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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9]화북대지 황백평촌 4렬사묘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4-05 14:05:32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9)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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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중순, 절강 소흥에서 연변으로 귀가하였던 필자는 다시 연변을 떠나 하북-산서 변계지대에 위치한 태항산항일근거지 현지답사길에 올랐다. 처음으로 찾아가는 조선의용군의 활동지-태항산이여서 먼저 하북 보정(保定)과 석가장(石家庄)에 들려 무정장군의 보정군관학교 시절 발자취와 주문빈렬사의 동상을 찾아본 뒤 뻐스로 곧추 하북 찬황(赞皇)현성을 찾았다. 그날은 8월 15일 오전, 찬황현성에서 다시 택시를 잡고 호가장 4렬사 묘소가 있는 황백평향 황백평촌(黄柏坪乡黄柏坪村)으로 달렸다. 호가장 4렬사란 누구들이고 호가장 4렬사 묘소가 어찌하여 호가장이 아닌 찬황현 경내에 모셔졌을가? 이를 알자면 그 시절 조선의용대와 호가장전투를 떠올려야 할 것 같다.

하북성 찬황현 황백평향 황백평촌 외경

1940년 말 1941년 초 이후, 국민당 관할구역에서 활동하던 조선의용대 동지들이 륙속 태항산근거지에 들어섰다. 1941년 6월 초순의 어느날, 팔로군 총부에서는 소재지인 료현(辽县,좌권현) 동욕거리의 한 광장에서 총부 산하 각 기관 일군들과 일본인, 윁남인, 필리핀인들이 참가한 성대한 대회를 가지고 조선동지들을 뜨겁게 포옹했다. 팽덕회, 라서경 등 동지들이 대회에 참가하였는데 팔로군 부총사령 팽덕회가 열정에 끓어넘치는 환영사를 드렸다.

“본인은 18집단군 70만 장병을 대표하여 여러분을 열렬히 환영합니다. 우리 무기고의 문은 여러분 앞에 활짝 열렸습니다. 마음대로 고르고 마음대로 가져가십시오…”

그날 오후 팽덕회는 환영연회를 베풀어 조선동지들을 따뜻이 초대해주었다.

1941년 늦가을, 조선의용대는 팽덕회동지의 배려와 팔로군부대의 배합하에 여러 무장선전대로 나뉘여 적후선전사업에 나서게 되였다. 김학철, 최동광 등이 소속된 무장선전대 제2대 20여명 전사들은 2주야의 강행군 끝에 200키로메터 밖의 원씨현 경내에 이르렀다. 팔로군의 한개 대대 약 300명이 제2대의 행동에 배합해나섰다. 무장선전대는 낮에는 팔로군부대와 더불어 협동작전을 벌리고 밤에는 적점령구에 숨어들어 군중선전과 적군와해 사업을 벌렸다. 그러다 보니 조선동지들은 하루에 기껏해야 네댓시간 밖에 자지 못했는데 그나마 총을 안고 쪽잠을 자야 했다.

1941년 12월 11일, 제2대의 동지들이 성옹채란 마을에서 아침식사를 하는데 산우의 초소로부터 적들이 달려든다는 신호가 전해졌다. 적이 쏜 박격포탄 한알이 벌써 마을에 날아들었다. 조선동지들은 밥그릇을 내동댕이치고 급히 산우로 올리달았다. 그들에게는 적들이 절대 마을 안으로 달려들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우리 동지들이 산우의 유리한 지대에서 산아래 적들을 답새겼기에 적들은 얻어맞기만 했다. 그사이 마을의 민병들이 마을 사람들의 철거를 맡아나섰다. 근 한시간의 격전 끝에 적들은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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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동지들은 이튿날 성옹채에서 50여키로 떨어진 호가장에서 팔로군대대와 만나기로 하고 먼저 호가장으로 떠났다. 호가장은 적통치구역과 맞대고 있는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최전선에 자리잡고 있는 그닥 크지 않은 마을인데 마을 남쪽 몇리 밖에 일본침략군이 주둔하고있었다.

