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아름다운 추억 20]청춘은 저 산너머에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5-19 14:16:27 ] 클릭: [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0)

◇강순화(연길)

연변대학조선한국학연구중심에서 정년퇴직하면서 기념사진을 남긴 필자

젊어서는 희망에 살고 늙어서는 추억에 산다더니 수십년 전 저 두만강 기슭에서의 그 하많은 에피소드들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가슴을 울린다. 60-70년대의 중학생이였다면 거의다 겪어온 일이겠지만 새파란 청춘을 고스란히 바쳐온 저 광활한 대지에 아직도 사랑과 련민이 남아서일가? 아니면 그 시절 얼키고 설키였던 아픔과 방황, 정열과 랑만 때문일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색바래지고 잊혀지는 그 흑백의 인생드라마들이 오늘 따라 류달리 찬연한 칼라로 바뀌여 주마등마냥 내 눈앞을 스친다.

무지개 같은 희망에만 부풀어있던 열아홉살 고중생이 ‘지식청년’이란 신식모자를 덮어쓰고 일곱년륜의 춘하추동을 저 산너머 시골땅에서 ‘재교육’을 받아왔으니 말이다. 소를 몰고 두엄을 끄고 모를 심고 기음을 매던 그 고달픈 기억들은 이순을 넘어선 오늘까지도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다. 더우기 그 향촌학교에서의 교직생활, 시골애들과 뛰놀며 글을 가르치고 노래를 배워주던 그 젊음의 추억은 정녕 잊지 못할 청춘의 멜로디였다.

1968년 가을,《인민일보》 첫 면에 〈지식청년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설이 대문짝 만하게 실렸다. 우리 66, 67, 68년급 초중, 고중 졸업생들은 모두다 광활한 천지-농촌으로 재교육 받으러 가야 했다. 붉은기가 휘날리고 북소리, 꽹과리소리가 요란한 환송소리 속에서 우리는 진붉은 어록책을 손에 들고 이불짐을 등에 멘 채 커다란 해방패 트럭에 빼곡이 실려 아무런 주저도, 두려움도 없이 용감하게 도시를 떠났다. 얼마를 살고 돌아올지 말지도 모르는 삶의 불모지를 향해 근심어린 부모님들의 얼굴을 뒤에 남긴 채 우리는 달리는 트럭에 몸을 맡겼다.

룡정을 벗어나 남쪽으로 100여리 길, 높고 가파른 계곡을 꿰질러 그리 넓지 않은 흙길로 뽀얗게 먼지를 일구며 달리고 달려 당도한 곳은 바로 변강 산촌 백금향이였다. 또다시 두만강 기슭을 따라 20여리 길을 더 내려가서야 우리의 종착지인 심포마을에 도착하였다. 열다섯호의 인가들이 하얀 벽의 한옥 차림으로 산비탈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었는데 마을 동쪽 언덕 우에 번듯이 지어놓은 ‘집체호’ 벽돌집은 그야말로 닭무리 속의 학과도 같았다.

김대장과 마을 사원들의 열정적인 안내로 우리는 행장을 풀어놓고는 우선 서넛씩 사원들의 집에 나누어 가서 저녁을 먹었다. 인가가 드문 그 시골에서는 무슨 경사나 난 듯이 집집이 두부를 앗고 시루떡을 쪄서 도시에서 온 ‘지식청년’을 환대하였다. 반나절이나 트럭에서 부대낀 우리는 처음으로 농촌의 순두부며 떡이며 구수한 된장국을 마주하게 되자 너나없이 게 눈 감추듯 퍼먹어댔다. 참으로 진수성찬이 따로 없었다.

