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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15]양가포서 찾은 주문빈 새 사진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5-16 15:10:05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5)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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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당산시 풍윤구 양가포 렬사릉원

2017년 4월 27일, 당산시 기동렬사릉원 첫날 현지답사를 마치고 귀로에 오르다가 택시운전사와 당산 중심부에서 당산시 구내 풍윤구까지 거리가 얼마이고 풍윤구에서 양가포까지는 거리가 얼마인가고 물어보았다. 택시운전사는 풍윤구까지는 28키로메터이고 풍윤구에서 양가포까지는 15키로메터라고 답한다. 그러면 택시를 곧추 양가포까지 몰고 갈수 있냐고 다시 물으니 갈 수 있다고 선선히 응해나선다. 당산시 풍윤구 양가포 택시 행은 이렇게 우연히 정해졌다. 때는 오후 2시 직후였다.

택시선택이 옳았음이 뒤미처 현실로 나타났다. 당산에서 풍윤구까지는 시간이 별반 걸리지 않았는데 풍윤구에서 북으로 15키로메터 되는 거리가 문제로 나섰다. 이 구간은 휘트인 신작로가 아니니 말이다. 좁은 콘크리트 포장길이 낡아서 말이 아니다. 시골의 수레길을 방불케 하니 뻐스도 별반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대로 물어 물으며 양가포 마을을 찾고 다시 양가포 렬사릉원을 찾으니 높은 담장과 높은 철대문으로 둘러싸인 렬사릉원은 문이 잠기여 들어갈 수가 없다.

어떻게 찾은 양가포 렬사릉원이던가, 돌아서서 후일을 기약할 일을 생각하니 일순 눈앞이 캄캄해난다. 오도가도 못하다가 렬사릉원 입구 한켠에서 밭정리에 나선 몇몇 아낙네와 70대 남성로인 한분이 보이여 그들과 물어보니 렬사릉원지기는 년세가 있는 분인데 아마도 봄철이라 밭일에 나선 모양이라고 한다. 남성로인은 주문빈렬사를 찾아왔다고 하니 주문빈은 조선족이고 양가포 사람들이 너도나도 잘 안다고 하신다. 그럴 때 한 아낙네는 방법이 있다며 누군가와 핸드폰 통화를 하더니 마을방송으로 찾으면 곧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희망이 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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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가포 렬사릉원 내 기념비

그 사이 70대 남성로인과 주문빈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느냐 물으니 그는 자기는 올해 75세로서 마을 선배 로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라면서 주문빈의 최후로 되는 1944년 10월 17일 양가포포위돌파전을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이야기 거의가 자료연구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지만 그 날 동원된 3,000여명의 일본군들 중에는 중국사람들인 위군들도 적지 않아 일본군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떤 위군부대에서는 “동지, 동지 이쪽으로 오시오!”라고 암시하면서 팔로군부대와 혁명간부들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다.

또 양가포포위돌파전은 렬사릉원이 있는 바로 이 바닥에서 벌어졌다고 하니 신선하기만 하다. 우리는 바로 양가포포위돌파전이 벌어진 력사의 현장에 서있었다. 로인은 계속하여 양가포마을의 동남과 서남은 확 트인 평지라지만 마을 동쪽은 마제산(马蹄山)이고 마제산은 마두산(马头山)과 남북으로 대치되여 있다. 마을 북쪽은 협산(夹山)과 접하여 있고 협산은 또 전모산(毡帽山)과 마주 바라보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여기 주변 산들엔 모두 일본군들이 올라있어 여기 바닥에 든 팔로군과 간부들 희생자가 태반이였다고 동을 달기도 한다.

당지 주유례 로인님 만나 취재한 후

알고 보니 로인님은 주유례(朱维礼)라고 부르는 분이였다. 생생한 이야기들이여서 흥미가 부쩍 동하지만 그렇게 반시간 정도 시간이 흘러도 와야 할 렬사릉원지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오후해는 어느덧 서산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여 조급함이 앞선다. 그때 어느 아낙네인가 그럼 이렇게 있지 말고 마을에 가서 누구누구를 찾아보라고 건의한다. 렬사릉원과 마을과의 거리는 몇리 잘되였다. 택시로 마을에 가서 또 길가에서 한담하는 몇몇 로인들을 만나 도움을 바랐다. 그렇게 사처로 련락하며 들볶아서야 렬사릉원지기와 겨우 통화가 이어졌다.

조선족사회에 처음 알려지는 팔로군 복장 차림의 주문빈 전신 사진

시간은 이미 오후 5시를 앞둔 시점이다. 드디여 양가포렬사릉원에 들어서고 곧추 릉원구 내 오른쪽 가에 위치한 릉원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개인집을 방불케 하는 자그만한 기념관이지만 사진전시를 위주로 한 기념관은 제법이였다. 1944년 10월 17일의 양가포포위돌파전 전후 사진과 그림으로 생생히 재현되여 있었다. 그 사진전시의 중심부에 양가포포위돌파전 팔로군의 최고 수장이였던 주문빈렬사의 전신사진이 보통사람의 키 정도로 전시되여 있었으니 가슴은 퐁퐁 뛰기만 한다.

