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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20]김하수로인이 들려준 무정장군 이야기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6-08-08 15:11:44 ] 클릭: [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 (20)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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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하면 선참 아름다운 해변도시라는 깊은 인상이 강하게 안겨진다. 지금으로부터 35년전 연변대학 조문학부 시절이니 심양시조선족1중에서 졸업실습을 하던 우리 여러 심양실습소조 동창들은 한달 푼한 졸업실습을 마무리면서 대련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그 시절 대련의 성해공원 바다가를 거닐며 바다라곤 난생처음 보며 즐기였으니 대련에 대한 인상은 너무도 강렬할수 밖에 없나부다. 2015년 9월 9일, 그런 대련을 찾아 연길출발이다. 먼곳으로 놀러 가는 어린애들처럼 마음은 벌써부터 둥둥 뜨기만 한다.

연길-대련행 항공편은 정오 12시 45분, 대련에서 이제 곧 무정장군의 8촌동생 김하수로인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하니 어떤분이실가 궁금하기만 하다. 비행기는 연길에서 910키로메터에 이른다는 하늘거리를 한시간 반에 줄여주더니 대련 주수자국제공항(周水子国际机场)에 무사히 착륙한다. 주수자국제공항 대기실 문밖에서는 이제 뵙게 될 김하수로인의 둘째사위가 기다리고있었다. 김하수로인의 둘째사위는 푸접이 좋은 40대 중반의 서글서글한 사나이였다. 이 사나이가 장인이 되는 김하수로인의 댁과 멀지 않은 대련의 한 도심인 안성상무호텔(安盛商务酒店)에 방을 마련해놓은데서 배낭짐을 쉽게 풀어놓을수가 있었다.

김하수 리옥순 부부(2015년 9월 9일 현지촬영)

이윽고 안성상무호텔에서 멀지 않은 김하수(金河寿,2015년 79세)로인님 댁을 찾았다. 지난세기 70년대와 80년대 그 시절 연길현 세린하공사 당위서기와 조양천진 진장으로 사업한적이 있는 김하수로인 내외는 처음 보는 필자를 살갑게 대하면서 첫 대면에 무정장군의 큼직한 정면 표준사진을 건네였다. 얼마전 연변의 김천희씨한테서 볼 때는 스마트폰에서 보는 사진이였지만 김하수로인이 건네주는 사진은 엄청 큰 사진이였다. 1945년 조선에 귀국한후의 표준사진이였다. 무정장군의 사진으로 김하수로인 내외와 필자는 대번에 구면처럼 가까와지면서 서로의 사이가 스스럼없이 이루어졌다.

이어 무정장군의 10대시절 첫 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여난 아들 김정신(이미 사망)과 그들 일가 사진, 무정의 두번째 부인과의 딸-등연려의 사진, 김하수로인의 가족 등이 환히 펼쳐진다. 사진들을 보면서 김하수로인 가족과 무정장군의 가족관계가 옛말같이 쏟아진다. 모두가 처음 듣는 무정장군 가족과 김하수로인 관련 이야기들이니 1923년 19살의 나이로 압록강을 건너기전 이야기가 그토록 가슴에 닿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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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수로인이 이야기하는 무정장군의 본명은 우리가 알고있는 김무정(金武亭)이 아닌 김병희(金炳禧), 출생은 1905년이라는 기정자료에서 월일까지 옳이 밝혀지는 음력 5월 16일생, 양력으로는 6월 18일이다. 고향은 오늘의 함경북도 청진시 근동리, 의례 가난한 집 자식이겠다고 통설이다싶이 굳어진 설을 뭉때리며 꽤나 부유한 김해 김씨 가정의 장손으로 나타난다. 형제로는 손아래 동생 인동(仁东)에 부친의 존함은 김기준(金基俊)!

무정장군의 재래의 고향설은 함경북도 경성군으로만 밝혀졌다. 통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통설을 가벼이 바로잡은이는 김하수로인님이니 함경북도 경성군에서도 경성군 룡성면 근동리라고 상세히 밝혀진다. 이 룡성면 근동리는 현재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소속 근동리로 알려진다.

