 방송, 텔레비죤에서는 또 ‘춘절특별프로’라고 고금인물들의 향수를 달래는 미담과 친인을 그리는 일화로 그야말로 선정적이다. 이런 판에 골방에 들어박혀 그런 기다림을 가셔버리고 좌선입정(坐禅入定)한다는 것은 나같은 범속한 인간으로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미구하여 나에게도 그런 기다림의 혜택이 차례진다. 섣달 그믐날 저녁, 태평양 건너 멀리서 돌아온 딸애와 사위,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단란히 모여앉았다. 지나간 한해를 음미하고 새로운 한해를 약속하는 덕담으로 축복의 잔을 돌리면서 천륜지락(天伦之乐)을 즐기노라니 사는 보람이 가슴 뿌듯이 느껴진다.

이런 와중에 찌르릉 찌르릉 전화벨과 삐-삐- 문자메시지 신호가 련달아 울린다. “춘절을 축하합니다!”…산지사방에서 들어오는 축복의 인사에 눈시울이 젖어난다. 고향에 계신 친척들, 소시적 개구쟁이친구들, 동창들, 전우들, 동료들, 그리고 사업관계로 맺어진 지인들, 서로의 절절한 기원은 우리들 서로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춘절이브파티’를 마친 후 온 집 식구가 텔레비죤의 ‘춘절야회’ 프로를 마주하고 담소하며 단원(团圆)의 회포를 나누노라니 갑자기 스크린에서 사회자가 새해 초읽기 시간이라고 우렁차게 선포한다. “열, 아홉… 셋, 둘, 하나!” 갑자기 창밖에서 폭죽소리가 쾅쾅 터지면서 순간순간 꽃보라가 창가에 눈부시게 비쳐든다. 이런 황홀경에 취해있노라니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왕안석 (王安石)의 시 〈원일(元日)〉이 머리에 떠오른다. “폭죽소리에 한해 지나가고 봄바람은 도소(중국 고대 액막이약주명)잔에 따스한 김 불어넣네. 찬연한 해볕 이 집 저 집 비쳐줄제 새로운 도부(복숭아나무로 만든 부적)로 낡은 부적 갈아야 하리”

새해다, 새날이다! 딸애가 어느새 레드와인잔을 탁반에 받쳐들고 제 엄마와 나에게 준다. 이어서 딸애와 사위는 두손으로 잔을 공손히 받쳐들고 환하게 웃으며 우리 둘의 잔을 가볍게 부딪치면서 말한다.

“아버지, 어머니,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기다림의 행사는 계속된다. 아침 일곱시, 부모님 영정을 모신 제단 앞에서 경건한 자세로 차례를 지내고 설날 필식(必食)인 떡국을 먹고 있는데 또 전화소리가 울린다. 역시 축복의 전화다. 나도 밥술을 놓기 바쁘게 전화기를 움켜쥐고 미리 메모했던 명단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춘절작업’을 시작한다. 먼 남방에 계시는 중학교 때 은사님께, 지병과 한창 대범하게 싸우고 있는 문우에게, 작년에도 좋은 책을 얼마 냈다고 기별 왔던 서북지구 어느 출판사 사장에게, 그리고… 또 그리고 그믐날 밤 무더기로 받은 메시지에 대한 답장, 손가락이 시큼하도록 작업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였다. 전화로 하는 설인사는 초하루날 오전내로 하는 것이 약정속성(约定俗成)한 례의라고들 하지 않나.

초하루날 오후부터는 아빠트 동네 설인사가 시작된다. 옆집들에서, 아래웃층집들에서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 찾아와 가슴 앞에 두손을 공손히 움켜쥐고 인사한다. “춘절을 축하합니다!” 거실의 쏘파에 둘러앉아 차 한잔씩 나누며 담소하다가 나중에 웃층에 사는 산동(山东)량반이 우리를 자기 집으로 이끈다. 동네사람들끼리 커다란 식탁에 둘러앉아 술잔을 나누며 동서남북 사투리냄새가 물씬 풍기는 말투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우리 명년부터 꼭꼭 이렇게 모입시다. 명년 당번은 우리 집으로 하구요.” 아래층 광동(广东)량반의 말이다. 창밖을 내다보니 벌써 밤장막이 이슥하게 깔렸다. 도연한 취기에 물젖은 채 집으로 돌아오면서 맹자의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한다. “집들이할 때는 이웃을 가리라(居必择邻).” 이런 다정한 사람들과 이웃을 맺은 것도 연분이요, 행운이 아닐가.

