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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21]상강전역기념관서 떠오른 무정장군(2)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6-26 13:16:09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21)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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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 흥안현성 ‘상강전역기념관’에서 무정장군 전시사진을 찾아냈다면 윤탕회 관장으로부터 ‘홍군장정 상강전역돌파 기념 공원’ 안내서를 제공받은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 하겠다. 양림평전, 무정평전을 집필, 출판하면서 전문가 못지 않게 상강전역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관련 자료를 수집하면서 폭넓게 연구하였다지만 필경은 자료연구였지 현지 물정에 대해서는 깜깜이였다. 그런 필자에게 상강전역 안내서는 가물에 단비처럼 더없이 귀중한 보물이였다. 안내서에는 상강전역을 내용으로 하는 홍색관광지가 자상히 밝혀져 있었다.

2017년 6월 8일 오전 상강전역기념관을 답사하고 현성의 한 음식점에서 대강 식사한 후 일가 셋은 택시 한대를 잡았다. 워낙 이곳 현성의 상강전역기념관을 답사하고 그 날로 계림으로 돌아서기로 한 걸음이여서 아무 준비도 없었지만 오후 시간도 있고 하니 그대로 돌아설 수가 없었다. 택시운전사와 상강전역 안내서를 내밀면서 오후 시간대에 광화포(光华铺)저격전과 신우(新圩)저격전 등 주요한 곳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우리 겨레 무정, 양림 발자취 어린 력사의 고장이여서 꼬옥 가보아야 했다. 다행히 운전사는 40대 정도라지만 언젠가 상강전역 참가자인 어느 장군의 후손들을 모시고 다닌 적이 있어서 알겠다며 선뜻 대답을 주었다. 다음날로 미루기로 한 상강전역 현지답사는 이같이 즉각 현실로 펼쳐졌다.

흥안현 계수진 광화포 구간 큰길가에 일떠선 광화포저격전 옛터비

오후 상강전역 현지답사길에서 처음 찾은 곳은 계수저격전으로도 불리우는 광화포저격전 현지였다. 광화포저격전은 각산포(脚山铺)저격전과 신우저격전과 더불어 상강전역의 3대 저격전의 하나로서 흥안현성에서 북으로 15키로메터 떨어진 상강 서안(西岸)과 성도(省道) 303 큰길가에 위치하고 있었다. 1934년 11월 29일, 중앙홍군의 홍3군단 제4사는 명령을 받고 광화포에 대기하다가 계림 방향에서 달려드는 우세한 계림계군벌군대와 2박3일이나 가렬처절한 혈전을 벌리면서 4사 부대만 400여명, 홍3군단 전체 1,000여명의 희생자를 낸 피눈물의 력사현지였다. 눈물과 감동 없이는 마주설 수 없는, 계림계군벌군대의 진공을 물리치면서 우리 중앙종대와 홍군후속부대의 계수에서의 안전한 도강을 담보하기 위한 력사의 현지였다.

흥안현 계수진 광화포 구간 큰길가에 위치한 광화포저격전 렬사묘

우리 부부는 먼저 북행 왼쪽 큰길가 낮다란 산기슭에 자리한 ‘장정상강지전 광화포저격전 홍군렬사지묘’(长征湘江之战光华铺阻击战红军烈士之墓)를 찾았다. 홍군렬사묘에는 홍3군단 제4사 10퇀의 전후임 퇀장인 심술청(深述清)과 두종미(杜宗美)를 비롯한 18명 홍군렬사가 묻히였다고 한다. 기실 이들 18명 홍군렬사들은 광화포저격전에서 희생된 무수한 홍군렬사들 중의 극히 적은 일부분이였다. 홍군렬사묘 좌우켠 석비에는 홍군장령들인 양성무(杨成武), 장진(张震), 장애평(张爱萍) 등 장군들의 제사가 새겨져 이곳 렬사묘에 범상치 않은 이야기가 깃들어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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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군렬사묘 아래켠에는 ‘상강전역 광화포저격전 안내’ 석비가 서있고 홍군렬사묘 구간 큰길 오른쪽가에는 대형 ‘광화포저격전 옛터’비가 붉은기 물결을 이루며 길다랗게 펼쳐져 있었다. 관련 자료를 보면 2012년 8월 10일, 흥안현에서는 수백명 항전로병들과 가족, 사회 각계 인사들이 참가한 속에 이곳에 모여 ‘광화포저격전 옛터’ 제막의식을 가지였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의 일이였다. 이날 영상을 보면 붉은 오각별 박힌 홍군모자에 홍군복장 차림의 수십명 학생대오가 유난히도 활약적이였다.

