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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렬사비8]겨레 항일항공렬사 김원영(3)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03-29 16:03:38 ] 클릭: [ ]

건군 90돐 기념 특별기획-중국대륙의 겨레렬사기념비 (8)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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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사는 그날 밤으로 향공소(乡公所)에서 파견한 사람들에 의해 삼목교(杉木桥)에 주둔한 구항일자위대대로 호송되였다. 구항일자위대대 대대장은 국민당군에서 퇀장으로 있던 라우승(罗友胜)이였다. 라우승은 광서 19년, 즉 1893년 8월 생으로서 호남 쌍봉(双峰) 석우향 마안촌(石牛乡马鞍村)의 한 가난한 집 태생으로 알려진다. 어려서부터 남의 밥을 빌어먹으며 자란 라우승은 소년으로 자라나면서 영풍진의 화풍총(和风总)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라우승은 끌끌한 젊은이로 자라난 후 군대에 가입하더니 북벌전쟁 등 허다한 싸움터를 거치면서 국민당 남경헌병 2퇀 퇀장으로 되고 륙군 소장 직함을 수여받았다. 1937년 11월 18일, 일본군은 7개 정예사단으로 이루어진 12만명을 내몰아 남경 대거 진공을 들이댔다. 그날부터 12월 13일 남경이 함락되기까지 26일간 남경헌병부대는 남경을 지켜선 국민당군 주력부대의 하나였다. 라우승이 이끄는 헌병 2퇀은 남경의 청량산을 지키면서 적들과 수차 판가리싸움을 벌리며 적들을 무리로 쓸어눕혔으나 남경은 끝끝내 일본침략군에 점령되고 말았다.

허다한 회고록들에선 라우승이 남경보위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남경보위전 렬사명부에 오를 번하였다. 2014년 12월에 사학계에서는 그제날 남경보위전의 영웅 라우승이 남경보위전에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되였다. 사실 라우승은 죽지 않았다. 1937년 12월 13일 남경이 함락될 때 그는 가까스로 사경에서 벗어나 천신만고 끝에 새로운 고향인 호남 영풍진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에 전시된 김원영, 전상국 사진과 문자설명.

라우승은 영풍진으로 돌아간 후 영풍진 마가패(马家牌)에 정착하여 지방에 농장을 꾸리였지만 일제놈들을 증오하는 강의한 성격을 버리지 않았다. 1944년 7월 초 오늘의 쌍봉이 일본침략군에 함락된 후 호남성정부에서 사람을 파견하면서 쪽지를 보내왔다. 쪽지에는 라우승이 하산하여 항일자위대를 조직하라는 간곡한 사연이 적혀있었다.

이같이 라우승은 국민당 73군의 패잔세력과 자기 수하의 가노(家丁) 등으로 ‘상향반일자위총대 제3대대’를 조직하고 대대장으로 출마하였다. 제3대대는 300여명의 대오에 근 100자루의 총들을 마련하니 한다 하는 항일의 력량으로 성장하였다. 제3대대는 삼목교의 한 큰 사당을 주둔지로 하면서 정규군이 국민당 73군과 배합하면서 일본침략자들과의 거듭되는 싸움에 나섰다.

라우승은 이런 항일의 남아였다. 그러던 1945년 2월 7일 국민당 지강공군기지의 비행기가 영풍 부근에 추락되고 구양명으로 불리는 국민당비행사는 당지 농민 설맹자에 의해 구조되여 라우승이 지도하는 항일 제3대대에 호송되는 일이 생겨났다. 남경에서 국민당 헌병퇀장까지 한 라우승은 구양명을 보고 시름놓으라면서 최선을 다하여 부대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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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우승은 과연 그 약속을 지키였다. 그는 구양명을 정성다해 돌봐주는 한편 구양명 전이를 빈틈없이 짜고들더니 사흘 되던 날 철저히 화장을 거친 구양명을 담가로 상향현(湘乡县)이 함락된 후 현 안의 련원(涟源) 람전진(蓝田镇)으로 옮겨간 현정부로 호송하였다. 구양명으로 불리운 김원영으로 말하면 구명은인이였다. 라우승의 헌신적인 무장호송이 없었다면 김원영은 쉽사리 지강공군기지로 돌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김원영의 비행기는 적 점령구에 추락되였기에 지강공군기지에서는 일본군의 전리품화를 막으려고 1945년 2월 8일 전문 비행기를 보내여 폭파해버렸다.