정월 초이튿날부터도 이러저러한 춘절 ‘외사활동(外事活动)’이 련이어 펼쳐진다. 몇몇 친척집 모임, 문우들 모임, 동창들 모임, 그날 점심은 이미 작고한 몽골족 문우일가유족들을 불러 설모임을 가졌다. “삼촌, 숙모님, 오래오래 앉으세요!” 친조카와 다름없는 문우의 두 아들내외는 다 커가는 자식들과 함께 몽골족의 명창 〈축주가(祝酒歌)〉를 부르며 나에게 술을 권한다. 큰조카의 쌍둥이아들은 이제 모두 대학 4학년을 곧 마치고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고 둘째조카의 딸은 금년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한창 고투중이란다. 해마다 가지는 우리들의 춘절특별행사, 저마다 열심히 살고 있는 조카 일가의 모습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하늘나라에 계시는 문우가 그리워난다…

어느덧 음력 정월 대보름, 중국풍습으로 춘절행사를 한단락 매듭 짓는 날이 되였다. 그날 저녁은 동료들 모임이 있었다. 은퇴와 현직 동료 스무명, 공무(公务)를 떠난, 직장인연으로 맺어진 정분의 례찬장이였다. 귀밑머리 희끗희끗한 고참으로부터 생기발랄한 젊은이까지, 관심과 위로, 고무와 격려로 화기애애한 시간이 흐른다. 그들의 진지한 모습에서 부패와 비리와 온갖 소인배작위를 일탈한 건전한 사무실문화의 꽃이 활짝 피리라는 믿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서로 어울려 선량하고 충실하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섭리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날 저녁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나는 드디여 서재의 책상가에 앉아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밖에서는 금년 춘절행사의 페막을 경축하는 폭죽소리가 한창이다. 창가로 다가가 먼 하늘가를 바라보니 오늘 따라 싱싱한 둥그런 보름달이 유난히도 다정하다. 저 달님은 이 지구촌마을을 지켜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가? 저 달나라에도 춘절과 같은 명절이 있을가?

중국에는 “가절을 맞을 때마다 친인들이 한결 그리워나네(每逢佳节倍思亲)”란 옛 시구가 있다. 그 친인이란 부모형제 일가친척은 물론 사회생활 인간관계에서 맺어진 여러 계층 가까운 사람들일 것이다. 그 그리운 마음, 춘절의 기다림 역시 그것이다. 바로 인정과의 만남이요 그 인정이란 바로 친정, 애정, 우정과 같은 인간의 감정일 것이다. 인간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는 말이 있다. 물질적 향수외에도 정신적 생활이 결여해서는 안되는 것이 바로 고급동물로서의 인류의 천성이 아니겠는가. 어떻게 보면 사회적 성격을 띤 명절인 원단과는 달리 음력설은 민속적 성격을 띤 명절로서 인간의 정을 나누면서 우리의 정신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장이 되는 것이다.

순간 머리 속으로 어느 신문에서 읽은 사회뉴스가 떠오른다. 어떤 어머니가 불효자인 아들을 기소하고 또 어떤 집에서 형제끼리 얼마 안되는 유산을 놓고 란투극을 벌렸다는 인지상정에 어긋나는 기문이였다. 이제 그 불효자는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었겠고 그 형제들은 화해의 잔을 나누었겠지. 고막이 터지도록 GDP요 뭐요 떠들면서 ‘물질제일주의’가 기승 부려 인정이 삭막해진 이 세월에 춘절이라는 ‘만남의 광장’이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다.

물론 이런 정나누기가 꼭 춘절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춘절은 일년에 단 한번 밖에 오지 않는다. 이러한 정나누기가 춘절의 단 한번 ‘쇼’로만 끝나지 않기를, 인간세상이 영원한 춘절이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또 하나의 기다림이다.

 

                                                                                      /김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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