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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54]렬차원으로 일하던 나날에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1-20 15:47:10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4)

◇리동주(연길)

렬차원으로 근무하던 젊은 시절의 필자 리동주(중간)

퇴직 후 가끔씩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여보노라면 지나갔던 많은 추억들이 어제일처럼 새록새록하다.

푸른색 데트론 제복을 입고 왼쪽 앞가슴에 붉은색 바탕에 노란색 수실로 수놓은 렬차원 명찰을 달고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도 보인다. 이 사진을 보면 달리는 렬차에서 렬차원으로 일할 때 일들이 어제일이런듯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바로 1970년대 초반, 20대 젊은 시절에 심양철도국 도문분국 조양천렬차주재소에서 근무할 때의 인상 깊은 추억들이다.

지금 렬차원들은 멋진 휘장이 아니면 사진이 박힌 명찰을 목에 걸지만 1970년대에는 천으로 만든 명찰을 달았다. 이 자그마한 명찰이 바로 철도봉사계통 일군들의 지고무상의 영광이며 자랑이였다.

당시 각 업종의 슬로건은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자’가 가장 먼저였다. 렬차안내원들도 사심없이 렬차에 오신 손님은 한집안 식구와 같다는 의식 속에서 일하여왔다.

내가 몸을 담근 일터는 조양천에서 개산툰 그리고 화룡까지 달리는 조개화선 렬차였는데 비록 장도렬차가 아닌 짧은 구간을 달리는 구역렬차였지만 손님들을 위하여 봉사질을 높이기에 렬차원들은 저마다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봉사의 편리를 위하여 우리는 순차적으로 몇백개나 되는 동북 각 선로의 연선이름과 승차시간을 일일이 기억했으며 손님들의 물음에 답변을 주기 위하여 철도 량켠의 촌락들과 역 부근 10여리 되는 위치의 공장이름, 마을이름들까지 모두 일일이 기억했다.

그리고 손님들의 편리를 위해 간략한 지형도를 그린 지도책까지 만들었다.

어떤 역 부근에는 연변에 하나 밖에 없는 특수학교인 롱아학교도 있었는데 롱아학교의 학생들은 나이가 비교적 어린 학생들이였다. 이들이 방학이거나 개학이 되여 렬차에 탔다가 렬차 안내방송을 듣지 못하고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는 것이 그들은 물론 렬차원들도 항상 걱정스러운 일이였다.

렬차원들 역시 롱아언어를 잘 모르다 보니 그들과 소통할 수 없었다. 한번은 한 롱아학생이 울면서 뭐라고 손짓발짓 수화로 시늉하는데 뜻을 알 수 없는 렬차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로 롱아승객들을 위해 렬차원들은 특수언어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롱아학교 교원을 청하여 수화도 배우고 롱아교과서도 만들어가지고 렬차에 승차할 때면 항상 가지고 다녔다.

달리는 렬차 안에서 의외의 사고거나 비상사태를 대비해 우리 렬차원들은 의무일군들에게서 간단한 응급처치방법도 배웠으며 전문 강의도 들었다.

한번은 달리는 렬차에서 한 임산부가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모지름을 쓰면서 몹시 힘들어했다. 우리 렬차원들은 임산부를 다른 렬차칸으로 옮기고 주변을 천으로 둘러막은 후 방송을 통해 의사를 찾아주기도 했다. 렬차가 역에 도착하자 우리 렬차원 몇사람이 임산부를 담가에 싣고 개산툰 남산병원으로 달렸다. 남산병원은 언덕우에 있었는데 가로등도 없는 캄캄한 밤중인 데다 울퉁불퉁한 흙길이여서 천방지축 달리는 발밑이 높은가 하면 낮고 낮은가 하면 높아 무척 힘들었다. 무거운 담가를 들고 언덕을 향해 달리는 렬차원들의 등과 얼굴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힘들어도 임산부의 경각을 다투는 생명을 위해 우리는 그를 병원에 호송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한번은 한 청년손님이 낯색이 백지장처럼 되여 배를 끌어안고 차칸 복도에서 뒹구는 것이였다. 보아하니 급성 맹장염인 것 같았다. 우리는 한시도 지체할세라 먼저 전화로 병원과 련계를 취하고는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청년을 인차 전화를 받고 달려와 대기중인 병원 구급차에 옮겨실었다. 이렇게 병원까지 긴급호송한 데서 청년은 생명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렬차원들의 숨겨진 미담은 이 뿐만이 아니다. 타지방에서 처음 연변에 오는 손님이거나 조선 등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집주소가 바뀌여 목적지를 찾지 못해 당황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때마다 렬차원들은 휴식도 마다하고 손님들을 모시고 집을 찾아주었으며 렬차에서 부모나 친척들을 찾지 못하여 울고 있는 아이들을 유관 부문에 련계를 달아 가족을 찾아주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느 한번은 렬차에 탔던 한 손님이 친척집 주소가 아리숭하여 집을 찾지 못하겠다면서 딱한 사정을 호소해왔다. 그 때는 이미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였다. 가로등도 없고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밤중이라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웠고 밤이 깊었는지라 행인들도 없어 길을 물어보기도 곤난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밤길을 잘못 들어서서 국경선 초소 경비선을 넘어서게 되였다. 손님의 손에는 큼직한 짐까지 들려져있어 변방군인들은 우리를 수상하게 생각하고 이것저것 따져묻는 등 한동안 싱갱이질을 해서야 겨우 풀려나왔다.

그 때는 누구를 도와준다고 해서 장려금이나 사례금을 바라는 것도 아니였다. 오직 손님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는 위민사상이 머리속 전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사람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더없는 자랑과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였다.

달리는 렬차에서 방송에 맞추어 코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웃음 띤 얼굴로 서로 담소하면서 즐거운 나들이길에 나선 승객들을 볼 때면 렬차원들도 덩달아 그들과 함께 기쁘고 즐거웠던 시절이였다.

항상 타인을 위해 사심없이 일하다 보니 렬차원들을 찬양하는 감사신도 가끔씩 받군 했는데 한달이면 수십통씩 받을 때도 있었다. 우리는 손님들과 사회 각계층의 열정적인 지지와 찬양 속에서 철도봉사계통의 선진으로, 모범으로 되였으며 철도분국, 철도국의 봉사모범, 선진일군단위로도 표창받았다. 더우기 무사고 려객운송 안전 10여년 보존이라는 조련찮은 기록도 세웠는데 그것이 바로 젊음을 렬차운수계통에 바친 자랑찬 영예와 긍지감으로 남는다.

70년대는 물론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교통이 발전하지 못하고 하늘길도 열리지 않아 당시 사람들은 나들이 교통수단으로 많이는 기차를 리용했다. 그러다 보니 휴일이나 명절 때면 렬차는 더욱더 사람들로 붐볐다. 렬차원으로 승차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온몸은 늘 땀으로 젖어있었으며 더없이 피곤하군 했다.

돌이켜보면 달리는 렬차의 승무원으로 젊은 시절을 바치고 일터에서 물러난 지도 수십년이 되여온다. 그러나 지금도 흰김을 내뿜으면서 뿡 하고 긴 고동을 남기면서 칙칙폭폭 달려가던 파란 렬차가 그립다. 추억은 그래서 항상 아름다운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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