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평론] 자기실현을 향한 려정―윤동주의 시에 대한 분석심리학적 해석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4-05 13:56:35 ] 클릭: [ ]

1. 들어가는 말

민족시인 윤동주(1917. 12.―1945. 2.)의 시작품들은 오늘날까지 다른 시대, 사회에 살고 있는 작가와 다른 경험을 지니고 있는 수많은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으며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우리가 모두 공감하는 어떤 보편적인 제시를 심리적으로 안겨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분석심리학적으로 볼 때 필자는 이것을 자기실현이라 생각한다. 즉 윤동주의 대부분 시작품은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를 적극적으로 찾아가려는 자아의 절실한 욕구와 힘겨운 려정으로 표현된다. 왜냐 하면 분석심리학에서 인간은 태여날 때부터 누구에게나 자기실현, 즉 전체정신을 실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의식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은 자기실현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때문에 종교, 시대와 사회를 떠나서 현재까지 우리 모두가 시인의 작품에서 공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시인은 보편적인 인간심성이며 인간의 원초적 조건인 자기실현을 작품속에 구현하였고 또한 독자들한테 심리적으로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잠재적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 즉 자기실현을 적극 요구한 것이다.

하여 본고에서는 칼․융(1875―1961)의 분석심리학리론으로 시인이 작품을 완성한 시간적 순서에 따라 대표적인 작품들에 나타난 자기실현과정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심리학 접근은 시인의 정신세계를 진일보 파헤쳐 작품의 심층적 의미와 지니고 있는 가치를 더욱 분명히 할 수 있을 뿐더러 현시대 심리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 생각된다.

2. 자아의 성숙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의식의 중심에는 자아가 존재하고 무의식의 중심에는 자기가 존재하는 바 의식속의 자아가 무의식의 내용물을 부단히 파헤쳐 깨달아나가 자기와 포옹할 때 자기실현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자아는 의식을 굳게 통제해야 할 뿐더러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 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해야 하기에 성숙된 자아는 자기실현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윤동주의 성숙된 자아의식은 그의 초기작품인〈초 한대〉,〈거리에서〉 등에서 이미 잘 나타나있다. “…光明의 祭坛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祭物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生命인 心志까지/ 白玉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초 한대〉(1934. 12. 24.). 시인은 초 한대를 깨끗한 제물, 염소의 갈비뼈로 비유하면서 자기희생정신을 노래하고 있으며 아름답고 사랑이 넘치는 마음으로 살려는 성숙된 자아의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자아의 성숙과 함께 시인은 차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세계에 눈길을 돌리게 되는데 1935년 북간도에서의 일제의 탄압과 통치가 극심해진 시기에 씌여진 〈거리에서〉 작품에서 어린 윤동주의 자아가 느끼는 북간도의 거리는 ‘광풍이 휘날’리고 ‘괴롬’이 넘쳐나고 ‘회색빛’에 잠긴 쓸쓸하고 암울한 거리이다. 그리고 1936년 봄에 씌여진 작품〈닭〉에서도 “한间 鸡舍 그 넘어 苍空이 깃들어/ 自由의 乡土를 잊은 닭들이/ 시들은 生活을 주잘대고/ 生产의 苦劳를 부르짖었다…”고 씀으로써 시인은 자유와 고향을 잃어버리고 피페한 생활난에 허덕이는 우리 민족을 닭에 비유하면서 슬픈 현실의식을 잘 나타내였다.

〈초 한대〉 등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이 종교적인 환경속에서 일상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아의식의 성숙이라고 할 때 〈거리에서〉, 〈닭〉 등 작품에서 보여지는 것은 실존적인 차원에서의 좀더 성숙된 자아의 현실적인 의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1938년 2월 윤동주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과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문과를 택하는 것도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아의식이 완전히 성숙되고 이제는 힘센 자아가 무의식의 여러 내용물들을 서서히 맞이할 준비가 되였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무의식의 의식화, 즉 자기실현을 시작하였다.

3. 무의식의 의식화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은 거대한 창조적 힘을 지니고 있고 사람은 생명본연의 성질에 따라 자신이 가지고 태여난 모든 정신적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기를 원하기에 자아가 자기를 향해가는 것, 즉 자기실현을 하는 것은 자아가 무의식을 적극적으로 의식화함으로써 가능하며 무의식을 보는 작업은 힘들고 고민과 고통이 동반될 뿐더러 인간의 삶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한다.

