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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23]조선의용군 문명철과 그의 묘소 (1)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7-10 15:21:36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 렬사기념비(23)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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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문명철   /자료사진

광서쫭족자치구 계림시 중산중로(中山中路) 96번지는 ‘팔로군 계림판사처’로 되여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다. 지난 6월 한달 간 계림에 머무르면서 수차 팔로군 계림판사처를 찾게 되였다. 그 때마다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은 계림에서 활동상을 보인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战地服务团) 단원이고 공산당원인 윤봉(尹峰)녀성이다.

왜서 머나먼 남녘땅 계림에서 조선인도 아닌 중국녀성에 관심을 돌리게 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먼저 윤봉녀성을 알아야 하니 윤봉은 조선의용대 제1지대에서 활동하는 문명철 분대장의 전우였다. 이 중국 전우가 먼 후날 이 땅의 우리 조선족들이 모르는 문명철의 묘소를 찾아내면서 본 특별기획을 마감짓는 련재글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되였으니 실로 세상은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고 할가.

윤봉은 본명이 윤복구(尹卜驹)로서 호북 무한 사람이다. 1937년 ‘7.7’ 로구교사변이 폭발하면서 일본침략자들이 중국땅을 짓밟을 때 윤봉은 한창나이의 15살 소녀. 학업에 몰두하던 이 소녀는 일본침략자들에 대한 증오의 한마음으로 항일구국이란 이 거창한 홍류속에 뛰여들었다. 그는 성해가영대(星海歌咏队)에 참가하여 선성해(冼星海)가 작곡한 <솜옷을 만들다>(做棉衣) 노래를 부르면서 전방에서 추위에 떠는 항일전사들과 류리걸식하는 난민들을 위해 의연금과 옷들을 모금하고 모으는 일로 바삐 보냈다.

 1938년 봄 윤봉이 완남에서 찍은 사진  /자료사진

그러던 1938년 3월의 어느 날 상해에서 무어진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이 무한에 이르러 녀단원들을 모집하면서 뜻 있고 유망한 청년들이 전선에 나가 싸움터의 봉사를 할 것을 수요하고 있었다.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은 1937년 8월 13일, 일본침략군이 상해에 주둔한 중국군에 대해 대거 진공을 개시하면서 잇달아 생겨난 항일단체로서 단장은 사천 성도 사람이고 황포군관학교 제6기 녀성대 출신인 호란휴(胡兰畦)였다. 호란휴는 또 북벌전쟁에 참가하고 국민당중앙 부녀부에서 사업한 적 있는 중공 당원이고 저명한 부녀수령 하향응(何香凝)의 비서로서 하향응이 발기 조직한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의 단장으로 나서게 되였다.

이런 단장에 이런 항일단체에서 단원을 모집하니 윤복구로 불리는 윤봉은 언니 윤복견(尹卜甄)의 지지와 련락으로 결연히 학업을 포기하고 신입단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언니 윤복견은 1917년 생이고 윤봉보다 6살 이상으로서 1937년 겨울에 이미 호북성녀자사범학교 중공 지하당 지부서기로 활동하고 있었다. 무한 한구에서의 며칠 간의 훈련을 거쳐 윤봉은 전지복무단의 자매들과 함께 동으로 달리는 렬차에 올라 무한을 떠나게 되였다.

그 후 전지복무단은 안휘 섭현(歙县)의 40호 병참 림시상병병원(伤兵医院)에서, 강서 구강의 싸움터에서 부상병들의 약을 갈아붙이기, 음식물 먹이기, 신문 읽어주기, 피 묻은 옷 씻기, 집에 편지 써주기 등 봉사일과 위문공연, 《전고》(战鼓) 편집 등 일로 바삐 보냈다. 그 속에서 표현이 두드러져 윤봉은 1938년 10월에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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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에서 ‘전장극사’(战场剧社)를 조직하자 윤봉은 전장극사의 배우로 활동하였다. 전장극사에서는 선후로 <난민고>(难民苦), <동북일각>(东北一角), <동양병을 사로잡다>(活捉东洋兵), <녀유격대원>, <황하강변>, <최후의 수류탄 하나>(最后一颗手榴弹) 등 활보극(活报剧)이나 단막연극을 무대화하여 중국군들의 싸우는 전선에서 공연하여 항일군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1940년 초에 윤봉 소속 전지복무단은 강서의 고안(高安), 상고(上高) 일대에서 국민당 19로군에 소속된 조선의용대 신년위문공연에 나섰다. 그 때 공연한 단막연극 가운데는 중앙혁명근거지 시절 서금에서 활동한 적이 있는 표현예술가 석련성(石联星)의 연출로 된 <최후의 수류탄 하나>가 있었다. 연극의 주인공은 영웅패장. 어느 한차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영웅패장이 거느린 패 전사들은 거의가 희생되고 패장은 적들의 포위에 빠지면서 포위를 헤칠 수가 없었다. 영웅패장은 결연히 수중의 최후 하나의 수류탄으로 적들 속에 뛰여들어 비장한 최후를 마친다. 이 영웅패장의 역을 윤봉이 맡아나섰다.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머무르던 계림시 동령가 1번지. 동령가 1번지는 지금의 계림시 칠성(七星)공원 입구 내 화교(花桥)다리 동쪽가로서 사진 속 다리 오른쪽, 강물 아래 쪽 숲속이 1번지 원 구역이다.   /2017년 6월 현지촬영

