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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하늘에 띄워보내는 메시지

편집/기자: [ 신정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4-09-12 19:42:46 ] 클릭: [ ]

 
1975년에 남긴 공사문예공연 기념사진. 중간줄 오른쪽 두번째 양봉송선생님, 뒤줄 오른쪽 첫번째 필자 유춘란.

지난 4월말 잠간 시간을 내여 소학교시절의 은사 양봉송선생님을 찾아뵈였다.

문을 떼고 선생님댁에 들어서니 첫눈에 안겨오는것이란 박스채로 쌓여있는 원고지와 서재벽을 메우고있는 책들이였다. 그속에는 선생님께서 퇴임하신후에 집필하신 《회룡봉촌사》와 훈춘시제5중학교 학생작품집 《자리정돈》도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오도카니 앉아있는 둥근 밥상에도 원고지들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는데 펼쳐놓은 원고지우에 마개를 열어놓은 필이 누워있는걸로 보아 금방까지도 책집필에 물두하고 계신듯했다 《선생님 아직도 글을 쓰십니까?》 하고 묻는 나를 바라보시며 선생님은 말없이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띄우셨다.

40년 동안 색바래지 않고 이 장애인 제자에게 한결같이 보내주는 따뜻한 미소이다.

원고지를 들고 첫페지를 펼쳐보니《훈춘조선족사화》라는 글발이 안겨와서 내 가슴은 뭉클해났다. 선생님은 고향 《회룡봉촌사》집필에 이어 또 훈춘의 조선족력사를 집필하시는구나. 이런 글을 쓰자면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뒤적여야 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실들을 확인해야 하는지 책을 써보지 못한 나로서도 그 어려움이 대충 짐작이 가는데 선생님은 또 그 힘든 길을 선택하셨구나!

나는 다시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1메터 70을 넘기는 훤칠한 키의 선생님은 지금 너무 말랐고 허리까지 약간 휘우둠해진듯싶어서 좀 안스러워보였다.

《선생님 건강은 어떠세요? 선생님도 이젠 70이신데…》

《몇해전에 중풍을 맞은 후유중으로 한쪽다리가 좀 불편하오 그래서 지금 아침마다 꾸준히 등산하고있소.》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 한쪽다리를 살짝 절고계셨다.

《장애인인 나를 너무 이뻐하시니까 선생님도 함께 장애가 되셨네.》

《그런가?》

우리 두 사제간은 마주보며 웃었다

이렇게 허물없는 사제간의 정은 어느덧 40년을 이어왔다.

1974년 선생님께서 우리 학급 담임을 맡으셨을 때 나는 소학교 4학년이였다. 교단에 오르시던 첫날 장애인인 나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에는 여느 선생님들에게서 흔히 느껴오던 동정의 눈빛이 아닌 믿음과 긍정이 담겨있어 마음은 몹시도 따뜻했다.

그 따뜻함이 감로수가 되여 주눅이 들었던 내 마음의 구김살은 펴지고 나는 선생님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선생님한테서 지식외의 많은것들을 배울수가 있었다. 개구리 울던 여름밤 다른 애들을 따라다니며 뛰놀수 없어 홀로 골목길에서 놀고있는 내가 눈에 띄면 그저 지나치지 않고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은 얘기들을 해주시던 선생님이였다.

한번은 독서를 많이 하라고 일깨워주는 선생님앞에서 읽을 책이 없다고 툴툴거렸더니 선생님께서는 선뜻이 호주머니를 털어 3원 70전을 선대해서 《홍소병》잡지와 《연변문예》잡지를 주문해주셨다. 그때 민영교원으로 계시던 양선생님께서는 정부로부터 한달에 신문잡지값 5원을 지급받았고 월급은 년말에 대대에서 공수로 계산해준다고 했다. 온 가정의 한달 현금수입 5원에서 나를 위해 3원 70전을 지출하신 선생님, 아들 셋을 키우는 한 가정의 호주로서 어쩌면 그렇게 할수가 있었을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눈시울이 붉어지는 감동이다. 그후 선생님께서는 학급학생들에게 집에 있는 도서들을 학급에 헌납할것을 제의하고 학급에 작은 도서상자를 마련해놓았다

그 도서상자안에 꽂혀있던 보풀이 인 책들은 고갈된 내 마음에 독서의 향기를 채워주었다. 지금도 내 눈앞에 그때 그 책이름들이 또렷이 안겨온다

《동곽선생의 이야기》, 《소리나는 화살》,《서유기》, 《뢰봉이야기》, 《무명천의 격전》, 《서사의 아들딸》,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였는가?》… 선생님의 그런 헌신과 노력으로 나는 학교시절에 글쓰기와 독서에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되였고 글쓰기의 첫발자국인 일기쓰기도 꾸준히 견지할수가 있었다. 선생님께서 내가 쓴 일기를 한편한편 봐주시고 좋은 일기를 골라서 학급학생들앞에서 읽어주면서 참 잘 썼다고 칭찬해주실 때, 내가 쓴 글이 자기 학생들을 초과했다며 초중반 선생님들이 자기 학급 학생들에게 읽어줄 때 나는 항상 어깨가 으쓱해지군 하였다. 그 순간에만은 그야말로 내가 장애인이 아닌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의 눈길을 한몸에 받아안은 공주님이였다. 아, 얼마나 신나는 일이였던가!

