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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59]추억 속의 그 청춘시절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04 12:52:54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농촌에 내려갔다. ‘광활한 천지’에서 ‘섬섬옥수’ 여린 손바닥에 장알을 박고 채 여물지 못한 잔뼈를 굳혀가면서 낮에는 로농들을 모시고 힘겹게 농사일을 배우고 저녁이면 청년남녀들이 한덩어리가 되여 허물없이 활동실에 모여 학습하고 춤추고 노래하며 웃고 떠들면서 고되고 힘들었던 육체상의 피로를 가시기도 했다.

희로애락으로 점철된 인생의 그 한 시절이였건만 나는 언제나 랑만과 희열에 넘쳐 시름없이 내달리는 굴레 벗은 망아지와 같았다.

안도2중 때 공청단 서기로 활약했던 나는 청년돌격대를 조직하여 정치대장직을 맡고 농촌 3대혁명 물결 속에서 맹활약하였다. 22명 되는 우리 청년돌격대는 매일 아침 대렬을 지어 ‘돌격대’ 붉은기를 추켜들고 노래를 부르며 모택동저작 《로삼편》과 《연변일보》를 휴대하고 일터로 나갔다. 그리고는 밭머리 15분 학습과 중간휴식 학습을 견지하였다.

학습과 실천을 결합하였기에 이른봄 벼씨 붓기, 벼모내기, 밭 매기, 추수, 탈곡 대회전을 벌려 언제나 전 공사에서 일등을 쟁취하였다. 범이 새끼 칠 지경이던 콩밭도 우리 돌격대가 단숨에 시원하게 멋지게 해제꼈다. 하여 사원들은 “우리 저 청년돌격대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한다”며 자랑스럽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가한 시절에는 ‘여가골’ 골물을 막아 작은 저수지를 만들어 몇쌍 되는 한전을 수전으로 관개하였다. 그 때 삼태기 쪽지게를 등에 메고 흙을 날랐고 겨울이면 ‘초탄’을 캐여 습지 논에 풀었다. 이렇게 온 하루 일하고 나면 피곤하였지만 저녁이면 활동실에 모여 학습하고 노래하고 춤추면서 하루의 피곤을 풀었으며 언제나 웃음과 기쁨으로 마을에 생기를 주었다.

그 때 모주석의 ‘전민개병’이란 지시에 따라 우리는 매 대원마다 민병으로 되였고 목총을 메고 일하러 갔고 군사훈련도 하고 실탄사격도 자주 하였다. 우리는 그 때 지금처럼 생활이 부유하지 않았지만 모택동저작 학습이 우리 돌격대의 힘의 원천과 동력이 되였다. 하여 우리 돌격대는 그 어떤 곤난도 전승할 수 있었고 언제나 랑만과 희열에 벅찼다. 우리는 여러차례나 대대, 공사, 현의 저작학습모범 선진집단의 영예를 따냈고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에서도 우리 선진사적을 취재하여 신문과 방송에 보도하였다.

1966년 5.1절에는 우리 돌격대 대장이 북경에 가 천안문 관례대에 올라 주은래 총리의 접견을 받는 영예를 안았고 련이어 대채대대를 참관하고 진영귀, 곽봉련을 만나보기까지 하였다.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나는 1966년 8월 현조직부의 추천에 의해 농촌 사회주의 공작대 일원으로 되였다. 한달 동안 집중훈련을 받게 되였는데 잊혀지지 않는 것은 주덕해 주장과 전인영 부서기가 우리 훈련반에 오셔서 중요한 연설을 하신 것이다. 주덕해 주장은 “농촌에 내려가면 우선 빈하중농들 속에 깊이 들어가 그들의 곤난을 료해하고 해결해주어야 한다.”고 하셨다.

우리 공작조는 안도현 만보공사 공영대대에 내려가 빈하중농 집에 이불짐을 풀고 전문 조사를 시작하였다.

그 때 19살 햇내기인 나는 방문중에 구씨 성을 가진 홀아비 할아버지가 힘겹게 살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집안을 알뜰히 청소하고 이불도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 할아버지는 “내 집에 사람이 찾아오기는 처음이요.”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문씨 성을 가진 군속 아바이가 아주 중한 병에 걸렸으나 경제난으로 치료를 못 한다는 것을 료해한 우리 공작조는 상급부문에 청시하여 아바이를 연변병원에 가 입원치료를 받게 하고 건강을 회복케 하였다. 그 때 연변병원에 입원하기란 하늘에 별따기였다. 그는 “공작대가 내 생명을 구해주었다. 군대에서 복무하는 우리 아들도 시름 놓고 복무한다.”고 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오동나무도 얼어터진다는 동지섣달 우리는 철거하게 되였는데 문아바이는 우리들의 발이 얼가봐 새노란 황연 잎으로 매 공작대원들의 발을 꽁꽁 감싸주었다. 하여 우리들은 헐망한 트럭차에 앉아서도 무사히 황구령을 넘어 철거할 수 있었다.

그 때의 모택동시대가 19살 애숭이 나를 간고분투 정신과 견강한 의지를 갖춘 사람으로, 락관주의 정신과 향상심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시켜준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퇴직후에도 《연변일보》 통신원 특약기자로 뛰여도 왔고 지금도 안도현조선족작가협회 회원으로 서투른 글이라도 쓰고 있으며 또 중앙인민방송국연변조선어방송애청자협회 안도분회를 책임지고 열심히 뛰고 있는 것으로 가슴 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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