그래 이 사진이지, 올해 초 이후 바이두(百度)를 통해 양가포렬사릉원을 찾고 찾다가 렬사릉원에 전시된 이 전신사진을 보아냈으니 그때까지도 우리 중국조선족사회에서 모르는 주문빈렬사의 전신사진이였다. 이 전신사진을 보고 위해 석도에서 제남과 당산을 거치며 곧추 달려왔으니 어렵게 찾은 이곳 양가포렬사릉원 행은 종내 헛된 걸음이 아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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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 눈으로 보는 주문빈렬사 전신사진은 다리에 각반까지 친 팔로군복장이여서 다정다감한 위인으로서의 주문빈의 형상이 그대로 묻어났다. 문제는 사진 찍기였다. 사진 우에는 투명한 무엇인가를 씌워서 해빛이 들지 않는 실내에서도 빛이 반사되여 마땅치가 않았다. 입은 웃옷을 벗어서 정문유리를 막아나서도 허사였다. 정면으로 사진 찍기는 전혀 불가능이라 반사빛을 피하며 사진 량쪽으로 비스듬히 찍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정면효과보다 못하지만 그런대로 수습을 하여야 했다.

그때 주문빈의 전신사진 우에 씌여진 시 한수가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그 시는 이러하다.

려운이 한마을 주문빈이 한마을

두 마을 서로 이웃하니 그 정 깊고 깊어라

산도 물도 혼령을 부르며 그댈 회억하니

승리소식 동풍 되여 어딜 보나 봄이구나

(云一村,树一村,此日一家作比邻,年深情更深。

山招魂,水招魂, 尤叫人人常忆君,东风处处春。)

왕이(网易) 블로그에 오른 우효영(于效英)의 글 〈주문빈렬사를 기념하는 한수의 시로부터〉”(从纪念周文彬烈士的一首词说起, 2011년 5월 8일)에 따르면 이 시는 주문빈의 동지이고 전우인 려운(黎耘)렬사가 1945년 10월 경에 쓴 한수의 시로 알려진다. 다시 말하면 일본이 무조건 투항한 두달 남짓한 후, 양가포포위돌파전에서 장렬히 희생된 주문빈렬사 희생 한돐을 맞으며 쓴 시이니 그 의미가 깊고 깊다.

려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만 우효영의 글에는 려운이 1942년 10월 경에 진찰기변구로부터 기동으로 파견되여 와서 존경하는 지도자인 주문빈과 2년 남짓이 같이 어울리며 극진히 보내였다. 그때 주문빈은 중공 기동지위 서기로 사업하다가 기열변특위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 후 항일전쟁이 승리하니 려운은 지체할세라 주문빈의 묘소가 자리한 전모산의 소나무 아래를 찾아 주문빈을 부르며 그 그리움을 한수의 시에 담아냈던 것이다. 그런 시가 지금 주문빈의 전신사진과 더불어 발목을 잡고 놓질 않는다.

양가포포위돌파전에서의 주문빈동지(앞 오른쪽)

양가포렬사릉원에서의 새 사진 발견은 주문빈의 전신사진 뿐이 아니였다. 양가포포위돌파전을 알리는 여러 사진들에는 일본군의 대거 진공에 맞서 싸우는 주문빈과 팔로군 장병들의 모습이 희미하나마 그대로 알리는데 주의를 무척 끄당기는 사진은 두장이였다. 한장은 그날의 포위돌파전에서 자기들의 지도자 주문빈을 기다리는 팔로군 장병들의 모습이라면 다른 한장은 “우리들의 과업은 팔로군 기관과 전체 간부들을 보위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팔로군장병들 속 주문빈의 모습이다.

양가포 렬사릉원의 원 안내비

무척이나 애를 태우며 찾고 찾은 당산시 풍윤구 양가포 렬사릉원 현지답사는 원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곳 렬사릉원 기념관에 이어 렬사릉원 기념비와 렬사묘소 구역 등지를 돌아보면서 싸움의 그 날의 양가포포위돌파전에 묻혀봄도 실감나는 일이였다. 렬사릉원 밖에 나와서 다시 한번 가렬처절한 생사박투의 전투가 벌어진 주변의 골안바닥이며 전모산 등지를 둘러보니 악악 소리 지르며 적들과 싸우는 팔로군 장병들의 모습이며 포위돌파전을 선두에서 지휘하는 주문빈의 모습이 보이는 듯 싶다.

양가포 렬사릉원의 옛 중심기념비  /이상 사진 2017년 4월 27일 현지촬영

2017년 5월 5일 위해 석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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