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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10]진광화 석정 묘소에 깃든 이야기 1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4-11 15:07:59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10)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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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성 찬황현 황백평향 황백평촌(赞皇县黄柏坪乡黄柏坪村) 4렬사묘 답사를 마친 후 원씨현 호가장(元氏县胡家庄)을 찾았다. 다음 답사지는 진광화, 석정 렬사의 묘소가 있다는 한단시 진기로예(晋冀鲁豫)렬사릉원. 한단시를 찾은 것은 2009년 8월 17일 오후였다. 진기로예렬사릉원은 한단시 릉원로에 위치하고 릉원로에 의해 남북으로 나뉘여지면서 렬사릉원 정문은 북원에 세워졌다.

북원 내 진기로예렬사릉원에 들어서면 모택동의 ‘무상광영(无上光荣)’ 금빛 글발을 새긴 하늘을 떠인 듯한 웅위로운 회색기념탑이 선참 안겨온다. 기념탑을 지나면 인민영웅기념묘소, 진렬관, 4.8렬사각(四八烈士阁), 렬사기념당, 좌권(左权)장군묘, 좌권장군기념관 등 기념시설물들을 찾을 수가 있다. 좌권장군묘소 한켠에 몇몇 주요 렬사들의 묘소와 더불어 진광화렬사묘가 시야에 비껴들었다. 얼마나 바라던 진광화렬사묘던가, 얼마나 찾고저 하던 진광화렬사묘던가. 여름방학 귀가 차 연변으로 갔다가 전문 시간을 내서 불원천리 달려왔으니 내리글로 된 진광화렬사묘소 비문에서 이윽토록 눈을 떼지 못하였다.

하북 한단시에 자리한 진기로예렬사릉원 입구 모습

조선혁명렬사 진광화동지 묘지. 광화렬사의 원명은 김창화(金昌华)이다. 조선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평천리(大同郡古平面平川里) 사람으로서 1911년에 태여났다. 그는 1931년 국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반일에 뜻을 두고 중국에 건너왔다. 그는 1937년에 광주에서 중국 국립중산대학 교육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일찍 한국국민당, 조선청년전위단 그리고 중국청년항일동맹에 참가하였다. 1936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38년에 화북 태항산항일근거지에 도착하여 중국공산당 북방국 진기예구(晋冀豫区) 당부에서 중요한 사업을 하였다. 1941년에 화북 조선청년련합회를 설립, 지도하였다. 1942년 5월 28일 태항산 반소탕전역에서 싸우다 산서 편성(便城) 화옥산(花玉山)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진기로예변구 당정군민 및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는 렬사의 공적을 추모하여 묘를 만들고 비석을 세워 기념한다. 중화민국 31년 10월 10일 세움.

진기로예렬사릉원 내 진광화렬사묘소이다. 진광화(陈光华)렬사를 상기하노라니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연변인민출판사 출판, 1987년 8월)란 조선의용군 출신 회고록에서 진광화를 떠올린 리화림(李华林)의 회고록 〈진리의 향도 따라〉가 생각난다. 조선의용군 녀전사였던 리화림은 〈진리의 향도 따라〉에서 1932년 늦가을 혁명진리 탐구 차 광주에 간 후 진광화와의 인연을 터놓아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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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 광주의 중산대학에는 30여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여러 학원의 여러 학과에 널려 학습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학생이 진광화였다. 진광화렬사묘소 비문에서는 진광화가 중산대학에 입학한 시간을 밝히지 않았지만 진광화는 1933년에 남경 오주(五州)중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8월에 중산대학 문학원 교육계에 입학하여 학습하고 있었다. 그러던 진광화가 리화림녀사와 각별한 사이로 지내면서 ‘누님’이라 부르기도 하고 ‘아지미’라고 부르기도 하였었다. 다 같은 평양과 그 일대 태생이라는 점도 그러하겠지만 나이 차이로 보아도 리화림이 1905년 생일 때 진광화가 1911년 생이니 믿고 따를 만도 하였다.

진광화 관련 리화림의 회고록에서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어느날 진광화와 중산대학 캠퍼스 내를 거닐던 장면이다.

