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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버지의 집짓기

편집/기자: [ 리영애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4-08 14:55:43 ] 클릭: [ ]

요즘 부정부패를 척결하면서 권력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집을 수십채씩 갖고있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고있다. 그야말로 우리 아버지와 같은 백성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아버지는 한평생 집을 짓고 관리하는 일터에서 일했지만 집 한채도 분여받지 못하고 팔십세에 고생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더군다나 50년대 길림성 로력모범이신 아버지가 살림집 한채도 분여받지 못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가?! 그때는 권리가 있어도 마음대로 집을 차지하지 않았고 로력모범도 집을 공짜로 가지지 않았다. 그만큼 령도는 청렴했고 모범은 혜택을 바라지 않았다.

그때 우리 집은 지금의 서시장 엘레베이터자리에 있었다. 1951년에 18평방 되는 집을 200원에 외상으로 샀는데 엄마가 떡장사 쌀장사를 하며 야금야금 빚을 다 물었다.

1961년, 우리 집 식구는 할머니까지 모두 아홉이였는데 아이들은 그런대로 한데 엉켜붙어 자면 되는데 할머니가 계시니 불편한 점이 여간 많지 않았다. 혈혈단신으로 조선 강원도 평강군 산골에서 걸어서 연길까지 오신 아버지, 압록강에서 떼목 타는 일을 하면서 수없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신 아버지, 세상 무서운것 없고 마음 먹으면 못해내는 일 없는 아버지는 집을 앞마당쪽으로 늘였다.

모아산에서 구들돌 캐는 일을 하다가 손을 다쳐 집에서 휴식하고있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열여덟살되는 언니와 열네살인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할머니와 함께 한달동안 토벽돌을 만들었다. 퍼들인 흙에 토막낸 짚과 물을 넣고 발로 잘 밟은후 나무로 된 틀에 다져넣고 틀을 슬쩍 우로 들어올려 빼낸후 말리우면 된다.

그해 국경절날, 병환에 계시는 엄마를 돌이 갓 지난 넷째동생과 함께 배초구에 있는 외할머니네 집에 보내신 아버지는 낡은 뒤벽을 허물어 다시 쌓은후 앞벽을 허물기로 했다. 뒤벽을 허물고 새로 토벽돌을 한메터 반가량 쌓았는데 비가 내렸다. 비는 좀처럼 멎지 않았다. 요즘같으면 상점에 달려가 비닐이라도 사다 덮을수 있지만 도시에서 살면서 비닐이라는걸 보지도 못한 우리는 갓 쌓아올린 토벽돌우에 양철조각이며 널판지들을 덮어놓을수 밖에 없었다. 구질구질 내리는 비에 덮어놓은 틈새로 비물이 줄줄 새여내렸다. 저녁때가 되여 언니가 부엌에서 장판널을 머리에 이고 한창 풍구질하는데 《빨리 올라와.》 하는 아버지의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널장판을 인 언니가 벙벙해있는데 아버지가 손에 들었던 물고기가 담긴 바께쯔를 쾅― 던져버리고 언니의 목덜미를 잡아끌어 구들에 팽개치기 바쁘게 비에 젖을대로 젖은 토벽돌벽이 쿵― 하고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옆에 있던 뽐프대가리 밑둥이 끊어져나갔다. 아버지는 너무 놀라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비가 와 집일은 못하자 한푼이라도 벌어보겠다고 부르하통하에서 물고기를 잡아가지고 돌아온 아버지가 제때에 언니를 끌어올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인명사고로 이어질번했다.

비는 사나흘 더 내렸고 골목에 무져놓은 토벽돌 일부도 젖어 망가졌다. 하늘이 개이자 아버지는 무너진 뒤벽을 다시 쌓았고 우리는 토벽돌을 더 만들었다. 그렇게 허물고 쌓고, 허물어지면 다시 쌓으며 20여일을 고생한 끝에 드디여 스물일여덟평방 되는 집이 완성되였다.

그후 할머니가 고향인 조선 강원도로 돌아가시고 언니도 농촌으로 내려가 식구 둘이 줄었다. 그러나 다섯째동생이 태여나고 애들이 나날이 커가니 30평방도 안되는 집에서 식구 여덟이 살자니 너무 비좁았다.