이날 12월 11일 저녁, 무장선전대 제2대 동지들은 한 백성의 집에 류숙하였다. 20여일 동안 처음으로 옷과 신을 벗게 된 조선동지들은 모두가 단잠에 빠졌다. 고상철만이 지붕우에 올라가 보초를 섰다. 그날따라 안개가 자옥하여 멀리 내다볼 수도 없었다. 동틀 무렵 보초가 지붕우에서 내려와 동지들을 깨웠으나 우리 전사들은 설친 잠을 봉창하려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찬황현 황백평향 황백평마을 큰길가에 세워진 순국렬사기념비

이때 자지러진 기관총소리가 마을 밖에서 들려왔다. 동지들은 급기야 자리를 차고 밖으로 내달았다. 적정을 살펴보니 300명으로 헤아리는 적들이 삼면으로 조여들고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호가장에 있는 괴뢰군 가족이 일본군 거점에 가서 고발했기에 두개 중대가 넘는 적들이 밤도와 포위진을 치고 있다가 공세를 발동했던 것이다. 사태는 험악했다. 우리 대오는 대장 김세일의 지휘하에 마을 북쪽으로 포위망을 헤치였다. 김학철, 박철동, 손일봉 등 동지들이 맨 뒤에서 동지들의 철퇴를 엄호하였다.

찰나, 손일봉과 박철동이 적탄에 부상당했다. 일본군 소대장이 병졸 7명을 이끌고 손일봉한데 덮쳐들자 손일봉은 욕설을 퍼부으면서 한손으로 일본군 소대장의 목을 틀어쥐고 한손으로 수류탄을 뽑아들었다. 손일봉은 이렇게 적 8명을 요정내고 피못에 쓰러졌다. 박철동도 적들과 박투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한청도는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적들과 결사적으로 싸웠다. 탄알이 떨어지고 적들이 에워싸자 그 역시 수류탄을 터치고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약 한시간 끝에 동지들은 겨우 마을을 벗어나 동쪽 산에 접근하였다. 헌데 그곳에서도 조우전이 벌어져 사태는 갈수록 험악했다. 이때 팔로군대대가 달려와 반포위진을 치고 적들을 답새겼다. 적들은 황망히 물러갔다. 이날 혈전에서 손일봉(28살), 박철동(26살), 한청도(27살, 일명 최철호), 왕현순(24살, 일명 리정순) 네 동지가 영영 눈을 감고 김세광(29살), 김학철 (25살) 두 동지가 중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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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장전투가 끝난 후 팔로군부대와 조선의용대에서는 희생자들을 찾아 마을 뒤편의 크지 않은 평지에 림시로 초장하였다. 호가장 남쪽 몇리 밖에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수시로 들이닥칠 수 있기에 호가장에 묘소를 앉힐 수는 없었다. 며칠 사이 당지에서는 손일봉 등 4렬사 묘소를 진기로예변구(晋冀鲁豫边区) 제1분구 사령부가 자리잡은 남으로 60~70리 밖 찬황현 황백평향 황백평마을 언덕으로 이장하게 되였다.

그날은 1941년 12월 15일, 팔로군부대와 조선의용대, 찬황현 동지들 수백명이 황백평마을에 모여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4렬사들을 위한 이장식-장례식을 장중히 가졌다.

당년 연안의 《해방일보》는 특집을 내여 희생된 조선동지들을 추모하였고 이듬해 2월 7일 중경에서도 추도식을 성대히 가졌다. 조선동지들의 련이은 희생은 중경의 주은래를 심심한 추모 속에 잠기게 하였다. 주은래는 자기와 동필무, 등영초 등 셋의 이름으로 중경의 추도식에 주련을 보내왔다. 주련의 글은 이러하였다.

“조선의용대 전사한 동지들 천고에 빛나리. 어떻게 조선민족 네 전사를 추도할가, 공동의 원쑤 일본강도를 꼭 때려눕혀야 하리!”

주덕, 팽덕회도 주련을 쓰고 《신화일보》에서도 추모의 주련을 보내왔다.