윤동주의 〈이적〉(1938. 6. 15.)을 살펴보자.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바리고/ 黃昏이 湖水우로 걸어오 듯이/ 나도 삽분삽분 걸어 보리이까?/ 내사 이 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온것은/ 참말 异迹이외다/ 오늘따라/ 恋情, 自惚, 猜忌, 이것들이/ 자꼬 金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余念없이/ 물결에 씻어보내려니/ 당신은 湖面으로 나를 불러 내소서.”

황혼이 내려앉은 어느 날 시인은 ‘부르는 이’ 없는 ‘소리’를 따라 기이하게도 호수가로 와서 련정, 자홀, 시기 등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우선, 시간적으로 볼 때 황혼이다. 황혼은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대략 중간 쯤 되는 시간대이다. 낮은 의식세계, 밤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할 때 황혼은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가 만날 수 있는 경계선인 것이다. 바로 이 경계선에서 시인은 무의식세계로 진입하였던 것이다. 다음, 시인이 다가간 곳은 호수이다. 심리학적으로 호수는 그 깊이, 내용물 등을 가늠하기 어려운 존재인 것 만큼 미지의 세계, 즉 무의식세계를 상징하며 의식과 무의식세계와의 대면을 상징한다. 그다음, 호수라는 무의식세계를 마주하고 시인이 느껴지는 련정, 자홀, 시기 등은 거대한 무의식에 잠재한 여러가지 내용물로서 시인의 자아는 바로 무의식을 의식화하였음을 상징한다.

윤동주의 대부분 시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려는 자아의 자기실현과정으로 볼 수 있으며 시인은 바로 작품을 통하여 무의식을 의식하고 자기실현에 도달하려는 확고한 신념과 그 욕구를 아주 잘 표현하였다. 〈무서운 시간〉(1941. 2. 7.) 에서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또 태초의 아침〉(1941. 5. 31.)에서 “电信柱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启示일까”에서 모두 ‘소리’가 등장한다. 이 ‘소리’를 심리학적으로 볼 때, 무의식의 ‘부름’이고 나를 일깨우는 각성의 소리이며 평화로운 존재의 상태를 뒤흔들어 고통스런 번민을 시작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는 소리인 것이다. 윤동주가 자기실현을 위하여 이미 무의식의 의식화를 시작하였음을 시사하는 바다. 그리고 〈또 다른 고향〉(1941. 9.) 에서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乡에 가자”와 〈서시〉(1941. 11. 20.)에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라고 한 것처럼 시인의 확신에 가득한 ‘가자’라는 결심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바로 자기실현을 향한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는 수없이 많은 내적인 고민과 갈등이 동반된다. 시인의 〈바람이 불어〉(1941. 6. 2.) 에서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理由가 없다”, 그리고 또한〈서시〉에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한 것처럼 바람으로 인해서 시인은 괴로움을 깨닫고 있으며 심리학적으로 볼 때 그것은 바로 자신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즉 성숙된 자아가 거대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하는 심리적 고민과 고통인 것이다.

4. 그림자의 인식과 통합

분석심리학에 의하면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심리적 내용이 바로 그림자이다. 무의식에 잠재한 그림자는 단지 해빛을 보지 못하여 나쁜 것처럼 보일 뿐 의식화로서 그림자는 발전될 뿐더러 자기실현의 좋은 에네르기, 좋은 밑거름으로 될 수 있다. 하여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억압된 그림자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살려서 자신의 것으로 통합하여야만 정신적으로 더 성숙되고 더 인간적인 사람으로 되여가는 것이다. 이제 윤동주가 어떻게 자아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여 자기실현을 향한 힘겨운 려정을 시도하였는지를 살펴보자.

1941년 9월 윤동주는 〈또 다른 고향〉을 쓴다. 이 시는 윤동주가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면서 전체정신의 중심에 이르고저 하는 열망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故乡에 돌아온 날 밤에/ 내 白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둔 房은 宇宙로 通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속에서 곱게 风化作用하는/ 白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白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魂이 우는 것이냐/ 志操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白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故乡에 가자.”

