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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13]동욕진 상무촌의 무명렬사묘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5-03 13:26:22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3)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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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10일, 태항산 항일근거지 동욕진 상무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가 열리였다. 회의에서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중공중앙과 팔로군을 대표하여 연설을 하였다. 팽덕회는 조선동지들의 련합과 화북조선청년련합회의 설립을 축하하고 나서 항일투쟁에서 빛나는 공훈을 세운 조선동지들에게 숭고한 혁명적 경의를 표시하였으며 조선동지들은 광범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를 타승할 때까지 싸워 보다 휘황한 위훈을 세울 것을 희망하였다.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위치한 동욕진 상무촌은 오늘의 산서성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으로서 상무촌 뒤로는 하늘을 찌르는 듯한 웅장한 바위산이 일어서고 바위산 아래에는 규모가 상당한 불교사찰 홍복사(洪福寺)가 자리하고 있었다. 연안의 항일군정대학을 거쳐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달려온 30여명의 조선혁명가들이 이 홍복사에 자리잡았고 이 홍복사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2009년 8월 21일, 필자가 태항산항일근거지 현지답사 차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찾으니 홍복사는 촌의 동쪽 변두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제날 홍복사는 보이지 않고 꽤나 길다란 단층집 하나만 달랑 남아 북방의 손님을 맞아준다. 알고 보니 당년 일본침략자들이 불살라버린 결과였다. 오늘의 단층집은 그대로 불교의 절로 리용되고 있었고 절 정문가에는 조선의용대 주둔지라고 밝힌 글자가 적혀있었다. 그 시절의 홍복사는 비교적 컸기에 조선동지들 뿐 아니라 로신예술학교와 위생학교도 자리잡았으며 라서경을 비롯한 팔로군 전선총부 주요 지도자들도 거주하였다고 전해진다.

1941년 1월 10일,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설립대회가 열렸던 동욕진 상무촌의 불교사찰-홍복사 현재 건물.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조선동지들이 이곳 상무촌 홍복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940년 겨울로 알려진다. 조선의용대 출신들이 아닌 연안 등지에서 온 30여명 조선동지들이 첫패로 된다. 그들은 때로는 단독으로, 때로는 로신예술학교 등 사생들이나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늘 다양한 야회를 가지였다. 야회는 야회 그대로 밤에 가지면서 널다란 마당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춤과 노래를 즐기였다. 그때마다 빠짐없이 울려퍼지는 노래는 〈아리랑〉 노래였다. 〈아리랑〉 노래에 호기심을 가진 학교 사생들과 마을 사람들은 따라 부르다가 제법 잘 부르며 엄지손가락을 내들었다.

그러나 중국동지들과 마을 사람들은 아리랑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면서도 그 뜻은 알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책임자 진광화는 중국동지들에게 조선민요 〈아리랑〉의 뜻을 보다 잘 알리기 위하여 〈아리랑〉 노래 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고는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하여주었다. 〈아리랑〉의 뜻을 알게 된 중국사람들은 조선동지들과 어울릴 때면 언제나 〈아리랑〉노래를 부르며 조선동지들에 대한 진지한 감정을 표달하군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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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1941년 초 한겨울이였다. 조선동지들이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온 지 얼마 안 되던 때인데 하루는 한무리 일제침략군들이 상무촌을 기습하였다. 홍복사와 마을에 있던 조선동지들은 재빨리 마을 부근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하고 적들을 맞아 싸웠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산으로 피신해서야 조선동지들은 싸움터에서 물러섰지만 이미 2명의 조선동지가 희생된 뒤였다. 마을에서는 리금주(李金柱)라고 부르는 농민 한사람이 숨지였다. 그러나 조선동지들의 군사엄호를 받지 못한 부근의 동욕촌에서는 150여명 마을 사람들이 일본놈들에게 살해되는 비극을 가져왔다.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서는 희생된 두 동지를 홍복사에서 멀지 않은 산비탈에 고이 모시였다. 그때로부터 이곳 상무촌의 사람들은 조선동지들 때문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며 수십년을 하루와 같이 자발적으로 조선렬사의 무덤을 관리하여 나섰다. 그 진두에서 조선의용대 렬사묘를 묵묵히 지켜준 분은 마을의 조은경로인이였다. 조선동지들이 상무촌에 머무르던 그 나날 조은경로인은 10대 소년이였는데 일찌기 어머니를 여읜데서 셋째삼촌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마침 셋째삼촌집에는 조선의용대 간부 2명이 류숙하고 있어 그는 늘 조선동지들과 격이 없이 어울리였다.