황백평마을 언덕의 원 4렬사 묘소 흔적비

호가장전투는 말 그대로 중국대륙을 들썽한 전투였다. 해방 후 소학교 교과서에 호가장전투 기사가 수록되였다. 1989년 1월 24일 자 《길림신문》 3면에 실린 기행문-〈렬사들의 고귀한 넋을 차마 잊을 수 없어〉에 의하면 당년 조선의용군의 전사였던 류동호씨가 호가장을 찾아 네 렬사의 무덤을 배알했을 때 당지 사람들은 “조선의용군이 그때 이 마을에서 싸웠기에 우리 마을이 국제적으로 이름이 나게 되였지요.”라고 하면서 조선의용군동지들을 몹시 그리였다.

당년 호가장전투와 호가장전투에서 희생된 네 렬사의 묘소와 이장 과정을 돌이켜 보았다. 이런 연유로 호가장에서 희생된 조선의용군 렬사들은 원씨 경내에서 남으로 60~70리 밖 찬황 경내에 이장하게 되였으니 필자는 그네들을 찾아 불원천리 하북 찬황을 찾았고 찬황현성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게 되였다. 현성에서 황백평까지의 거리는 30키로메터 정도라고 한다.

금방 찬황현성을 벗어나 찬황경내 황백평향 행에 오르니 시침은 8월 15일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길가에는 시골마을들에서 교역으로 싣고 온 대추주머니들이 가득 쌓여있어 시선을 잡기에 족했다. 희한한 장면이여서 택시를 잠간 세우고 카메라에 잡아두어서야 길을 다시 떠날 수가 있었다.

택시는 반시간도 되나마나하여 황백평향 황백평촌에 이르렀다. 큰길가에는 돌거북우에 우뚝 일어선 ‘순국렬사기념비’가 보이였다. 한국의 순국렬사유족회와 황백평촌에서 2002년 12월 26일에 함께 세운 기념비로서 이 고장의 조선의용군 4렬사 묘소 먼저 뜨거이 맞아주었다. 큰길에서 내려 말라버린 강바닥을 지나 황백평촌에 이르니 마을 사람들은 저기 마을 뒤 언덕에 4렬사 묘소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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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으로 오르는 길 따라 등판 따라 한참 달리니 내리막길이 나진다. 어딜 보나 키를 넘는 옥수수밭이고 있어야 할 렬사묘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마을로 돌아와 50대가 넘은 한 중년남자 분과 물으니 자기가 안내해주겠다고 나선다. 렬사묘는 우리가 달린 언덕길이 아닌 마을 뒤 언덕 우에 자리잡고 있었다.

마을 뒤 언덕 우에는 풀 속에 묻혀버린 ‘조선의용군선렬묘소옛터’(朝鲜义勇军先烈墓所旧地)표지석이 보였다. 묘소는 보이지 않고 손일봉, 리정순(일명 왕현순), 최철호(일명 한청도) 세 렬사의 묘소 표지석이 련달아 나타났다. 필자가 의아한 눈길을 던지니 중년 분은 허허 웃으며 여기는 원래의 4렬사 묘소 자리이고 몇해 전에 조금 웃쪽 언덕 펑퍼짐한 곳에 이장하였다고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세멘트에 자갈돌을 총총히 박아 만든 세멘트길 따라 겅정겅정 나아갔다.

황백평마을 언덕에 새로 이장된 4렬사 묘소

중년 분은 말수는 적지만 고마운 분이였다. 그를 따라 언덕길 따라 수십메터 앞으로 더 나아가니 과연 펑퍼짐한 곳에 자리한 4렬사 묘소가 나타났다. 4렬사 묘소는 앞면을 제외한 삼면을 낮다란 세멘트 담장으로 두르고 그 안에 4렬사를 모시였는데 묘소 앞 오른쪽에 보통사람 키보다 조금 낮은 ‘순국렬사기념비’가 세워져있었다. 순국렬사기념비 뒤로는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차례로 최철호(한청도) 묘소, 리정순(왕현순) 묘소, 손일봉 묘소, 박철동 묘소가 자리하고 묘소 오른쪽마다에는 순국렬사 아무개 묘소라는 비석이 세워져 숙연한 기분으로 이끌었다.