이 시에서 화자는 ‘어두운 방’에 처해있고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서는 바람이 불어온다. 이런 방에서 시적자아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고 또 다른 고향에 가기를 갈망한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때 우선 어두운 방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자아에 흡수되기를 바라는 무의식의 내용물이다. 때문에 시적자아는 ‘바람’이라는 무의식의 공격에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다음 어둠을 짖는 ‘지조 높은 개’는 시적자아의 내면을 각성시키고 깨닫게 만드는 령혼의 목소리이다. 그다음은 이 시에서 시적자아는 ‘나’와 ‘백골’과 ‘아름다운 혼’으로 분렬되고 있는데 특히 ‘백골’과 ‘아름다운 혼’은 대립의 관계에 처해있다. 그리고 ‘백골’이라는 시어가 4회 등장하는 바 이는 무게중심이 ‘아름다운 혼’보다도 ‘백골’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시에 나타나는 ‘백골’은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잠재한 어두운 그림자이며 ‘아름다운 혼’은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로, ‘나’는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 받아들여 이를 동화시키거나 그 뜻을 인식하려는 성숙된 자아이다. 여기서 시인은 분명 ‘백골’이라는 그림자를 인식하고 있으며 그 그림자를 통합하여 ‘아름다운 고향’으로 상징되는 자기, 즉 자기실현에 도달하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자신 내면의 그림자를 살리고 자기실현을 향한 힘겨운 노력과 그 도전은 〈참회록〉(1942. 1. 24.)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 온다.” 시인의 이 작품에서 밤은 무의식세계를 상징하고 거울은 자기성찰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거울을 통하여 자아를 응시하고 무의식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운석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위험한 행동인 것 만큼 자기실현의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음을 상징하고 슬픈 사람의 뒤모양은 시인 자아의 버림으로 무의식에 잠재한 그림자를 상징한다. 이러한 자신의 그림자를 통하여 자아를 응시하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살려서 보기 좋게 통합하는 것을 상징한다.

칼․융은 진정한 자신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무의식세계의 자신의 그림자를 억압하거나 거부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왜냐 하면 이러한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자기의 주동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만이 자신이 싫어하는 ‘어두운 형제’인 그림자를 통합하여 그속의 창조적인 힘이 의식세계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심리학적인 의미의 성장, 즉 자기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여 칼․융은 그림자를 통합하는 것은 평생동안 해나가야 할 작업이라고 잘라 말한다.

1942년 1월 29일 윤동주는 창씨개명을 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다. 일본은 윤동주에게 뿐만 아니라 그 시대 일제의 식민통치속에서 서럽고 힘겨운 삶을 영위하는 모든 조선민족에게 있어서 분명히 모두가 싫어하는 그림자이다. 이러한 그림자를 직면하여 윤동주가 도일함은 심리학적으로 볼 때 자신이 싫어하는, 힘이 강한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식속의 그림자를 통합하고 자기실현을 향한 자아의 절실한 갈망과 힘겨운 도전은 그의 마지막 작품인 〈쉽게 씌여진 시〉(1942. 6. 3.)에서도 잘 표현되고 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时代처럼 올 아츰을 기다리는 最后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慰安으로 잡는 最初의 握手” 이 시에서 윤동주는 자신의 무의식세계의 그림자인 ‘어둠’을 통합하고 자기실현을 이룬 ‘최후의 나’가 되기를 희망하고 ‘최후의 나’를 전체중심인 자기로 상징한다고 할 때 시인은 바로 자아와 자기가 포옹하고 악수하는 성숙되고 지혜로운 모습, 즉 자기실현에 도달한 자신을 심리적으로 갈망하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자아의식이 어느 정도 성숙되였고 자기실현의 조건을 갖추었다. 자기실현을 함에 있어서 시인은 무의식의 의식화를 시작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내적인 고민과 갈등을 겪게 된다. 무의식세계의 그림자를 대면하여 시인은 많은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그림자를 인식하고 통합하며 전체정신의 중심인 자기로 적극적으로 다가가려는 욕구를 잘 나타내였다.

인간 모두의 욕망인 자기실현은 사실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며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다. 특히 삶의 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 자기실현은 행복 그 자체이거나 행복한 삶의 중요한 조건이자 자질이다.

윤동주의 많은 시작품들은 자기실현의 려정을 아주 잘 표현하였다. 이처럼 인간 모두의 무의식속에 잠재한 자기실현의 욕구와 그 힘겨운 과정을 작품속에 구현한 것이 윤동주의 많은 시가 우리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전해주는 심리적인 제시이고 수많은 독자들이 공감하고 또한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는 리유이며 진정 그의 시가 지니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과 크나큰 가치인 것이다.

 

                                                                /오광욱(연변대학 문학박사)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