택시운전사는 이곳 모두가 광화포저격전 현지라면서 광화포저격전 홍3군단 지휘부는 이곳에서 남으로 5키로메터 되는 계수진(界首镇) 상강가에 자리하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로 가보자고 하니 택시는 잠간사이에 우리를 홍3군단 지휘부 옛터로 안내하였다. 어딜 가나 신속한 이동이여서 필자는 택시를 무척 선호하는 편이다. 표면으로 보아 택시놀이는 엄청 랑비 같지만 며칠 뛰여야 할 현지답사를 반날이나 하루 사이면 와닥닥 해제끼니 기실은 경제적이였다.

6월 8일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택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셋을 홍3군단 지휘부로 실어다 주었으니 계수진 옛 거리 어구 상강가에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되는 상강전역 옛터 ‘홍군당’(红军堂) 안내비가 선참 맞아주고 있었다. 다음은 철란간을 두른 입구 내 홍군지휘부 옛터 사당-삼관당(三官堂)이 또 우릴 불렀으니 마음은 훨훨 상강전역 그 나날에로 나래친다.

계수진 상강가 홍군지휘부 옛 사당

이곳, 홍군당으로 알려지는 이곳이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를 중심으로 하는 홍군지휘부 자리였다.

이곳, 홍군당으로 알려지는 이곳이 당년 당중앙과 중앙군위 수장들을 모신 중앙종대가 상강을 돌파한 력사적인 자리였다.

그러면 또 어떤가. 계수 이곳 상강가는 중앙종대의 홍군장령들인 우리 겨레 무정과 양림이 중앙종대를 옹위하여 도강한 력사적인 자리가 아니던가. 이곳은 중앙종대의 상강돌파를 위한 광화포저격전 홍군지휘부 자리여서 팽덕회 군단장이 직접 광화포저격전을 지휘하는 안전지대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니였다.

중앙홍군의 대오에서 이곳 계수나루터에 선참 도착한 대오는 홍1군단 제2사 4퇀 부대였다. 1934년 11월 27일 오후, 이들 부대가 명령을 받고 전주 경내의 석당(石塘)을 떠나 강행군으로 계수나루터에 이르니 계림군의 저애가 없었기에 순조로이 계수나루터를 점령하고 60리 상강 량안을 통제할 수가 있었다. 그때 숱한 짐과 짐군들을 거느린 연고로 행동이 굼뜰 수 밖에 없은 중앙종대 제1종대와 제2종대는 계암(桂岸)지구에서 산간소로를 따라 행동하다 보니 그로부터 4일 후에야 상강가에 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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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홍3군단은 5리 밖 광화포에 진지를 구축하였다지만 11월 30일 이날 자정이 지나 계림군이 홍3군단의 배후를 돌아 계수나루터를 탈환하려고 서둘렀다. 광화포를 지켜선 홍3군단 4사 10퇀에서 적들의 낌새를 알아채고 산하 3영 영장 장진이 지휘하는 대오를 보내 적들을 막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3영 장병들이 결사적으로 싸웠다지만 부분 적들은 종내 홍군방선을 돌파하여 계수나루터를 점령하고 말았다.

이같이 위기일발의 관두에 홍10퇀 퇀장 심술청은 친히 제1영과 제2영을 지휘하여 계수나루터 탈환 작전을 벌리였다. 수차의 치렬한 전투 끝에 계수나루터는 다시 홍군의 수중으로 돌아왔지만 격전 가운데서 심술청 퇀장과 후임 대리퇀장으로 나선 두종미 등이 희생된 결과를 가져왔다.

관련 연구자료에 따르면 상강전역 후 중앙종대 제1종대 제4제대 즉 군위간부퇀 제2임 참모장으로 나선 양림도 이곳 계수나루터 도강작전에서 뛰여난 업적을 쌓은 것으로 알려진다.

계수진 상강가 홍군지휘부 내 정면 모습

장정 가운데서 군위간부퇀은 ‘공관’(公馆) 또는 ‘땅크’(坦克)라는 대호를 가지고 있었다. 전 퇀은 모두 청일색의 공산당원에 특수장비로 무장한, 1,000여명의 대오를 가진 특수전투단위로서 당중앙과 중앙군위의 절대적인 안전을 보호하는 사명을 짊어졌다. 장정 초기에 모택동은 늘 군위간부퇀과 같이 행동하였기에 양림 등은 늘 모택동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런 군위간부퇀이 계수 부근 상강가에 이르렀을 때는 11월 29일부터 상강 량안의 국민당계렬 계림군이 우세한 병력으로 홍군대오에 대한 진공을 들이대면서 적기가 상강에 부설한 홍군부교를 련속 폭격하였기에 군위간부퇀도 홍3군단 등 홍군대오와 더불어 계수나루터 결사적인 사수에 뛰여들었다. 양림은 어떠했던가. 황포군관학교동창회에서 꾸리는 《황포잡지》 제1기에는 〈장정중의 조선적 홍군장령 필사제〉란 한편의 양림전기가 실려있는데 장정 초기의 양림, 더우기 국민당군의 제4봉쇄선-상강전역을 돌파할 때의 양림을 소개하고 있어 무척이나 주의를 끈다.