알고 보니 황백평마을 뒤 언덕 조선의용군 4렬사묘는 한국 순국선렬유족회와 황백평촌에서 2002년 12월 26일에 바로 아래켠의 원 묘소를 웃쪽으로 이장하면서 일정한 규모로 새롭게 꾸민 렬사묘였다. 렬사묘 비석마다에는 비문이 새겨져 렬사의 략력을 알리고 있었다. 그 략력을 그대로 적으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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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철호(崔铁镐) 비문:

1915년 6월 19일 대한민국 대전에서 출생. 1935년 중국으로 망명. 남경지구에서 항일전 참전. 1938년 5월 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을 제6기 생으로 졸업하고 한구에서 조선청년 전시복무단에서 항일선전활동. 1938년 10월 10일 중국 무한에서 조선의용군 참군요원으로 참여. 제5전구와 제1전구에서 대적선전활동. 1940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 조선의용군 서안판사처 주임으로 활동…

리정순(李正淳) 비문:

1918년 평안북도에서 출생. 1933년 중국으로 망명. 남경의 의렬단간부학교인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 생으로 졸업. 1936년 2월 민족혁명당조직검사국 직원으로 활동. 광동국립중산대학부중, 중원학교에서 수학. 광동국립중앙륙군군관학교 특별훈련반 졸업. 1938년 10월 10일 중국 무한에서 조선의용군 창립요원으로 참여. 제2지대에 소속되여 북지구에서 활동. 1940년 남령(南岺)으로 이동. 화북지구로 진출 활동.

손일봉(孙一峯) 비문:

1912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 1930년 중국으로 망명.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에 가입. 상해지구에서 한인 일본밀정을 색출 제거. 윤봉길의사 홍구공원 투탄 의거의 공모자 중 1인으로 활동. 1935년 중앙륙군군관학교 군관졸업반 졸업. 동년 10월 광동 제4분교에 재입학. 1939년 졸업. 중국군 포병 53퇀, 56퇀에 파견. 간부훈련교관 및 탄약대장을 력임. 54퇀에 파견되여 전차방위포 련장으로 하남성 호북성 일대에서 대일전투에 수차 참전. 1940년 민족혁명당원으로 조선의용대에 입대. 제1지대 제1전구 사령부 소속으로 활동. 1941년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분대장으로 화북지구의 적후공작 전개.

박철동(朴喆东) 비문:

1915년 대한민국 충청북도에서 출생. 충주(忠州)에서 항일학생운동에 참여. 1931년 2월 중국으로 망명. 1934년 1월 초 락양군관학교 제2기 생으로 입학. 1935년 졸업.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 동년 화남지구로 파견되여 가던 중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일본군에 체포. 일본 규슈(九州)형무소에서 3년 옥고를 당함. 1938년 가을 출옥 후 중국 련성(连城)으로 망명. 1939년 락양에 주둔한 조선의용대에 입대.

최철호-리정순-손일봉-박철동 4렬사의 비문을 돌아보았다. 4렬사의 비문은 계속하여 호가장전투 참가와 희생을 새기면서 1993년에 모두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필자는 안내자로 나선 중년 분과 근 70년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조선의용군 4렬사의 묘소가 잘 모셔져있는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니 그는 당년 조선의용군은 국제주의 전사로 중국의 항일전에서 희생되였으니 그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 모두의 신성한 책임이라고 힘주어 말하였다.

황백평마을의 옛 진기로예변구 제1분구 사령부 건물 입구    /이상 사진 2009년 8월 15일 현지촬영

귀로에서 필자는 중년 분의 안내하에 황백평촌에 자리한 진기로예변구(晋冀鲁豫边区) 제1분구 사령부 집채도 찾아보았다. 정말이지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가고 생각하니 마음이 후련하지가 않았다. 발걸음이 자못 무거워난다. 시간은 어느덧 2009년 8월 15일 오후 1시 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2017년 3월 16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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