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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55]바다처럼 넓고 깊은 어머니의 흉금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1-20 15:52:33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5)

◇김성숙(장춘)

필자 김성숙(왼쪽)과 그의 어머니(오른쪽)

나는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짙어가고 바다처럼 넓은 어머니의 흉금이 무시로 나의 심벽을 울린다.

어머니는 1906년 8월 26일 로씨야의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출생하셨다. 16세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중국 연변의 개산툰으로 이사오셨다. 이듬해에 12세나 이상인 우리 아버지와 결혼하셨고 몇해 후에 안도현 복흥촌으로 이사를 하셨다. 어머니는 평생 네 아들과 여섯 딸을 출산하셨고 39세부터 혼자 우리 5남매를 키우셨다. 어머니는 1985년 79세로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에게는 하늘땅을 울리는 큰 사적도 호언장담도 없다. 하지만 어머니는 선량하고 정직하며 근로용감해 한평생 좋은 일엔 앞장서고 나쁜 짓을 미워했으며 남을 돕기를 즐겼다. 하지만 종래로 보답을 바라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생은 나라와 자식들에게 바친 일생이며 그의 가슴 속에는 시종 나라와 자식들 밖에 없었던 것 같다. 몇가지 일화만 적어본다.

항일전쟁 때의 일이다. 당시 복흥촌 일대에서는 동북항일련군의 활동이 아주 빈번했다고 한다. 어느 날 점심무렵, 어머니가 우물가에서 한창 상추를 씻고 있는데 갑자기 한 중년사나이가 헐떡거리며 어머니 앞으로 달려오더니 “누님, 이것을 잘 보관해주세요.” 하면서 다짜고짜로 권총 한자루를 어머니 손에 쥐여주고는 쏜살같이 뒤산 숲속으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재빨리 권총을 상추 속에 감추었다. 이윽하여 왜놈 몇이 장총을 꼬나들고 헐레벌떡 달려와서 어머니에게 뭐라 지껄여댔다. 어머니는 일본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무엇을 묻는다는 것만은 알아맞추고 능청스럽게 반대방향인 앞산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놈들이 사라지자 어머니는 인츰 상추광주리를 안고 부랴부랴 우리 외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숨이 차서 헐떡거리면서 외할아버지에게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리면서 권총을 내놓았다. 그러자 외할아버지는 빙그레 웃으시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왕곰보라는 별명을 가진 항일련군이다. 그는 우리 셋째의 친구인데 우리 상점에도 물건 사러 자주 다녔네라. 너도 몇번 봤을 거다.”

어머니는 그 날에야 비로소 우리의 셋째외삼촌(이름은 송우) 역시 지하공작원이였음을 알게 되였으며 은근히 자호감을 느꼈다. 그 후부터 어머니는 셋째외삼촌의 일이라면 무조건 도와주었다. 나흘 후에 그 ‘왕곰보’가 우리 외할아버지를 찾아와서 그 권총을 찾아갔다 한다.

어머니에게는 그 밖에도 항일련군전사들에게 밥을 지어 대접하고 항일부대에 식량을 보내준 이야기나 왜놈의 주구인 한간을 사출한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해방전쟁 때의 일이다. 1945년, 항일전쟁에서 승리한 중국은 많은 애국청년들이 수요되였다. 당시 나의 둘째오빠 김화석은 연길현 동명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공산당의 교육을 받은 그는 나라를 구하려는 일념으로 불타올라 어머니 몰래 민주련맹을 찾아가서 참군하였다. 그 해 그는 겨우 15세였다. 1948년 10월 15일 금주를 해방하는 치렬한 전투에서 오빠는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 해 오빠는 17세였고 중국공산당 당원이고 반장이였다.

오빠의 사망통지서를 받은 어머니는 담배를 팔기도 하고 친척들에게서 꾸기도 하면서 로비를 장만했는가 하면 또 며칠 밤을 새우면서 베를 짜가지고 금주로 떠났다. 아들의 시신을 찾아다 고향땅에 묻을 작정이였다. 금주행 렬차에서 어머니는 창밖으로 스치는 먼산과 들을 바라보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겼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알리지도 않고 집을 떠났더냐? 나는 너를 떠나보내고 밤이면 흐느껴울며 날 밝기만 기다렸다. 너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하여 선생님들의 칭찬도 많이 받았지. 또 중학교 웅변대회에서 13살 어린 나이에 2등상을 받고 대련유람 장려까지 받았었지. …장한 내 아들아, 엄마는 너를 찾아 이렇게 구곡간장 태우며 길을 떠났다…’

부대에 도착한 이튿날, 어머니는 사단장이 파견한 경위원과 통역을 따라 공동묘지를 찾아갔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산언덕에 있는 묘지에 이르렀다. 언덕에는 마른풀들이 듬성듬성 서있고 추풍은 이미 락엽을 몽땅 쓸어버렸었다. 주위는 쥐죽은듯 조용하였다. 간혹 까마귀 몇마리가 까옥까옥 울면서 공중에서 선회하였다.