장정 초기 홍군간부퇀은 홍군총부로 구성된 제1야전종대의 지휘를 받았다. 국민당군대의 봉쇄선, 더우기 제4봉쇄선 때 필사제는 퇀장 진갱, 정치위원 송임궁을 협조하여 간부퇀의 영용한 분전을 지휘하여 경위와 엄호 과업을 비교적 잘 완수하였다.

양림 소속 군위간부퇀이 상강전역에 뛰여들었다는 자료근거로 되고 있다. 다른 여러편의 자료들에서는 양림이 앞장에서 총칼과 수류탄으로 적들과 결사적인 박투를 벌리였다면서 간부퇀은 여러날 격전 끝에 적군의 수차례 진공을 물리치며 중공중앙과 중앙군위 지도기관의 안전한 상강도하를 엄호하였다고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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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8일 이날 오후 한때, 우리 일가 셋은 상강전역의 3대 저격전중 가장 특수한 저격전으로 되는 계수나루터에 서있었다. 중앙종대가 도강한 계수나루터 자리여서 우린 이곳에서 재건된 삼관당 홍군지휘부를 보았고 그제날 홍1군단 정치위원인 섭영진의 제사로 된 ‘홍군장정 상강돌파’(红军长征突破湘江)란 제사비를 보았다. 지휘부 실내에는 중국로농홍군의 중심기발과 함께 좌우켠에 작은 기발 두폭이 드리운 속에 지휘부를 상징하는 책걸상이 놓이고 보다 떨어진 좌우켠 벽에는 당년 중앙홍군이 쓰던 총칼 복제품과 초모자, 풀비옷 복제품들이 전시되여 숭엄한 기분으로 이끌었다.

력사를 보면 1934년 11월 25일부터 12월 1일까지 광서 땅에 나타난 중앙홍군은 전주(全州) 이남의 상강 동안(湘江东岸)에서 적들과의 피어린 혈전에 나섰다. 그것도 절대적으로 우세한 근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이니 그 전역의 어려움은 일구난설이다.

우리 홍군장병들은 적들과 생사결단을 벌리며 마침내 적들의 삼엄한 제4봉쇄선을 돌파하였으나 그 대가는 참중이란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다. 상강을 강행도하하고 보니 중앙홍군과 군위 2개 종대는 장정 출발 시의 8.6만여명으로부터 3만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제4봉쇄선인 상강전역에서의 손실만도 3만 8000여명. 중앙종대 제1종대와 군위 제2종대 손실도 만만치가 않았다. 양림-무정 소속 제1종대만 보아도 장정 출발 시의 4600여명으로부터 2000여명으로 줄었으니 절반 정도가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섭영진의 제사로 된 상강가 홍군장정 상강돌파 석비에서  /이상 사진 2017년 6월 8일 현지촬영

상강전역, 이렇듯 상강전역은 그때까지 당과 홍군을 지배한 박고(博古) 등 ‘좌’경 지도자들의 도망주의(逃跳主义)로선이 조성한 엄중한 악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중앙홍군의 상강전역은 장개석이 중앙홍군을 상강 이동에서 섬멸하려던 망녕된 기도를 짓부시고 전략상의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도 없다. 상강전역의 참중한 손실은 또 ‘좌’경로선의 엄중한 위해를 철저히 폭로하여 중공중앙과 중앙군위, 광범한 홍군장병들로 하여금 제5차 반‘포위토벌’ 이래의 군사로선과 군사지휘에 대해 심각한 반성을 하게 하면서 모택동의 등장을 가속화하는 위대한 전환의 계기로 력사에 남게 되였다.

잇달아 찾은 광화포저격전 현지와 계수 상강가 지휘부 옛터, 중앙종대의 상강 도하 계수나루터는 홍군장정길 상강전역을 눈으로, 마음으로 깊이깊이 리해하는 현지학습장이였다. 상강전역에서의 무정은 실로 양림과 더불어 불후의 위훈을 세운 우리 겨레 홍군장령으로 마음에 와닿는다.

2017년 6월 12일 광서 계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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