어느날 진광화는 나와 함께 중산대학 문학원의 교정을 거닐다가 한 우물을 가리키며 거기로 가보자고 하였다. 내가 우물에 이르러 들여다보니 그것은 말라버린 우물이였다. 진광화는 나와 함께 우물을 들여다보고는 ‘후-’ 하고 긴 한숨을 내쉬더니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열었다.

“누님, 이 우물은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우리 조선인 혁명가들이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놈들에게 무기를 남겨두지 않으려고 총을 마사서 처넣은 곳입니다. 그들은 실로 영용하게 희생되였지요.”

진기로예렬사릉원 입구 내 ‘무상광영’ 기념비

진광화를 기리는 리화림의 회고록 부분이다. 너무도 감명적이여서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었으니 진광화를 생각할 때면 선참 떠오르는 것이 리화림의 이 부분 회고였다. 진광화의 형상투영이라 하겠다.

그런데 석정렬사의 묘소는 쉬이 나타나지 않는다. 북원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북원의 구간구간을 뒤지다가 북원을 지나 남원의 진기로예렬사공묘에 이르러서야 그 영문이 풀리였다.

진기로예렬사공묘는 넓은 평지에 펼쳐지면서 약 200명 렬사가 고이 잠들어있었다. 석정렬사묘소는 그중의 하나였다. 모두가 누운 상태로 된 자그마한 장방형 묘소였고 석정렬사묘소 대리석 묘비에는 중문과 조선문으로 “석정윤세주렬사”[石鼎(正)尹世胄烈士]라고 씌여있었다. 석정(1901—1942)은 경남 밀양 출신이고 중국 류하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서 1938년 10월에 한구에서 김원봉과 함께 조선의용대 창건을 주도하고 조선의용대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한 조선혁명가였다.

진기로예렬사릉원 내에는 또 전문 렬사기념당이 발목을 잡았다. 렬사기념당에는 진광화, 석정 두 렬사의 사진과 략력, 1942년 7월 18일 자 《신화일보》에 실린 진광화, 석정의 추모기사, 조선의용군이 항일표어를 쓰는 력사적인 사진, 진광화가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중국어로 번역한 〈아리랑〉 가사 등이 전시되여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앞의 련재에서 스치고 지난,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중국사람들을 위하여 번역한 〈아리랑〉 가사여서 더구나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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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렬사기념당에 전시된 진광화와 석정 두 겨레 렬사의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그러노라니 석정렬사의 작사로 된 〈최후의 결전〉 노래가 떠오른다.

최후의 결전을 맞으러 가자

생사적 운명의 판가리다

나가자 나가자 굳게 뭉치여

원쑤를 소탕하러 나가자

총칼을 메고 결전의 길로

다 앞으로 동무들아

혁명의 기발 우리 앞에 날린다

다 앞으로 동무들아

진기로예렬사릉원 북원 내 진광화렬사 묘소

태항산 〈아리랑〉, 태항산항일근거지 동욕진 상무촌 시절 홍복사 넓은 마당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아리랑〉 춤속에 끼인 진광화, 석정이 보인다. 중국인들에게 〈아리랑〉 가사를 번역하고 중국어로 〈아리랑〉 노래를 부르는 진광화가 보인다…

알고 보면 진기로예렬사릉원은 1950년 10월에 이곳 하북성 한단시(邯郸市)에 새로 락성되였다. 관련 중문 연구자료에 따르면 진광화-석정 묘소는 원래 하북성 섭현 련화산 기슭의 석문촌 진기로예렬사릉원에 자리하다가 좌권장군과 조선의용군 진광화, 석정 등 8명 렬사의 유골을 한단시 진기로예렬사릉원에 다시 이장하였었다. 좌권장군 유골 등 한단시 진기로예렬사릉원으로의 이장은 ‘새 중국의 첫 국장(新中国第一个国葬)’이고 중대하고도 장중한 추모활동으로서 중앙신문영화기록촬영소에서 기록편을 찍었다고 한다. 이는 진광화, 석정으로 말해,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해 더없이 귀중한 영상자료이지만 필자는 아직 직접 보지 못하여 유감이기만 하다.