또 내게 아주 큰 자부심을 안겨준 일이 있었는데 내가 쓴 《일요일 지원로동》이란 동시에 선생님께서 친히 곡을 붙여주셔서 회룡봉학교문예선전대의 녀성중창으로 훈춘현 중소학생문예경연에서 상까지 받은것이였다.

선생님께서는 항상 입버릇처럼 내게 말씀하셨다 《장애인인 너에게 적합한 직업은 아마 작가일것 같다. 아무쪼록 열심히 글을 써서 글쓰기수준을 제고하는것이 최선인것 같다.》 중학교만 졸업하면 무조건 농촌에 나가 농업로동에 종사해야 하던 때라 선생님께서는 장애인인 나의 앞날까지 근심하고 계셨던것이다. 선생님의 그러한 어버이다운 관심과 지도하에 쌓아온 문학수양이 바탕이 되여주었기에 나는 지금 나이 50에 그동안 잊고있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고 시, 수필, 가사와 같은 많은 문학작품들을 각종 신문, 잡지에 발표하고 시랑송 장끼까지 뽐내며 멋진 중년을 보내고있다.

지난 8월 11일 지체장애인날에도 훈춘시장애인련합회에서 조직한 기념행사에 초청받아 자작시 《어머니》를 읊었다.

《채 피지 못하고 스러지는

한송이 꽃이였음에도

날아보지도 못한채 나래 부러진

한마리 새였음에도

보듬어 안아주며

함께 울어주는 어머니가 있어

차마 이 한 목숨 버릴수가 없었습니다

……》

장내에 모인 장애인 친구들은 물론 련합회 리사장님들까지도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내 시랑송에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그뿐이 아니다. 나는 또 늦깎이로 글쓰기를 시작했음에도 《한국국제문학 신인상》, 《연변인민방송국생활수기공모 금상》과 같은 상들을 안아오는 뿌듯함도 만끽하고있다.

나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내가 사회에 진출한후에도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대학시험에서 락방되여 절망하고있던 1983년 8월 선생님께서는 30리 산길을 걸으셔서 경신향 벌등촌에 있는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대학교입학통지서를 받으면 꼭 제일먼저 보여드리고싶은 선생님이였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나는 선생님을 똑바로 쳐다볼수가 없어 고개를 푹 떨구었다. 순간 먼지를 뒤집어쓴 선생님의 남색운동화가 눈에 띄였다 너무 눈에 익은 운동화였다. 소학시절에도 선생님께서는 저렇게 남색운동화를 신으시고 지체장애인인 나를 경신공사(지금의 경신진)에서 열리는 시랑송대회, 이야기대회, 3호학생강연대회에 참가시키기 위해 손목 잡고 30리 산길을 함께 걸으시지 않았던가! 내가 못나서 오늘 선생님께서 또 그 험한 길을 걸어오셨다고 생각하니 왈칵 울움이 터짐을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그러는 나의 손을 꼭 잡아주시며 선생님께서는 절절히 타이르셨다.

《춘란이앞에 선생으로 서있는 나도 기실 초중졸업생이요. 고중입학통지서를 받고서도 가난때문에 학교에 갈수 없을 때엔 정말 내 인생이 끝장난듯싶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이젠 대학교 졸업장도 탔고 그 작은 로전소학교(회룡봉소학교분교였음) 민영교원부터 시작해서 이젠 당당한 경신중학교 정식 교원까지 되였소.》

《대학에 가야만 훌륭한 인재인건 아니요. 이 사회에는 춘란이처럼 똑똑하고 지혜로운 청년들이 할일이 많고많소.》

……

선생님의 그 정성, 그 노력이 나를 감동시켰고 먼지 묻은 선생님의 운동화가 내 가슴에서 《포기》라는 두글자를 지워주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나는 체면이란 허울을 벗어던지고 또 마음에서 장애인이란 자비감도 밀어내고 평범한 인간 유춘란이로 열심히 살기로 작심하고 마을의 소학교에 대과교원으로 취직했다

