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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48]한번 은사는 영원한 은사입니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0-30 15:17:19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8)

◈지중찬(룡정)

옛 은사님들께 가족이 함께 큰절을 올리다

“은사님들 건강하십시오!”

“은사님들 오래오래 앉으십시오!”

이는 몇년 전 제가 저의 가족들인 안해와 아들딸, 손자, 손녀 등 9명을 이끌고 저의 소학시절의 13명 은사님들을 룡정시 비암산 일송정 별장에 정중히 모시고 큰절을 올리면서 한 진심의 축복이였습니다.

저는 자녀들이 모두 이 은사님들의 은혜를 영원히 잊지 않고 가슴속 깊이 아로새기게 하고저 은사님들의 높은 덕성과 고상한 교육수단들을 늘쌍 이야기해주었고 이런 모임도 가지게 되였습니다. 게다가 지금껏 은사님들의 희사마다 빠짐없이 참가했고 작고하신 은사님들도 제때에 찾아가 애도를 표시했으며 명절이면 양로원에 계시는 은사님들을 찾아 문안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진에 계시는 림정자은사님, 북경에 계시는 우복순은사님도 찾아 문안하였습니다.

저도 이젠 80고개를 바라보는 로인이지만 소학시절 은사님들의 은혜를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것은 깊고 깊은 사연이 담겨져있기 때문입니다.

일송정 별장에 모신 전체 은사님들과 함께

은사님들은 진흙탕 속에서 몸부림치던 한 인간을 인민교사의 고상한 덕성으로 포옹해주고 손잡아 이끌어주어 나라의 어엿한 인민교사로 성장하게끔 떠받들어주었으니 그 은혜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여섯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남자 삼형제가 홀아버지의 슬하에서 가난하고 쪼들린 생활형편이라 배불리 먹을 수 도 없었습니다. 또한 삶의 고갈 속에서 들말처럼 마구 날뛰였습니다.

그 때 저는 룡정시 3.1소학교 지금의 룡정소학교에 다녔습니다.

소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저는 공부는 뒤전이고 수업시간이면 장난만 쳤고 친구들과 싸우기도 하면서 몹시 애만 먹였습니다. 저는 문제거리 학생으로 소문났고 학습성적이 낮아 락제까지 하였습니다.

교원들은 제가 다니는 학급 담임을 맡기 싫어했습니다. 그 때 김하연 총각선생님께서 저의 학급 담임을 새로 맡게 되였습니다.

왼쪽으로부터 총보도원 강두관은사, 김하연 학급담임, 필자, 작사작곡한 리규섭은사, 안무를 한 김영자은사.

저의 가정형편을 알게 된 김하연선생님은 애꾸러기였고 밉상이였던 저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습니다. 선생님은 옷도 사주고 학잡비도 대주고 학용품까지 대주면서 저의 생활의 구석구석을 일일이 돌보아주었으며 자주 저와 속심을 나누면서 저의 마음속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저의 얼어붙었던 가슴이 녹기 시작했고 담임선생님을 믿고 따르게 되였으며 란잡했던 생활이 질서가 잡히게 되였으며 학습성적도 상승선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꼭 공부를 잘하여 담임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리라 굳게 다짐했습니다.

특히 저를 크게 감동시키고 눈물 흘리게 한 사연은 담임선생님이 결혼식 날 저를 큰상 받는 신부인 사모님의 옆자리에 앉혀놓은 것입니다. 새 사모님은 저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장차 큰사람이 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때에야 저는 마음속 깊이 깨달았습니다. 아- 담임선생님은 저를 새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진심으로 노력하는구나 하는 것을!

저는 붉어진 눈시울로 과거를 뉘우치면서 용기와 새 힘이 솟구쳐올랐습니다. 하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담임선생님의 가르침 대로 멋지게 해나가기로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때로부터 저의 학습성적은 몰라보게 제고되였고 생활도 완전히 질서 잡히게 되였습니다.

저는 4학년에 진급해서 학급의 생활위원으로부터 학급 중대장으로 선거되였으며 5학년에 진급한 후에는 학교의 총대대장까지 맡게 되였습니다. 저는 공부도 잘하고 사업도 잘하는 우수학생으로 소문 났습니다.

그 때 저의 학급담임 김하연선생님이 후진생을 전변시킨 선진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렸습니다.

저의 사적이 알려지자 많은 은사님들께서 저의 생활에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었습니다.

교장 주영찬은사 그리고 엿을 리현숙은사와 함께

주영찬 교장선생님께서는 제가 루추한 점심밥을 꺼내놓기 부끄러워 바위 뒤에 숨어서 점심을 먹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짜고짜 저의 밥그릇을 거두어가지고는 손목을 잡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이밥에 닭알, 고기반찬을 해서 식구들과 함께 푸짐히 먹도록 하였습니다.

이 한끼의 밥은 저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정을 남겨주었습니다. 하여 비암산 별장 모임 때 딸의 부축을 받으면서 오신 교장선생님을 은사와의 뜨거운 정으로 포옹하였고 저의 마음을 담은 봉투를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따님한테 부탁했습니다.

제가 5학년 때 새로 오신 리규섭 교장선생님께서는 저의 사적을 듣고 친히 저를 노래한 가사를 쓰고 작곡까지 하였고 김영자 무용선생님은 안무를 해가지고 전체 사생들 앞에서 공연까지 하고 저에게 꽃다발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때 그 가슴 울리던 노래 영원히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지중찬 동무는 훌륭한 동무 / 노래 노래 불러서 길이 전하자 / 노래 노래 불러서 길이 전하자”

그리고 대대 총보도원 강두관은사님도 저를 여러모로 많이 교육하였는데 그 사적이 〈선진인물과 선진사적을 따라배우자〉라는 제목으로 된 잡지에까지 발표되였습니다.

또한 마을에서 사시는 리현숙은사님은 간염에 걸린 저에게 옥수수엿을 달여다 주어 병이 낫게 하였습니다.

이외에도 김연구, 김영춘, 최경식, 황영윤 등 많은 은사님들께서 저에게 힘 내라는 고무와 격려를 해주었으며 소학교를 졸업할 때 저의 싸인 책에 보귀한 부탁의 글발을 남겨주셔서 저의 성장의 길에서 가로등의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치치할시 모범공청단원으로

저는 소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의 경제난으로 치치할에 계시는 삼촌 집에 가서 초중과 고중을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도 소학교 은사님들의 은정에 보답하기 위하여 분투한 결과 치치할시 모범공청단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습니다.

고중을 졸업한 후 강두관 총보도원의 추천으로 모교인 룡정소학교에 돌아와서 교편을 잡게 되였고 그 후 안민소학교에 전근되였다가 나중에 룡정시제5중학교에서 퇴직하게 되였습니다.

그 당시 ‘연변사회주의적극분자’, ‘시우수교원’, ‘시교육계통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고 퇴직 후에도 ‘우수퇴직교원’, ‘우수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주임’ 등 수차 표창을 받았습니다.

한번 은사는 영원한 은사입니다. 저는 가슴 깊이 느낍니다.

어제날 은사님들의 따뜻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저의 오늘이 있을 수 없고 저는 해빛도 보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인생을 살았을 것이라는 것을…

저는 은사님들의 은정에 보답하는 아름다운 추억들을 계속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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