바로 그 나날 김원영비행사를 구한 설맹자는 상향현 현장이 보낸 친필편지를 받았다. 편지에서 현장은 설맹자가 용감히 항일비행사를 구한 장거를 높이 치하하면서 람전에 와서 비행사를 만나보라고 하였다. 설맹자가 길을 다그쳐 현정부로 가니 현장이 먼저 그를 만나주고 비행사와의 상봉을 마련해주었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 구내 비림

설맹자와 김원영의 만남은 참으로 감동적이였다. 건강호전중인 김원영은 설맹자의 두 손을 꽉 잡고 연신 은인이라고 불러주었다. 그리고는 자기는 산동사람으로서 이름이 구양명이고 27살이며 금방 미국 진납덕(陈纳德)장군의 부대에서 비행훈련을 받은 후 지금은 중미련합공군 지강 제5대대 29중대에 근무중이라는 것, 2월 7일 그날 전선으로 출격하였다가 일본군의 고사기관총에 기름통이 명중되면서 휘발유가 새여버려 도중에 강박착륙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당신이 제때에 구조했기에 일본군의 수중에 들지 않았다면서 감격을 금치 못했다.

상향현에서는 설맹자의 모범적 행위를 치하하여 필요한 금전장려를 하고도 모자라 그를 현정부에 남기여 일하도록 하였다. 그 뒤 얼마 후 김원영의 몸이 완쾌되자 지강공군기지에서는 비행기를 람전비행장에 보내여 김원영을 기지로 데려갔다.

사실 김원영은 비행기 추락 후 설맹자에 의해 사선에서 구출되였는데 이는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였다. 목숨을 내건 헌신적인 정신이 없다면 도저히 행할수 없는 일이였다. 이 점을 김원영 소속부대에서는 잘 알고 있었다. 공군부대에서는 편지를 보내여 사선에서 용감히 나서 자기들 비행사를 구해준 은인-자랑찬 용사를 만나련다고 알렸다. 이는 한달 푼히 지난 1945년 3월 중순의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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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3월 27일 경 설맹자는 자기의 형님과 상향현정부의 사업일군의 동행하에 서쪽으로 275키로메터 거리를 달려 지강을 찾았다. 그들 일행이 지강공군기지에 이르자 김원영 소속 제29중대의 전체 장병들이 대렬을 지어 맞아주면서 군례를 올렸다. 이어 공군기지 제5대대 대대장이 설맹자를 전문 만나주면서 상상 밖의 침통한 사실을 알렸다. 바로 3일 전 호남 서부의 일본군의 한차례 공중전에서 김원영은 탄알이 고갈되고 적탄에 부상을 입은 형편에서도 비행기를 몰아 적기를 들이받음으로써 장렬히 희생되였다는 비장한 사실이였다. 이 비장한 사실은 설맹자로 보면 전혀 상상 외의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 진실로 보면 김원영이 출격과업을 맡고 리륙하다가 비행기 고장과 추락으로 희생되지 않았음을 알리기도 한다.