아는것만큼 보인다고, 력사속에 들어서면 모든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무정장군이 태여나던 비운의 해-1905년의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룡성면 근동리라고 불렸다. 경성군은 함경북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한개 군으로서 1940년 3월 이후 주변의 부령군 청암면 일부와 경성군 라남읍, 룡성면이 청진에 귀속되면서 지명부름을 달리하게 되였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조선 4대 도시의 하나인 청진시는 행정구역이 7구역 93동, 14개 리로 나타나면서 그제날 경성군 룡성면 근동리는 오늘날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松坪区域芹洞里)로 알려지게 되였다.

김하수로인의 구술에 따르면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마음씨는 착하나 성격이 류달리 급하고 과격한 사람이라고 한다. 유년시절의 무정이도 자라면서 아버지의 성격을 쏙 빼닮았으니 후일 중국의 홍군시절과 팔로군시절, 태항산 조선의용군시절, 조선 귀국후의 성격은 유년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성격의 계속이였다. 이 성격은 무정이를 홍3군단 총지휘 팽덕회와 지기로 만들어주며 홍군총부 작전과장,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키워도 주었지만, 이 성격은 또 무정이를 비운의 인물로 만들어준 토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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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작농을 둘만치 가정이 부유한 편인데서 무정은 고향 룡성면 근동리에서 무난히 6년제 천마학교를 다니다가 졸업후 멀지 않은 옛 고을-경성군에 가서 경성농업학교를 다닐수가 있었다. 이후 커서 고향에서 가업을 빛내라고 한 아버지의 가르침 같았다. 하지만 그 시절 무정은 필경 10대 초반의 소년이여서 아버지 김기준은 시름을 놓지 못하다가 녀동생되는 무정의 고모가 경성에 가서 무정의 곁을 지켜주어서야 안심하더라고 동을 단다. 물론 김하수로인도 할아버지와 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성격을 물려받은 무정은 10대의 나이에 잡아들면서 눈에 거슬리면 참지 못하는 강인한 성격으로 번져갔다. 그 시절 경성농업학교 교장은 일본인교장인데 소년 무정에게는 정말이지 원쑤 쪽발이놈으로 보였다. 1905년 을사조약은 몰랐다지만 1910년 이른바 “한일합방조약”으로 인한 나라의 망국은 자라면서 가슴에 한으로 맺혔다. 일본사람들만 보면 눈에 불이 일었다. 무정은 학생들의 선두에서 일본인교장 구축운동을 주도하다가 일제놈들의 눈에 났다. 무정은 부득이 경성농업학교를 떠나지 않을수 없었다.

무정장군의 조선 친지들 사진. 앞으로 두번째 줄 오른쪽 세번째가 무정장군의 아들 김정신씨.  /사진 김하수 제공

장손인 무정은 아버지의 지지로 멀리 서울로 남하하여 경신중학교에 들어갔다. 전해지는 서울 기독교중학교설과 중앙고등보통학교(즉 중앙고보)설이 아닌 경신중학교라고 김하수로인은 찍어 말한다. 경신중학교(儆新中学校)는 오늘날에도 서울 종로구에 현존하는 100여년 력사를 가진 사립중학교로서 서양식 학교설치의 일환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였음을 보여주고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오늘의 한국땅을 처음 밟은것은 1885년으로 거스른다. 1883에 인천항이 새로 축조되여 개항하면서 1885년 4월에 미국 북감리교회 아펜젤러 부부와 북장교교회 목사가 인천에 첫 발을 내디디였다. 이어 아펜젤러 선교사는 서울 중구 정동 34번지의 한옥을 빌려 최초의 근대교육기관 배재학당을 세우게 되고, 역시 이해 1885년에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 H.G.언더우드(원두우)가 경신중학교의 전신인 “언더우드 학당”을 세우고 1905년 경신학교로 교명을 개명하기에 이르렀다. 다음해 1886년에 다른 미국 선교사 루이스 스크랜부인이 또 배재학당 린근에 최초의 녀성전용교육기관-리화학당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보면 경신중학교는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 최초의 녀성교육기관 리화학당과 더불어 그 이름이 뜨르르하다. 그러나 이런 최초의 근대 학교들은 조선 황실과 부유한 계층의 귀족자녀들만 다닐수 있었을뿐 가난한 집 자식들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하였다. 1994년 10월 9일자 《동아일보》가 보여주는 1900년에 배재학당 정구부 학생들이 당시에는 낯설기만 하던 정구경기를 치르는 사진이 그러하고, 1900년대초 전차 타고 소풍 가는 리화학당 학생들 사진이 그러하다. 가난한 집 자식들에게는 그림의 떡일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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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10년대에 이르러서도 가난한 집 자식들은 학교다니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부유하다고 알려진 무정의 김해 김씨 가족한테는 자식공부가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서울의 경신중학교에서도 무정의 주위에 같은 또래들이 뭉치더니 무정은 점차 학생수령으로 떠올랐다. 15세 되는 해 1919년 전 민족적인 만세운동-3.1운동이 터져오르며 무정은 완연 다른 사람으로 번져갔다. 무정은 서울의 여러 중학교와 한맘으로 배합하면서 경신중학교, 서울학생 3.1운동의 전렬에서 나아갔다. 무정은 또 일제놈들에 의해 학교에서 추방당할 신세가 되고 단기적이나마 무정한 옥살이가 기다리고있었다.