어느 날 공연이 끝나자 조선의용대 제1지대 3대 대장 김세광이 부분적 전사들과 같이 무대 뒤에 나타나 윤봉의 영웅패장 표현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 속에는 작달막한 키에 딱 바라지게 강퍅한 문명철이도 섞이였다. 문명철은 윤봉과 문명철이라 부른다고 인사하면서 류창한 중국말로 “당신들의 공연을 보고 크게 감동되였습니다.”라고 말을 건네였다. 윤봉은 자기는 윤복구라고 부른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중국에 와서 중국인민의 항전을 도와나서니 우리가 조선의용대 동지들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아니, 아니지요. 윤동지가 맡아나선 영웅패장은 우리가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입니다. 나역시 영웅패장과 같은 경우라면 용감하게 희생될지언정 절대 적들의 포로가 되지 않겠습니다.”

윤봉의 말에 대답한 문명철의 어조는 그렇듯 힘있고 견정하게 들렸다. 이는 중국녀성 윤봉과 조선인 문명철의 첫 만남이였으니 문명철을 비롯한 조선의용대 동지들의 열성적인 모습은 윤봉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해 1940년 여름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는 대적전선에서 돌아오면서 신유현(新喻县)을 거치게 되였다. 신유현은 지금의 강서성 신여시(新余市)로 알려진다. 윤봉 소속 전지복무단이 마침 신유현에서 활동함을 알게 된 문명철 등은 특별히 전지복무단 류숙지를 찾아 윤봉을 만나주었다. 문명철과 윤봉의 만남은 그리도 자연스럽고 열성으로 넘치였다. 서로 이국의 남녀라지만 오빠와 녀동생 사이처럼 친근하고 허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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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은 국민당 제19로군에 소속되여 활동하였지만 그들 중의 허다한 녀성들이 우리 신사군의 지도를 받는 중공 지하당지부 당원들이였다. 한데서 이들의 전선복무활동은 언제나 뛰여난 열성으로 넘치였다. 이는 소극항전과 적극반공에 열을 올린 국민당내 반공 완고파들의 눈에 가시로 되여 전선복무단은 도처에서 감시를 받고 제한을 받아야 했다. 이는 불길한 징조로서 전지복무단의 중공 당원과 적극분자들은 국민당 완고파의 감시에서 벗어나야 하였다.

그 때 전지복무단 지하당지부에는 16명 공산당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해 10월 하순 경에 지하당지부에서는 당원동지들과 진보적 청년 도합 20여명을 이끌고 무사히 국민당 제19로군을 벗어났다. 이는 실제상 상해로동부녀전지복무단의 해산을 의미하는바 국민당의 감시에서 벗어난 전지복무단의 대부분 동지들은 계림으로 전이하여 팔로군 판사처의 지시를 기다리게 되였다. 본문의 서두에서 언급한 윤봉의 계림 등장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 시절의 윤봉은 한창 페결핵으로 시달릴 때여서 늘 피를 토하며 신체가 허약하여 말이 아니였다. 전지복무단 당지부에서는 소속 동지들 앞서 윤봉이를 병치료의 명의로 먼저 광서 계림에 보냈기에 윤봉은 계림에서 약 두달이란 시간을 보내게 되였다.