1967년, 아버지는 두번째로 집을 늘이기로 작심했다. 원래 우리 집과 웃집사이에 한메터 남짓한 골목이 있었는데 사람 하나가 옆걸음으로 나들수 있게 줄여 집을 넓히고 마당앞으로 또 둬메터 늘이기로 했다. 아버지는 헐값으로 사들인 파벽돌과 여기저기서 주어들인 벽돌로 벽을 쌓았다. 모아산에서 일하다 다친 아버지의 손은 몇년이 지나니 엄지손가락과 식지사이가 움푹 패였는데 아버지는 그 손으로 모진 일을 계속 했다. 처음 집을 늘일 때는 할머니와 언니가 함께 일했지만 할머니도 안계시고 언니도 농촌으로 내려갔기에 일군이라야 고작 아버지와 나였다. 동생이 다섯이나 되여도 제일 큰 동생이라야 열다섯살이였다. 그 시기는 《문화대혁명》때라 같은 《혁명조직》에 있던 친구들이 도와주었기에 집을 계획대로 늘일수 있었다.

아버지의 집짓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74년 가을 아버지는 두번이나 늘인 집을 인민페 1300원에 팔고 공원소학교 동쪽 도랑옆에 있는 20평방이 되나마나한 헌 초가집 한채를 600원에 샀다. 한족 할아버지가 홀로 살던 집이였는데 남새밭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것 같아서 어머니와 자식들은 모두 반대했다. 하지만 《참새가 어찌 대붕의 뜻을 알랴!》 아버지의 원대한 구상은 따로 있었다. 넓은 마당에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봄 아버지는 헌 초가집 앞마당에 집을 지었다. 큰 자식 넷은 농촌으로 내려가고 초중과 소학교에 다니는 어린 동생 셋만 집에 남았다. 그때 나는 신풍문예선전대를 따라 신풍벽돌공장에서 일했는데 헐값으로 파벽돌을 사서 아버지의 새집짓기를 도와주었을뿐이다. 대들보와 지붕을 얹을 때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일은 아버지 혼자 했다. 그때 아버지는 90여평방 남짓한 세칸집을 지었는데 둘째아들과 금방 시내로 올라온 큰딸에게 한칸씩 주었다.

새집을 지은지 3, 4년이 될 때 아버지는 새집 앞마당에 또 두채의 집을 지었다. 한채는 칸을 막아 장가를 간후 세집에서 살고있는 셋째아들과 《파가이주호》가 된 내가 들게 하고 다른 한채는 일자리 없는 형부가 상점을 꾸리도록 내놓았다. 물론 대들보와 지붕을 얹을 때를 제외하고 아버지 혼자 지은 집이다.

18평방 되는 집을 180여평방으로 열배 넘게 늘인 아버지의 담략과 포부와 노력과 희생이 있었기에 몇년후 그 집들이 《파가이주호》로 되자 집조 다섯을 낼수 있었다. 아버지는 두 아들과 큰딸에게 집 한채씩 주고 한채는 팔아 당신이 드실 집을 마련하는데 웃돈으로 썼다. 그리고 당신들이 떠나면 그 집을 큰손자에게 주라고 분부했다.

2000년 아버지가 《파가이주호》로 분여받은 소우장거리의 50평방짜리 단칸 온돌집은 말썽꾸러기집이여서 텔레비죤에도 나오고 백성들이 시정부를 찾아 신고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조가 나오지 않았다. 그후 십여년이 지나간 2011년에야 집조가 나왔으니 아버지는 평생 그럴듯한 집에서 편안히 살아보지 못했다.

집 없던 설음과 집을 짓는 일터에서 잔뼈를 굳힌 아버지― 집에 대한 애착, 집짓기에 대한 열정과 욕망은 그 누구도 억누를수 없었다. 그리고 집을 짓는 솜씨 또한 탁월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나는 다 같은 자식인데 유산분배가 공정하지 못했다고 많이 원망했다. 18평방짜리 집을 고치고 늘여 다섯채의 집으로 되기까지 나의 노력도 있는데,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채 한칸에서 남편을 떠나보낸 나인데 왜서인가고 한동안 서러워했다. 과부 제 설음에 부모님을 원망한 내가 너무 부끄럽다. 부모님의 유산을 나눠갖지 못했다고 옹졸하게 생각한 내가 동생들한테 부끄럽고 부모님에게 죄송스럽다.

살아생전 타향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자식 칠남매 키워 시집장가 보낸 아버지, 담략과 포부와 피땀으로 네 자식한테 집 한채씩 마련해준 아버지, 단칸 온돌방에서 늘 불쏘시개걱정 석탄걱정 하다가 지금은 연길 동북쪽 높다란 산등성이 0.1평방도 안되는 나무집에 계시는 아버지, 이제 더는 집을 짓지 마세요. 일곱자식 모두 난방아빠트에서 남부럽잖게 잘살고있으니 편히 쉬세요.

아버지! 사랑합니다.

 

                                                                              /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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