김하수로인은 또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무정이 팔로군 시절 만난 중국인 등기는 첫 부인이 아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 무정의 첫 부인은 10대 중반이후 고향에서 례를 올린 조선녀성이란다. 이 첫 부인의 이름은 무엇인지 김하수로인도 모르고있었고, 부부를 이룬 그해도 딱히 알수가 없지만 16~17세인 1920년~1921년 경임은 틀림이 없는것 같다. 조선의 그 시절은 남녀가 15살쯤이면 의례 장가들고 시집가야 하는 나이, 무정도 부모님들의 주선으로 자기 또래 조선녀자를 안해로 맞아들이니 얼마후 태기가 있다. 열달 잉태만에 아기가 태여나고 고추가 달렸다고 정신(正新)이라고 이름지어주었다.

무정은 서울에서 중학교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소년시절로부터 청춘시절로의 과도기를 거쳤다. 어느덧 10대 후반의 유망한 젊은이로 성장한 무정은 서울 학생운동의 수령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국내에 들어와 사람을 물색중인 독립운동가이고 사회주의자인 려운형선생의 눈에 들었다. 일제놈들의 요시찰 대상으로 점찍힌 무정은 려운형선생의 영향으로 드디여 중국행을 선택하게 되였다.

김하수로인은 계속하여 무정의 중국행을 두고 가족에서도 몰랐다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도 조직과 개인, 가족 모두에 련루되는 일이니 비밀에 붙인 모양인데 무정의 가족에서는 일본류학으로 알고있었다고 한다.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씨는 아들의 월사금을 다달이 일본 관련 주소로 부치지만 번마다 돌아오군 하였다. 하도나 이상하여 김기준씨는 현해탄(玄海滩) 넘어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아들의 종적은 묘연하기만 하다. 귀로에서 김기준씨는 즐기는 의학서적 몇책을 품에 지니고 오다가 모두 빼앗겨야 했단다. 어찌하든 무정의 일본류학으로 인기된 일인데, 그후도 김기준씨는 서울로 다달이 월사금을 부치지만 그상이 장상이다. 무정의 할아버지는 다달이 돌아오는 월사금을 모아서 황페한 린근 공동묘지를 사서 여러가지 과일나무를 심고 덩실한 2층집까지 지을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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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장군의 딸 등연려. 한국 《신동아》(1993년 3월호)에 실린 글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 김하수로인네와 무정네 친척사이를 보면 무정네가 벌수가 높다고 한다. 앞의 련재글에서도 이미 스쳤다싶이 김하수의 로할아버지와 무정의 로할아버지가 친형제간일 때 김하수의 할아버지 김우공(金禹公)과 무정의 할아버지는 사촌간, 김하수의 아버지 김현사(金铉仕)와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벌써 6촌간이다. 그러니 무정은 김하수의 아버지 김현사한테 7촌 조카로 된다.

“이 친척관계 사이는 로인님의 큰따님한테서 이미 들어 알고있습니다. 다시 들으니 무정장군네와의 친척관계가 보다 잘 알려집니다. 로인님의 큰따님에 의하면 로인님은 1990년인가 조선친척방문길에 올랐다고 하더군요. 그때 이야기가 많으리라고 보는데요.”

“아아, 딸애한테서 들었군요. 1990년 6월 22일, 친척방문차 조선 청진땅을 다시 밟게 되였습니다. 석달을 기한으로 하는 나 혼자만의 근 50년만의 고향방문이구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소시적 고향의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근동리 고향땅 사이로 흘러내리는 부령강은 여전하더군요. 부령강 동쪽가에 서있노라니까 부령강 서쪽 언덕가 무정형님의 본가쪽이 환히 안겨왔습니다. 지금은 옛 2층집이며 과수원이며 모두가 력사의 언덕으로 사라졌지만 명절이나 집안내 길일에 무정형님의 본가로 드나들던 유년시절 기억만은 너무나도 또렷하지요.”