공동묘지는 크고 작은 구뎅이들로 온 언덕을 덮고 있었다. 구뎅이 옆에는 글이 적힌 헌 널판자가 세워져있었다. 경위원의 말에 의하면 작은 구뎅이에는 전사 2, 3명이 묻혀있고 큰 구뎅이에는 전사 5, 6명이 묻혀있으며 옆에 세운 널판자에는 안에 묻힌 전사의 이름이 씌여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한참이나 찾아다녀서야 끝내 김화석이란 이름이 적힌 널판자를 찾아냈다. 어머니는 아들을 껴안듯이 널판자를 가슴에 꼭 껴안았다. 미구에 세사람이 널판자가 있던 옆의 구뎅이를 파헤치니 두 남전사의 시체가 나왔다. 어머니는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두번째 구뎅이를 파헤치니 단발머리를 한 두 녀전사의 시체가 나왔다. 경위원이 세번째 구뎅이를 파려고 삽을 들자 어머니가 급히 경위원의 팔을 끄당기면서 그만두라고 제지하였다.

“여기에 묻힌 전사들이 모두 내 아들딸들이야. 자네 저 첫번째 구뎅이에 누워있는 전사의 시체를 올려오게. 난 우리 조선족의 풍습대로 베천에 감싼 다음 도루 묻어야겠네.”

어머니는 보자기에서 베천을 꺼내여 조심스레 전사의 시체를 감싼 다음 다시 구뎅이에 묻게 했다. 어머니는 언덕에 있는 구뎅이들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구뎅이마다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덮였다. 어머니는 울지 않았다.

언덕에서 내려오려니 두다리가 떨려서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끝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경위원과 통역이 성큼 달려와 어머니를 부축하였다. 좀 지나 어머니는 벌떡 일어나더니 젊은이들의 부축을 물리치고 산아래로 씨엉씨엉 걸어내려갔다.

이튿날 어머니는 조용히 부대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 어머니의 바다보다 넓은 흉금이여! 조국의 모든 아들딸들을 자식으로 포옹하는 어머니의 그 너그러운 품을 내가 어이 한시인들 잊을 수 있으랴!

나는 어릴 때 직접 겪어봐서 어머니의 속이 얼마나 깊은가를 잘 알고 있다.

1954년 내가 소학교를 졸업할 때의 일이다. 한학급에 있는 녀자애 몇몇이 빨간 양말을 신고 다니는 것이 몹시 부러웠다. 하지만 어머니 혼자 벌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가정형편에 나는 차마 사달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나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면 빨간 양말을 사주겠다고 말씀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이 힘이 되여서였던지 쉽사리 중학교에 입학하였다. 나는 말없이 빨간 양말이 내 앞에 나타나기를 은근히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이틀이 지나고 개학날이 되여도 빨간 양말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빈말만 하셨다고 생각하였다.

3년 후 나는 연변고중에 입학하였다. 그 때도 어머니는 여전히 빨간 양말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께서 이젠 까맣게 잊으셨으리라 생각하고 서러운 대로 더 묻지 않고 그 일을 단념해버렸다.

또 3년이 지나 나는 ‘우수졸업생’으로 학교의 추천을 받아 동북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대학입학통지서를 받던 그 날 어머니는 통지서를 손에 들고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이렇게 말씀했다.

“넌 이젠 대학생이니 빨간 양말은 그만두자. 오늘 나가서 네게 검정구두와 새하얀 양말을 사주마.”

아, 어머니께서는 원래 빨간 양말을 사주겠다던 6년 전의 약속을 잊지 않으셨구나! 나는 대뜸 얼굴이 붉어지고 말문이 꺽 막히였다. 자식과의 자그마한 약속도 어기지 않는 어머니의 진지한 사랑과 6년이란 오랜 세월 가슴 깊이 묻어두고 추호도 내색하지 않은 어머니의 깊은 마음에 나는 감탄을 금할 바 없었다.

어머니가 이 세상을 하직한 지도 30년이 넘지만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날따라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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