체계적인 사범교육을 받지 못하고 교원사업에 참가한 나였기에 애들을 가르치는데 어려움도 한두가지가 아니였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이 우리를 어떻게 가르쳤던가를 돌이키면서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양선생님께서 필기장에 장난삼아 그려놓은 충남이의 그림을 보고 그림에 특장이 있다고 칭찬해주며 만화를 그리도록 인도해주시면서 그 애가 그린 그림을 교실벽에 전시해주던 일, 줄뛰기하는 순자의 동작이 률동감이 있다고 무용을 하면 되겠다고 학교문예선전대에 추천해서 무대에 올려주던 일, 열살이 넘도록 식자관을 못 넘긴 김광훈학생이 흑룡강으로부터 전학해왔을 때 수업시간마다 개별수업을 따로 해주며 1년만에 4학년 수업을 소화할수 있도록 제고시키던일 등등은 나에게 포기를 모르는 교육자의 정신과 《인재시교》의 교육리념을 가르치는 산 교재로 되였다.

이렇게 교육사업을 하는 내앞에는 항상 양봉송선생님이란 훌륭한 본보기가 있었기에 나는 장애인이였으면서도 탄탄한 교수실력으로 사회와 학부모들의 인정과 찬사를 받는 우수교원이 될수 있었고 2000년부터는 훈춘시 영안진중심유치원 원장을 련임하면서 유치원에 《구역놀이법》이라는 새로운 교육활동모식을 대담히 도입하여 상급교육부문의 인정을 받았다

2008년에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고향의 아침》프로에서 우리 유치원과 나를 소개하기도 했다

구쏘련의 위대한 교육가 까이로브는 이렇게 말했다 《천부는 종자로 될수 있지만 이미 이루어진 지식과 덕성이 아니다. 이런 종자의 발전은 반드시 교육과 교양에 의해서만 도달할수 있다.》 참으로 지당한 명언이다.

훈춘시 경신향 벌등촌이란 편벽한 산골에서 장애인이란 《쭉정이 종자》로 태여난 내가 인젠 제법 시랑송가로,문학애호가로,교육자로 떳떳이 자리매김할수 있은것은 양봉송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선생님의 참다운 교육과 교양이 있었기때문이 아닐가?

옛추억을 더듬어보다가 나는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여쭈었다. “지난 70년대초에는 교육이 중시받지 못하던 시기였기에 자격증서 없이 아무나 하는 교원사업이 아니였습니까? 지금처럼 고급교원평의도 없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바라고 그렇듯 헌신적으로 사업하셨습니까?”라고 말이다.

이에 선생님께서는 《학부모들의 긍정의 눈길이 나의 자격증서였고 한글자 두글자 지식을 익혀가며 건강하게 커가는 시골아이들 역시 당과 사회에 바치는 나의 량심의 자격증서였다.》고 대답하시는것이였다. 심산속의 벽계수 같이 맑고 깨끗한 지조를 지니신 선생님만이 써낼수 있는 완벽한 답장인듯싶었다.

그런 신조가 있었기에 선생님께서는 장애인학생일지라도,후진학생일지라도 다 금싸락같이 여기며 마음으로 품어 애지중지 키우셨던것이다 .

나의 존경하는 은사 양봉송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지식보다 사랑의 마음을, 실력보다 지극한 정성을 쏟아가며 한명한명의 학생들을 키우셨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게 바로 소질교육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든다.

40년 세월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 교육자들 앞에 채 풀지 못한 과제로 남아있는 교육모식을 선생님께서는 벌써 지난 세기 70년대에 실천하고 탐구하신것이다.

그리고 그후 훈춘시제5중학교에서 작문지도교원으로 사업하실 때에도 선생님께서는 풍성한 성과를 따내셨다. 나는 그때 선생님을 보며 또 한번 마음으로 느꼈다. 《교육사업에 대한 무한한 애착심을 갖고 항상 학생들의 미래를 념두에 두고있는 교원의 마음가짐이 바로 교육자의 지혜를 낳는 원천》이라는것을.

내가 이 글을 쓰고있는 시각에도 나의 인생의 본보기 양봉송선생님께서는 물질의 풍요로움을 즐기기에 드바쁜 사람들과는 달리 70고령임에도 후대들에게 우리 민족의 빛나는 자취를 남겨놓기 위해 《훈춘조선족사화》의 마무리 집필에 몰두하고계신다.

듣는바에 의하면 훈춘시에서 조직하는 교사절 30주년 기념대회에서 선생님께서 또 영예롭게 표창받으셨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교사절도 벌써 30주년이다. 이 뜻깊은 시각 나는 높아가는 9월의 쪽빛하늘을 우러러 선생님의 건강장수를 기원하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웨쳐본다.

《선생님, 마음으로 품어 정성으로 키워준 그 은혜 영원히 잊지 않을것입니다!》

/유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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