1940년 8월 윤봉이 언니 윤복견과 계림에서 만나

윤봉이가 계림에 이르자 마침 녀성혁명가인 그의 언니 윤복견이 우리 당이 지도하는 계림의 ‘신안학교’(新安学校)에서 교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윤봉이는 언니와 함께 류숙하면서 치료하는 한편 팔로군 계림판사처의 배치를 기다리게 되였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문명철 소속 조선의용대도 의용대 총대부가 자리잡은 계림으로 전이하였다.

1938년 12월 초에 조선의용대 총대부는 계림에 나타난 후 선후로 계림 동령가 1번지(东灵街1号)와 시가원 53번지(施家园53号)에 자리잡고 광서락군사(广西乐群社), 신화대극장(新华大戏院), 계림중학교 등지를 무대로 여러가지 형식의 항일활동을 펼쳤다. 그중 동령가 1번지는 지금의 계림시 칠성(七星)공원 입구 내 화교(花桥)다리 동쪽가를 가리키고 시가원 53번지는 칠성공원의 측문으로 되는 남문에서 시가원로(施家园路)를 따라 약 300메터 되는 곳을 가리킨다.

계림에 머무르는 기간 필자는 동령가 1번지 등 조선의용대 관련 유적지를 모두 찾아 사진을 찍고 동영상도 찍었다. 문명철은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자리한 동령가 1번지와 시가원 53번지, 윤봉의 류숙지, 팔로군 계림판사처를 자주 드나들면서 윤봉과 그의 병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속에서 두달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윤봉은 조선인 문명철에 대하여 보다 깊은 리해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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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철의 본명은 김일곤(金逸坤, 1914년 생)이고 고향은 전라남도 담양군(潭阳郡)으로 알려진다. 어릴 때 살림이 째지게 어려웠기에 문명철은 한 방직공장에 들어가 3년 동안 아동공으로 죽기내기로 일하여야 하였다. 후에 백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당지 직업학교-중학교 공부를 무난히 마칠 수가 있었다. 1929년 11월에 문명철은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하였고 1933년 봄에는 중국 행에 올라 그 해 9월 김원봉(金元凤)의 의렬단(义烈团)에서 꾸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 생으로 입학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국민당정부의 지원으로 꾸리는 학교로서 이 학교에서 사용한 가명이 문명철이였다.

1934년 2월에 문명철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중퇴하고 상해림시정부의 김구(金九)가 운영하는 중국 중앙륙군군관학교 락양분교(洛阳分校) 한인특별반으로 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다. 그 때 조선인들에 대한 일제의 추적이 극심하였기에 문명철은 한인특별반에서 가명을 한광(韩光)으로 바꾸어버렸다.

조선의용대 총대부가 후에 머무르던 계림시 시가원 53번지. 시가원 1번지는 칠성공원의 측문으로 되는 남문에서 시가원로(施家园路)를 따라 약 300메터 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2017년 6월 현지촬영

한인특별반을 졸업한 후 문명철은 1938년 10월 무한 한구에서 설립된 조선의용대 첫패의 대원으로 되였다. 그 후 소속 조선의용대 제1지대를 따라 국민당군과 함께 호남, 호북, 광서, 운남 등지에서 일본군과의 싸움에 나섰다. 1939년 봄에는 호북성 통성(通城)-숭양(崇阳) 도로에서 혼자서 일본군의 땅크 두대나 까부시여 전구(战区)의 훈장을 받은 공신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출신의 문명철은 성격이 강직하고 고집이 세기로 이름이 났으나 중국 녀성 윤봉이 앞에서는 고분고분하기로 또 이름이 났다.

드디여 리극농(李克农)을 처장으로 하는 팔로군 계림판사처의 배치가 알려졌다. 윤봉과 임수당(任秀堂), 호서영(胡瑞英), 진란상(陈兰湘) 등 4명 당원은 연안에 가기로 하고 12명 당원과 10명의 진보적 청년들은 완남(皖南)의 신사군으로 가기로 하였다. 팔로군 계림판사처는 1938년 11월 중순에 중공중앙에서 중앙남방국 비서장 리극농을 계림에 파견하여 세우게 한 판사처로서 전체 면적 1,300여평방메터에 건축면적이 800여평방메터에 달하는 토목구조의 건축물이다. 원래는 ‘만상조방’(万祥糟坊)으로 알려지다가 중공 남방국에서 빌리게 되면서 팔로군 계림판사처로 쓰이게 되였다.

2017년 7월 5일 위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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