김하수로인은 흥이 도도하여 25년전의 고향방문이야기를 술술 털어놓았다. 청진시가지와 근동리에서 이미 70대 초반에 들어선 무정형님의 아들 김정신씨와 여러번 마주앉았다고 한다. 그때 김하수씨는 금방 50대 초반을 잡은데서 김정신씨와는 근 20년 격차를 두고있었다. 그래도 김정신은 자기가 조카라고 김하수씨를 삼촌이라고 깍듯이 대해주었다. 김하수씨뿐만아니라 자기보다 몇살 이상인 아버지 무정의 셋째부인 김영숙(1916년생)씨도 “어머니”라고 존대하며 스스럼없이 부르는 김정신씨다.

“그때 조카 김정신씨한테서 들은 이야깁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김하수로인은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문을 이어갔다.

김정신씨에 따르면 세상 모르던 두세살때 헤여진 아버지 무정을 다시 만난건 20대 초반을 잡던 1945년 광복직후의 일이다. 아버지는 아들 정신이와 너 어머니는 잘 있는가고 물었고, 정신이는 어머니는 네살때 사망되였다고 말씀드렸다. 무정장군은 고향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이윽토록 말씀이 없으시다가 너 어머니와 너에게 미안하다며 거듭 되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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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후 해방된 강산에서 김정신은 한때 조선 최고검찰원 검사로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있다. 김하수의 사촌형님 김일수는 조선 최고재판소 판사였다면 무정의 아버지 김기준은 나라의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삶의 휘황한 한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조선전쟁때인 1950년 겨울에는 김하수네가 생활하는 두만강을 넘어 중국땅 연길현 조양천진 근로촌에 와서 한 열흘 지내다가 목단강으로 떠난적도 있었다. 그후 김정신은 청진시 조선공장(즉 배공장) 지배인으로 뛰다가 나이가 들면서 물건구입원으로 지내기도 하였다.

“김정신씨의 후대는 어떠한지요?”

“김정신은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그 아들한테 딸 하나가 있었으니 무정장군과 첫 부인사이 아들과 손녀 이야기입니다.”

서로간 이야기가 여기까지 흐르자 김하수로인은 김정신씨한테서 들었다며 6년제 천마학교시절 무정이가 말을 타고 학교에 다녔다는 솔깃한 이야기, 김정신이 청진의 자댁에서 아버지 무정의 유품이라며 옥돌 술잔을 꺼내보이던 귀중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날 정신씨는 그 옥돌 술잔에 술을 따라 권하면서 가끔 아버지를 떠올리군 하였다고 동을 달았다.

김하수씨는 김정신과의 이야기에서 해방후 50년대 초반인가 주덕동지의 배려와 지시로 해방군 총참모부의 림창배라는 조선족이 무정장군과 두번째 중국부인과의 소생인 어린 딸 등연려와 아들 등연진를 보살피며 조선어를 배워주던 이야기도 곁들였다. 무정장군이 딸애 등연려에게 지어준 본명은 소옥(肖玉)이고 이들 자식과 조선의 첫부인, 셋째부인의 자식, 김하수네와 아무런 련락과 거래가 없다는 이야기도 섞였다.

“로인님은 처음에 무정장군의 본명은 무정이 아닌 김병희라고 했지요. 조선이름 김병희가 무정으로 바뀌였으니 그럴만한 유래가 있겠는데요.”

“유래가 있지요.”

김하수로인은 시원히 대답을 주면서 조선친척방문때 김정신한테서 들은 이야기라며 무정 이름의 유래를 이어갔다.

무정이란 부름의 출현은 중국 보정강무학당을 다니던 1924년의 이야기로 거스른다. 보정강무학당 그 시절 무정은 군벌혼전을 이룬 국민당과 동북군 사이 남구전역(南口战役, 북평 13릉 서부에서 벌어짐)과 천진공격전에 참가하여 군공을 세우게 되였다. 너무도 잘 싸워 소문이 뜨르르했나부다.