저녁을 먹고 밖에 나가 보니 마을 앞에는 푸르른 논밭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아담한 산촌학교가 보였다. 큰길 너머로는 검푸른 두만강이 유유히 흐르고 강건너로는 이웃나라 조선의 인가들이 어슴푸레 보이고 있어 참으로 신기한 변강 산촌이였다. 도시의 온갖 소음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란 우리들은 시골마을 산등성이에 조용히 불타오르는 저녁노을이며 앞마당의 각가지 남새, 그리고 뒤산의 울긋불긋한 과수나무들이 그렇게 신비롭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열네명의 애숭이 또래들은 이렇게 ‘집체호’라는 특이한 대가정의 주인이 되여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새 환경의 새 기분도 잠간, 농촌의 생활과 로동이란 그렇게 랑만적인 것만은 아니였다.

‘일년 농사는 봄에 달렸다’ 하여 아직 겨울철 찬 기운이 감도는 이른봄부터 밭에 나서면 음력설을 쇨 때까지 사시장철 들판에서 헤매야 했다. 녀자애들이 자랑해야 할 예쁜 얼굴이란 찾아볼 수 없었고 꽃치마 한번 입어볼 겨를이 없었다. 무릎을 기운 광목바지와 초록색 군복 웃옷에 약진패 머리수건을 접어쓰면 그것이 류행이고 시체멋이였다. 간고소박이 미덕이니 색붙이나 꽃무늬 옷들은 자본주의 냄새가 난다고 엄금했으니 말이다.

1975년 백금공사 평정 3대에서 귀성(回城)하면서 전체 사원들과 남긴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 ‘선진생산대 축기’를 안은 이가 필자.

농촌이란 새 천지에 당도하여 제일 처음으로 닥친 일은 가을걷이와 싣걱질이였다. 서투른 솜씨로 낫에 손을 베여가며 벼가을을 끝내자 또 논밭에 무져놓은 벼단들을 하루바삐 탈곡 장에 실어들여야 했다. 도시에서는 보지도 못했던 소수레를 몰아야 하는데 아무리 겁 모르고 덤벼든다 하여도 햇내기들이라 그 천근 무게의 육중한 소발에 밟히여 아우성 치며 쩔뚝거리기가 일쑤였고 벼단을 쌓아실은 수레를 논뚝에서 번져버리는 등 실수투성이였다.

가을싣걱질이 끝나면 또 탈곡을 해야 하는데 그때 어디 지금과 같은 현대화 기계가 있었는가? 생산대에 딱 두대 밖에 없는 반자동 탈곡기로 코구멍이 까맣게 되여가지고 며칠씩 밤도와 벼를 탈곡해야 했다. 싸늘한 늦가을의 탈곡장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할라 치면 판들판들하던 깜장눈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벼낟가리에 처박히기가 십상이였다. 음력설 후부터는 또 새해 농사에 쓸 비료를 장만해야 하는데 꽁꽁 얼어붙은 소똥, 돼지똥들을 꺼서는 밭에 실어내야 했다. 곡괭이질이 서툰 우리는 온 얼굴에 두엄을 들쓰기가 일쑤였고 가끔은 입안에까지 튀겨들어가 저마다 고양이 락태 상이 되군 했다.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래도 한여름 불볕에서 조이밭 두벌기음을 매는 일이였다. 두만강 기슭의 밭고랑들은 어찌나 사래가 긴지 아예 점심 도시락을 허리춤에 차고 일을 시작해야 했다. 밭고랑 중간까지 매고 나면 어느덧 해가 구중천에 떠올라 그 자리에서 퍼더버리고 앉아 점심을 먹고 잠간 허리쉼을 하고는 또다시 다그쳐 김을 매서야 저녁해를 등지고 돌아올 수가 애었다. 애들의 얼굴은 검실검실 타들었고 야들야들한 손바닥에는 줄줄이 장알들이 박혔다. 허나 ‘모택동사상’으로 무장한 당년의 ‘지식청년’들은 누구 하나 뺑소니를 치지 않았다. 강철은 용광로에서 단련된다더니 우리들이야말로 광활한 천지의 훨훨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서 일하고 배우며 튼튼한 실농군으로 되여갔다.