하다면 진광화-석정은 어디서 어떻게 희생되였을가? 이를 알자면 피어린 1942년 5월 그 시절로 돌아가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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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5월, 일본침략군은 무려 3만여명을 내몰아 팔로군이 활동하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대해 전례없는 대대적인 진공을 들이댔다. 이른바 ‘C호작전계획’이라고 일컫는 ‘5월소탕’인데 적들의 주되는 목표는 태항산 항일근거지의 팔로군 전선총부를 일거에 소멸하려는 것이였다.

“쿵쿵쿵…”

적들의 포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이날은 5월 24일이였다. 근거지의 군민들은 총부를 따라 후방으로 전이하였다. 조선의용대 100여명 전투원들과 40여명의 비전투원들은 정든 동욕진(桐峪镇) 상무촌(上武村)과 마전진(麻田镇) 운두저촌(云头底村)을 떠나야만 하였다. 그들 100여명이 속한 대오는 팔로군총부 정치부 주임 라서경이 인솔하였는데 팔로군 무장대오라야 두개 소대의 경위부대 뿐이였다. 그 외는 총부 정치부, 후근부, 위생부 등 각 기관의 일군들을 망라한 방송사업 일군들, 문공단 배우들, 로신예술학교 사생들 등 비무장 전투원들이였다. 이런 험악한 형편 속에서도 팔로군 팽덕회 부총사령은 국제주의전사들인 조선동지들을 지극히 아끼면서 그들을 가렬처절한 싸움터에 내세우지 않고 행군대오의 뒤에서 움직이게 하였다. 팽부총사령의 육친의 정은 조선동지들의 마음을 후덥게 해주었다.

진기로예렬사릉원 남원 내 석정렬사 묘소

5월 25일 점심, 이들 대오가 요문구(窑门口) 산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서남쪽 산너머에서 3,000여명의 일본군이 덮쳐들었다.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와 부총참모장 좌권이 인솔한 팔로군 전선총지휘부와 중공북방국 기관 및 그 산하 여러 기관과 단체의 인원들이 집결해있는 요문구와 북애포(北艾铺)는 삽시에 불바다로 되고 적기가 공습을 들이댔다. 두개 소대의 경위부대는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절대적으로 우세한 적들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더는 뒤에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박효삼(朴孝三) 지대장이 라서경(罗瑞卿) 주임한테로 달려가 팔로군 전우들과 생사를 같이하겠다고 청들었다. 라서경은 이윽토록 박지대장을 지켜보다가 그의 손을 으스러지게 잡더니 생사를 같이하자며 팔로군 경위부대는 서쪽에서, 조선의용대는 동쪽에서 적을 막아 싸우라고 명령했다.

팔로군 경위부대와 조선의용대 전사들은 동서로 나뉘여 적들과 필사적으로 싸우며 혈로를 헤쳤다. 중앙군관학교 출신인 조선인 문명철(文明哲)은 하나 밖에 없는 경기관총을 휘두르며 적들을 무리로 쓰러눕혔다. 적기까지 날아와 기총소사를 들이대도 조선동지들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팽덕회 부총사령과 팔로군총부를 목숨으로 지켜 싸웠다. 이 시각 비전투원들은 북쪽산으로 치달았다. 어둠이 깃들자 적들이 진공을 멈추었다. 그 사이 아군은 적진을 헤치고 나갔고 조선인 수십명 비전투원들은 전투원들과 헤여져 행동했다.

진기로예렬사릉원 북원 내 렬사기념당에 전시된 진광화, 석정 두 렬사의 사진과 략력 /이상 사진 2009년 8월 17일 현지촬영

5월 27일 동틀 무렵, 우리 대오는 하청구에 이르렀다. 련 이틀이나 물 한모금, 밥 한술 먹어보지 못한 동지들은 모진 허기증과 갈증에 시달렸다. 기진한 녀성들은 말꼬리를 엇갈아 쥐고서야 겨우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적들이 집요하게 뒤를 문데서 적의 포위망을 헤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 어려운 나날 5월 26일 먼동이 틀 무렵, 멀리 연안 조원의 움집에서 모택동은 초조한 심정을 억누를 길 없었다. 5월 25일 팔로군 129사의 보고에 의하면 팔로군총부가 적의 습격을 받고 북방국의 기관인원들은 여러 갈래로 나뉘여 포위를 헤치였는데 총부의 무전기가 중단되여 그 형편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2017년 3월 18일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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