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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72]그 나그네가 너의 아버지란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1-22 12:45:26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2)

◇김만옥(연길)

나에게는 철부지 시절의 울지도 웃지도 못할 이야기가 많다. 그중에서도 제일 머리 속에 깊이 남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언녕부터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 다행히도 오늘 기회를 만나 무등 기쁘다.

우리 아버지가 항미원조 전선으로 나가시는 날까지도 나는 우리 집 식구중에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것은 그 때까지 아버지를 한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식구들의 생활비를 마련하느라 일년사철 외지에서 동분서주하면서 로임만 인편에 보내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저녁이였다. 해가 지고 등잔불을 금방 켜자 웬 낯모를 사람들이 우리 집 정주칸에 골똑 모여 웅성거렸다. 이윽하여 키꼴이 장대한 웬 사람이 집안에 들어섰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어두운 등잔불빛에 나는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토론이 오래 계속되다가 사람들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인젠 떠난다면서 밖으로 몰려나갔다. 그들 중에 배낭을 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나의 아버지였다. 그 시각에도 나는 아버지의 배낭 뒤자락만 보았을 뿐 얼굴은 보지 못했다.

아버지는 생사미결인 항미원조전선으로 떠나가시면서도 식구들과 작별인사도 나누지 않았다. 아마 리별의 쓸쓸함을 보이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나도 엄마와 같이 사람들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은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또 크게 뜨고 이쪽저쪽 기웃거리며 아버지가 어느 쪽으로 가는지 보려고 애써도 끝내 보이지 않고 흩날리는 눈꽃만이 나의 얼굴에 가끔씩 떨어져 녹아내렸다. 이윽고 마당에서 들려오던 사람들의 말소리도 발작소리도 점차 사라졌다.

아버지가 안 계시던 그 해 겨울은 무던히도 추웠다. 밤이면 식구들은 작은 초가집 차거운 구들에 누워서 옹송그리며 지새웠다. 아침밥을 지으려고 엄마가 가마뚜껑을 열려면 얼어붙어서 떨어지질 않았고 물독을 열면 물독안에 작은 얼음물독이 앉아있었다.

어느 날 나와 동생은 밥상에 마주앉아 밥을 먹다 말고 동시에 울음보를 터뜨렸다. 엄마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 둘은 방안이며 부엌이며 바깥을 다 돌아보았으나 엄마는 보이지 않았다. 울면서 찾고 찾다가는 또 울고 하다가 우리는 아마 잠든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밖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기에 달려나가 보니 엄마가 쑥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오셨는데 혼자서 내리우지 못하여 땅에다 메여치는 소리였다. 엄마는 우리가 알면 따라 떠날가봐 가만히 우리를 밥상에 붙여놓고 나무하러 갔던 것이다. 후에 종종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얼마 만큼 기다리면 엄마가 나무를 이고 온다는 믿음으로 나와 동생은 고독한 고비를 넘기군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쑥나무에 의지하여 초가집을 덥혀낸다는 것은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이였다. 이불이 적어서 엄마는 늘 식구들의 옷을 덮고 밤을 지냈다. 악착스럽게 덮쳐들던 매서운 추위는 끝내 백기를 들고 물러서고 말았다. 마당의 얼음도 눈도 땅도 다 녹았다. 엄마는 늘 우리들을 집에다 두고 지금의 시간제 일군들처럼 바느질 아니면 두부를 앗는 등 일을 찾아하여 살림에 보탰다.

그 날은 아마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일하러 간 모양이였다. 나는 마당에서 혼자 작은 돌멩이들을 모으며 놀고 있었다. 웬 사람이 지팽이를 짚고 절뚝절뚝하면서 겨우겨우 걸어서 우리 집 마당에 들어섰다. 그의 어깨에는 빈 배낭이 메여져있었다. 그 사람은 나한테로 다가오더니 아무 말 없이 나를 도와 돌멩이를 모아주고 돌멩이로 땅크모형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로 그 사람은 우리 집 방안에서 신문지를 얼굴에 덮고 밤이고 낮이고 없이 집이 떠나갈듯이 코를 골면서 자기만 했다. 그러다가도 우뢰소리만 나면 “비행기 떴다!” 하고 웨치면서 맨발바람으로 밖으로 뛰쳐나가군 했다. 그 때마다 엄마는 비행기가 아니라 우뢰소리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방안으로 겨우겨우 끌어들였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엄마는 무우 캐러 간다고 나섰다. 나도 엄마를 따라갈 생각으로 바삐바삐 서둘렀다. 내가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방안에서 그냥 자기만 하던 그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물을 떠달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냉큼 돌아서서 물독에 가 커다란 박바가지에다 물을 푹 떴다. 뜨고 보니 나도 목이 말랐다. 바가지에 뜬 물을 내가 먼저 마시고 나서야 방안에서 자기만 하는 그 사람한테 가서 물바가지를 내밀었다.

무우밭에서 쉴참에 엄마와 함께 먹는 무우는 그야말로 별맛이였다. 나는 문득 금방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엄마, 우리 방안에서 그냥 자기만 하는 그 나그네는 누구예요?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서 이름을 부르면서 물을 떠달라고 했어요.” 엄마는 너무나 어이없다는듯이 한식경이나 나를 바라보더니 “그 나그네가 바로 네 아버지란다.”라고 알려주셨다.

아버지?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 때까지도 아버지란 개념이 모호한 나였다.

나의 아버지는 원래 로동자 출신이였다. 여러가지 기계와 차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고 또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런고로 항미원조 전선에서 아버지는 탄약을 나르는 차를 운전했다. 전선에서의 모든 일은 사선을 넘나드는 일이였지만 탄약을 나르는 일의 간고함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미국놈들은 낮에는 물론이고 밤에마저 조명탄을 던져서 기여가는 개미마저 감시할 정도였다. 조명탄이 지난 후이면 자동차 불을 켜지 못하고 차를 달려야만 했다. 자동차불도 없이 탄약을 싣고 달리는 간고함은 겪어본 사람 외에는 그 진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탄약차는 적들의 폭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큰 부상을 입었다. 이것은 두번째 부상이였다. 탄약차는 두동강이 나고 병원에 호송된 아버지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피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벗기지 못하고 가위로 베여내였단다. 중상을 입은 아버지는 전선병원에서 얼마간 치료를 받았는데 상처가 중하여 더는 치료할 수 없게 되여 후방에 치료를 보낸 것이였다.

아버지는 무게 있는 군공메달 다섯매를 지니고 오셨다. 부상으로 하여 쇠약해진 아버지는 모진 공포증과 병마에 시달렸다. 엄마는 산에 가서 약재를 캐여다 달여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하였고 닭곰을 해서 보신시켰다. 엄마의 지극정성과 아버지의 완강한 의력으로 약 2년 후에 아버지는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사업터에 나서게 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또 외지에 사업배치를 받다 보니 우리는 또다시 서로 떨어져 살아야 했다.

몇년 후에 아버지가 다른 곳으로 전근되면서 우리 식구들은 한곳에 모여 살게 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기숙사로 가게 되여 또 아버지와 떨어지게 되였다. 하여 평생 아버지와 함께 있은 시간은 방학까지 다 계산하여도 6년 밖에 안되였다.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에 대하여 미처 알지 못하고 리해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아버지가 점점 더 그리워지는 오늘 지나간 세월이 다시 올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 그 누구나 한평생 살면서 수많은 추억들이 있다. 추억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아마 그 때 그 시절 그 일이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인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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