전투가 끝난후 중국인 상관은 무정을 찾더니 무정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당신은 앞으로 장군이 될 사람인데 이름이 촌스럽다며 “무정”(武亭)이라는 무명(武名)을 하사하였다. 무자는 무사라는 무요, 정자는 정자라는 정이라 장군이 되여 정자처럼 우뚝 솟으라는 뜻이 깃들었다. 그러면서 상관은 당시로는 귀중한 회중시계와 붓, 벼루, 먹 등을 기념으로 주면서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장군이 될 사람에게는 붓과 벼루, 먹이 있어야 한다는것이 상관의 뜻이다. 이야기는 무정이 보정강무학당을 졸업하기전 1924년의 일, 정신은 광복후 귀국한 아버지 무정한테서 “무정”이름에 깃든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며 삼촌 김하수씨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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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시간도 두어시간이 훌쩍 지나며 무정장군 관련 이야기도 비슷하게 되여갔다. 이제는 화제를 바꿀 때도 되기에 김하수로인네가 조선의 고향땅을 떠나, 김씨 친척들을 떠나 중국으로의 이주행에 오른데로 화제를 돌렸다. 다시 말하면 김하수로인의 아버지네 이주행이다.

김하수로인의 아버지는 애명이 철봉이고 항렬에서 둘째였다. 김현사씨네 형제남매는 남자 셋에 녀자 하나로서 맏이가 김현태(태룡이라고도 한다)일 때 둘째는 김현사, 셋째가 김현세이고 김하수의 고모 애명은 김봉옥(후에 김화자로 개명)으로 불리였다. 이들은 무정장군과 마찬가지로 김해김씨이고, 이들 김해김씨네는 옛날 경성군 근동리, 지금의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에 모여 살았다.

그러던 김하수씨는 지난세기 30년대 큰아버지 김현태와 삼촌 김현세랑 먼저 북간도로 부르던 오늘의 연변에 이주한 이야기, 자기들도 뒤따라 두만강을 건너 그 시절 조양천 삼성촌과 연길현 도목구(倒木沟)에서 아버지(1917년 조선 근동리 출생)가 항일소선대원으로 활동한 이야기, 할아버지 김우공(金禹公) 내외간이랑, 큰아버지랑, 삼촌이랑 온 가족이 항일가족으로 항일을 성원하여 싸우던 이야기, 항일유격대가 지방을 떠나간후 큰아버지랑 일제놈들의 박해로 조선 고향으로 가서 10년간 살다가 1943년에 다시 연변으로 재이주한 이야기, 큰아버지 김현태네가 광복후 1948년에 조선의 고향으로 재이주한 이야기들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보다 젊었을 때의 김하수씨 가족사진  /사진 김하수 제공

이같이 보면 이들 조선 근동리 김해김씨 가족들에는 중국땅에서 항일에 몸을 내번진이들이 많았다. 무정장군이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홍군대오와 팔로군에서 싸우다가 조선의용군 사령원으로 태항산항일근거지에서 피어린 항일운동에 나섰을 때 이들 무정장군의 6촌, 8촌 형제들은 동북의 연변땅에서 항일운동에 투신하며 일본침략자들과 싸워나갔다. 비록 연변이란 지방의 이름없는 항일투사들이였지만 항일은 어디까지나 항일운동이였다.

나중에 궁금한 문제 하나를 터놓아보았다. 무정장군의 친지들이면서 왜서 해방후, 더우기 개혁개방후 30여년이 흐르면서 인제야 알려지는가 하는 문제였다. 원인은 간단했다. 광복직후 무정장군이 조선으로 귀국했고, 또 일찍 사망된데다가 조선의 항일혁명가이니 나서지 않았었다. 하지만 무정장군은 중국공산당 당원이고, 중국의 홍군대오와 팔로군에서 활동한 이름난 항일장령이고, 중국 포병의 시조의 한분으로서 중문 글과 연구로 널리 알려지는분인데 너무 조용히 살아왔다고 하니 중국조선족 력사학계에서나 관련부문에서 찾는이가 없었다고 한다.

모르니 서로 찾지 못한 흘러간 이야기, 다행히도 지난해 2015년 8월에 알려져 중국작가협회 국가급소수민족중점작품 지원프로젝트이고 민족출판사 중점기획도서인 평전 《무정장군》에 들어갔고, 조선문 신문들인 《연변일보》와 《길림신문》을 통하여, 여러 조선문 인터넷과 위챗들을 통하여 중국조선족사회에 보다 널리 알려지니 정녕 불행중 다행이라 하겠다.

2016년 7월 19일 위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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