지강기지 제5대대 대대장은 소속부대를 대표하여 설맹자에게 후한 금액 장려를 주었다. 그러나 설맹자는 그 돈을 받지 않으면서 공군부대에 남아 근무하면서 구양명 형님의 유지를 이어받아 항일에 힘을 보태겠다고 자원해나섰다. 공군기지에서는 설맹자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설맹자가 문화가 따르지 못하기에 김원영 소속 제29중대 기계병으로 배치해주었다.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 외경

설맹자의 주요 과업은 기계사(机械师)를 도와 공중전에서 돌아오는 전투기들을 보양(保养)하거나 파괴된 부분을 수리하는 일이였다. 그 나날 진납덕장군이 이끄는 비호대와 중국공군은 빈번히 출격하면서 하나 또 하나의 공중전에서 일본 날강도들을 여지없이 부시여 설맹자는 얼마나 어깨가 으쓱하였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반년이 채 되지 않아 일본침략군은 중국항일전에서 전면투항하면서 일제놈들과 싸우는 지강공군기지의 력사적인 사명은 끝났다. 지강공군기지는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는 수항지로 되고 설맹자는 퇴대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설맹자로 말하면 목숨으로 항일비행사를 구한 일과 지강 항일공군기지 근무는 인생 최대의 위안과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설맹자는 이 같은 이왕지사를 거의 꺼내지 않았으며 만년에 이르도록 젊었을 때의 호매함과 남 돕기를 락으로 여기였다. 기강공군기지에서의 한단락 항일력사와 국민당비행사를 구했다는 이 일로 하여 전례없는 문화대혁명의 시련 속에서 력사반혁명으로 몰려 3년 간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후회하지 않았다. 설맹자의 이 억울한 사건은 1980년에 비로소 시정되고 그 후 2002년 8월에 80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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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영의 희생 비보가 전해지자 1945년 3월 이후 중국의 상해, 남경, 중경 등지를 망라한 동포사회에는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 중경에서 비보를 접한 대한민국림시정부 요인들도 례외가 아니였다. 동년 4월 19일 의정원 기록을 보면 “고 김원영 공군 중위에 대하여 삼분 간 묵념이 유하다”라고 적히여 심심한 애도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1945년 광복을 몇달 앞둔 시각에, 지강에서 있은 중국륙군 총사령 하응흠이 중국주둔 일본군 최고지휘관의 대표이고 중국침략군 일본군 부총참모장의 투항서를 받아내는 8월 21일의 수항의식(受降式)도 보지 못하고 총총히 갔으니.

그러나 중국은 중국의 항일전쟁에 나섰다가 희생된 외국인들을 잊지 않았다. 시초의 남경항공렬사공묘가 자금산 북쪽 기슭에 꾸려진 것은 원 국민정부 시기 1932년이고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비가 일어선 것은 1995년 9월일 때 김원영렬사 묘지는 전상국렬사 묘지와 함께 이미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로 옮겨지고 기념비 비림에 한국사람으로 새겨졌다.

항일항공렬사기념비 앞에서  /이상 사진 2013년 9월 19일 현지촬영

남경항일항공렬사공묘에 남경항일항공렬사기념관이 건설되여 개방된 것은 2009년 9월 29일. 기념관은 세계적으로 국제항일항공렬사기념관으로는 처음으로 되는 일로서 중국과 원 쏘련, 미국 등 나라 항일항공렬사 3,304명의 이름이 기재되여있다. 그중 한국사람(조선사람)으로는 전상국, 김원영 두 렬사이니 기념관의 한 자리는 두 렬사 표준사진과 소개로 되여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다.

사천성 성도에서는 2015년 중국인민항일전쟁승리 70돐을 기념하면서 이해 7월 7일부터 ‘동맹자-외적인사 성도에서의 항전기록’ 추모특별전을 가지고 중국대륙에서 항일전에 나선 외국인들을 조명하는 행사를 처음으로 가졌다. 이 행사에서 전상국, 김원영 두 렬사가 떠올랐으니 중국대륙의 항일렬사 추모전에 우리 겨레 전투비행사가 선정된 것은 처음이였다.

전상국렬사여 길이 빛나라 !

김원영렬사여 길이 빛나라!

2015년 7월 초고, 2017년 2월 보충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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