당년의 10대 소년이던 조은경할아버지와 무명렬사묘. /자료사진

1941년 봄 이후 국민당 항일전장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주력이 선후로 태항산항일근거지로 전이하여 왔다. 1940년 겨울 적후에서 첫패의 조선동지 30여명이 상무촌에 이른 후의 계속이였다. 이렇게 모여든 조선의용대와 조선동지들은 모두 100여명에 달하였다. 이들 100여명은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 소속되여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재편성되였는데 화북지대 지대장은 박효삼, 부지대장은 리익성, 정치지도원은 김학무가 맡아보았다. 화북지대 본부는 동욕진 상무촌에 설치되고 상무촌과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麻田镇云头底村) 두곳이 조선의용대의 주둔지로 되였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대부분 동지들이 운두저촌에 주둔하면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9년 8월 21일 그 날 필자는 동욕진에서 멀지 않은 마전진 운두저촌에도 가보았다. 운두저촌은 300여세대에 1,000여명 인구를 가진 마을인데 마을어구에 해묵은 홰나무 한그루가 있어 퍼그나 인상적이다. 보다 인상 깊은 것은 마을의 서남쪽가에서 남각(南阁)이라고 불리우는 작은 문루(门楼)이다. 문루의 바람벽에는 항일의 피어린 나날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써놓은 항일구호—“왜놈의 상관놈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 등 여러 구호들이 씌여져 있었다. 이런 항일구호들은 오랜 세월 속에 퇴색하였지만 흰색을 새롭게 올리여 잘 보이였다. 운두저촌에서도 조선의용대가 부르는 〈아리랑〉 등 조선노래가 끊임없이 울려퍼지였다.

〈아리랑〉 노래나 〈아리랑〉 이야기는 기실 조선의용대의 탄생과 함께 전해지는 주요 노래와 이야기로 유명하다. 조선의용대 제2지대는 1939년 3월, 계림시절에 이미 가극 〈아리랑〉까지 무대에 올렸다면 조선의용대 제3지대 북상길에서도 〈아리랑〉 노래가 울려퍼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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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41년 새해 년초인 1월 초였으니 조선의용대 제3지대는 중경의 총대부를 떠나 민생호 기선으로 장강을 따라 북상길에 오르게 되였다. 그들 일행은 조선의용대 부대장 박효삼과 제3지대 정치지도원 석정, 지대장 김세일, 문명철, 최채 등 20여명으로서 첫새벽에 중경을 떠나 그 날 저녁 무렵에 만현(万县) 부두에 이르렀다. 마침 만현에는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상해동남의학원(上海東南醫學院) 출신 민족혁명당 당원 최성오(崔省吾)가 있어 석정 일행은 최성오 부부의 뜨거운 초대를 받았었다.

그 날 저녁 초대석에서 석정은 최성오의 초대에 감격한 나머지 행군 도중에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제3지대 금주령(禁酒令)까지 해제함을 보이였다. 술이 거나한 대원 김무가 선참 〈각설이타령〉을 부르자 초대석은 인차 오락회로 번지였다. 〈아리랑〉 노래를 비롯한 조선노래, 중국노래, 일본노래, 쏘련노래가 마구 쏟아지면서 흥이 났다. 석정은 라운규의 조선영화 《아리랑》 해설을 줄줄 내리 엮으면서 나라 잃은 겨레의 피눈물의 한을 토로하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석정은 〈아리랑〉에 심취되여 있었고 고향의 노래 〈밀양아리랑〉을 부르기를 즐기였다.