70년대 초인 그때만 해도 도시는 배급제였지만 농촌에 오니 그래도 밥만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부식이란 뒤산의 돌배와 퍼런 복숭아 뿐인지라 그저 하루 세끼 밥이 죽어났다. 1인 당 겉곡으로 600근씩 주는 1년 식량은 항상 부족해서 년말이면 또 생산대에 손을 내밀군 하였다. 어디 그 뿐인가. 콩가을 때면 밭머리에 둘러앉아 마른 나무가지로 불을 지피고는 입이 새까맣게 콩서리를 했고 강변 모래밭에 락화생을 심으라고 종자를 나눠 주면 한 절반은 우선 자기 입에다 심어버리고 마니 밭에 나는 싹은 가물에 콩 나듯 아예 솎아버릴 념려가 없게 되였다. 사원들은 억이 막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생각해 보면 철딱서니 없는 이 ‘재교육대상’들 때문에 농민들도 여간만 애먹지 않은 것 같다.

‘범 없는 골안에 슬기가 왕’이라고 그때 시골에는 대학생은 고사하고 나 같은 고중졸업생이면 최고학력자였다. 1년 후 나는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민반교원으로 되였다. 두만강 기슭에 자리잡은 심포학교에는 전교 학생이라야 50명도 안되지만 소학 1학년부터 중학 3학년까지 다 있었다. 교원은 모두 4명이였는데 한 교원이 한어, 어문, 정치, 력사를 가르치면 다른 한 교원은 수학, 화학, 물리, 기하를 가르쳤고 학생이 적은 학급은 두 학급 학생을 한교실 량쪽에 갈라앉히고 흑판 가운데 줄을 그어놓고는 복식강의를 하였다.

필자가 하향하여 교편을 잡았던 백금공사 심포중학교 1973년 제2기 졸업기념 사진. 중간줄 왼쪽 첫번째가 필자(4명 교원).

늦가을이 되면 전교 사생들이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올라 겨우내 난로에 땔 나무를 장만하였고 일요일이면 교실의 벽을 바르고 회칠을 하였으며 책걸상도 손수 수리하였다.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근공검학이였다.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사군의 아들딸들은 일도 잘하고 말도 잘 들었다. 일곱살 난 소학교 1학년 생으로부터 열여섯살 초중 3학년 생까지 크고 작은 애들이 하학종소리만 울리면 함께 운동장에 뛰쳐나가 밀치고 닥치고 즐겁게 뛰놀던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오붓한 시골학교의 특이한 풍경이요, 변강 산촌의 푸르른 희망이였다.

1975년 봄, 지식청년은 도시로 돌아갈 수 있다는 당중앙의 정책에 따라 우리는 모두 기를 나누어 집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그 험난한 시골도 어느덧 미운 정, 고운 정이 들대로 들어 떠나올 땐 마을의 어른, 아이들과 눈물로 헤어져야만 했다.

연길에 돌아와 취직 후 2년이 되던 1977년 10월, 국무원에서는 교육부의 〈1977년 대학교모집사업에 관한 의견〉을 비준하고 대학입시 제도를 회복하였다. 이는 배움의 기회를 잃었던 우리 ‘로3기’에게 다시금 새로운 희망의 나래를 달아주었다. 때는 우리 66년급 고중생들로 말하면 모두 30대 나이였고 거의다 결혼을 하였지만 대학공부를 하려는 꿈만은 잃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들애를 해산한 지 50일도 안되는 몸이였지만 다시 찾은 이 기회를 절대 놓칠 수 없어 퉁퉁 부은 얼굴을 해가지고 10여년 간 놓아버린 고중교재들을 다시 복습하며 대학입시 준비에 밤을 지새웠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같은 각고한 노력이 있었기에 늦게나마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졸업의 영예를 받아안고 30여년 간 대학교의 연구기관에서 훌륭하게 사업할 수 있었다.

추억을 마무리면서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한세대의 운명을 바꾸었던 그 시절의 그 인간수업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 오늘의 보람찬 삶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더불어 식어가고 무디여가는 정열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히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용서를 하고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고 그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직 자신의 과거를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길 끝까지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숙명이 아닌가 생각한다.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