도로변인 상무촌 바깥 입구에 세워진 ‘순국선렬전적비’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그러던 〈아리랑〉 노래가 태항산근거지 상무촌에서 울려나오고 운두저촌에서도 울려나온다. 조선의용대는 〈아리랑〉의용대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였다. 조선동지들과의 스스럼없는 관계속에서 10대의 소년 조은경은 조선의용대의 래력을 알게 되면서 감탄해마지 않았다. 조선동지 둘이 희생된 후 그는 조선의용대는 마을사람들을 구해준 은인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준 미더운 사람들이라며 렬사묘 관리를 자각적으로 맡아나섰다.

한편 필자로서는 유감도 없지 않았다. 2009년 8월 21일 동욕진 상무촌을 찾고 마을 저쪽가에 자리한 홍복사를 찾았으나 조선동지 묘소로 되는 무명렬사묘까지는 이를 수가 없었다. 원인은 갓 큰비가 내린 탓이였다. 땅이 질척질척하여 마을의 안내자를 찾는다는 것이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무명렬사묘로 향하는 토지뇌 골안 어구가 전부 풀밭으로 덮인데다가 풀밭 모두 큰비에 후줄근히 젖어들어 헤치고 나갈 수가 없었다. 풀밭을 헤친다는 것은 입은 옷이고 온몸이 물병아리로 된다는 말이니 물러서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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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8년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필자는 천만유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고마운 것은 조은경로인이 75세이던 2004년에 상무촌의 홍복사를 찾고 무명렬사묘를 찾은 한패의 조선족 답사조를 안내하며 취재를 받아들인 것과 필자의 현지답사가 있은 3년 후 2012년, 83세의 고령에 또 한패의 우리 조선족 답사조 현지답사를 다시 안내하여 나선 것이 아닐가. 조은경로인은 한두해도 아닌 장장 70년도 넘는 세월 속에서 어느 해도 거르지 않고 무명렬사묘를 찾아주며 묵묵히 지켜주었으니 진정 고마운 분이기만 하다.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을 찾던 날, 필자는 어쩔 수 없이 이 마을의 토지뇌에 일어선 무명렬사묘를 찾지 못하고 돌아서다가 상무촌의 한 흙집에서 흙벽에 붙어있는 ‘로신예술학교옛터’ 낡은 간판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낡은 간판은 글자를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으나 유서 깊은 이 마을이 태항산근거지에서 활동한 로신예술학교의 발자취를 너무나도 잘 알리고 있었다. 조선동지들과 어울려 돌아가는 로신예술학교의 학생들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좌권현 마전진 운두저촌의 남각으로 불리우는 작은 문루는 ‘조선의용군항일표어’ 문루로 되여있다. /2009년 8월 21일 현지촬영

꼭 설명하고 지날 것은 로신예술학교의 발자취를 잘 모르는 이들은 우리 겨레 음악가 정률성도 이 마을의 로신예술학교에서 활동한 줄로 알고 있다는 착각이다. 사실 정률성이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부임하는 무정장군을 따라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942년 8월의 일, 그때 동욕진 상무촌과 멀지 않은 마전진 운두저촌에서 활동하던 조선동지들은 산서와 하북의 접경지대에 자리한 하북성 섭현 중원촌으로 언녕 전이한 뒤였다.

최근년간에 좌권현 동욕진 상무촌 무명렬사묘와 상무촌 입구에는 선후로 각기 기념비가 새로 세워졌다. 상무촌 무명렬사묘의 ‘의용군렬사지묘’ 기념비는 상무촌 전체 촌민들의 이름으로 2002년 음력 10월 1일에 세워지고 상무촌 입구의 돌거북 우에 세워진 기념비는 한국 순국선렬유족회와 좌권현인민정부에서 조선의용군 태항산지구 항일전 ‘순국선렬전적비’로 2002년 12월 26일 세웠다. 이곳의 두 기념비는 당년 조선의용군이 활동했던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세워진 여러 기념비 가운데의 두 기념비로 력사의 땅 상무촌에, 인민들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여 고무를 주고 있었다.

2017년 3월 15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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