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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홍군7]홍군비행사 진덕근과 "맑스"호 비행기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5-06 13:07:18 ] 클릭: [ ]

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 (7)

■ 리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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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0일, 중앙혁명근거지의 경제난을 해결하고저 모택동은 중국로농홍군 동로군을 지휘하여 복건 장주전역을 벌렸다. 그 전과는 그야말로 휘황하여 웃음이 절로 난다. 국민당군 장병 1600여명을 살상포로하고 보총 2300여자루, 기관총 9정, 대포 여러문, 각종 탄알과 포탄 만 4000여발, 전화기 10부를 로획하였으니 대단한 전과가 아닐수 없다. 그중 비행기가 두대였으니 비행기 한대는 이미 파손되여 쓸수 없다손 치더라도 한대는 수리만 하면 얼마든지 쓸수 있었다. 이 비행기는 국민당 49사 사장이고 복건남부(闽南) 항공처 처장인 장정(张贞)의 교련용 폭격기로 알려지면서 홍군 동로군 관련 숱한 이야기를 남기고있다.

1930년대 초반, 진덕근 소속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경리부 군사기계과 홍군장병들. (자료사진)

4월 12일, 국민당 49사 사장 장정은 홍군부대가 룡암일대에서 활약하자 홍군의 허실을 몰라 교련용 폭격기 한대를 강서 서금과 복건 장주 사이에 위치한 룡암쪽에 보내여 싸움터를 정찰하면서 저들의 싸움을 도와나서도록 명령하였다. 홍군 동로군의 공세가 맹렬하고 진전이 신속한데서 적기는 별로 맥을 쓰지 못하다가 장주성(漳州城) 60-70리쯤 되는 룡산(龙山)상공에 이르러 홍1군단 선두부대인 홍11사 33퇀과 맞띄우게 되였다. 관련자료에 따르면 이 비행기가 룡산 상공에 이르렀을 때 홍33퇀 부퇀장 진동생(陈冬生)이 기관총으로 비행기를 사격하여 적기가 격중되고 비행원은 부상을 입고 핍박에 의해 착륙하였지만 얼마후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1932년 4월 장주전역에서 로획한 적기는 홍33군 부퇀장 진동생과 기관총패 패장 주장승(周长胜), 기관총수 등의 공동소행이였다. 중광넷(中广网)의 기자 모갱위의 관련기사—“해방군에서 최초로 적기를 격추한 사수”(解放军最早击落敌机的射手, 中广网, 2003-12-09)는 “부퇀장 진동생이 기관총패 패장 주장승과 기관총사수 류문(刘文)을 지휘하여 비행기를 격추하였다. 한정의 기관총은 5명 내지 3명으로 조작되는데 하늘에 대고 비행기를 사격할 때는 사람의 어깨우에 놓고 쏘게 된다. 기관총사수의 이름을 몰라 군대내 관련 문자기재들은 모두 ‘기관총사수’로 대체하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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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문이란 누구일가? 모경위의 기사를 보면 류문의 종적을 추적한 사람은 해방군사연구 장춘주재 모부 원 군사조사연구원이고 현대전쟁사 편집사무실 주임인 소계군(肖启群)이고 2003년 8월 장춘주재 모 홍군퇀의 전투실기로 된 《철군풍운(铁军风云)》을 출판하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청운가(青云街)에서 한 전사가 이 책을 보고있었다. 그때 어떤 안로인이 다가와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다가 남편 류문의 사적인, 기관총수가 적기를 격추하는 부분을 보고 너무도 격동된 나머지 련속 “이 책을 누가 썼는가?”고 물었다.

마침 청운가에 살고있던 소계군이 이들 말소리를 듣고 걸어와 이 책은 자기가 썼다고 말하게 되였다. 이렇게 두 로인이 서로 만나게 되였으니 바깥로인인 소계군은 줄곧 “중국인민해방군 력사상 최초로 적기를 격추”한 기관총수를 찾던 사람이고 안로인은 1932년 4월 장주전역에서 적기를 격추한 류문의 안해 후문(侯文)이였다. 후문은 2003년에 82세로서 알고보니 그의 남편 류문은 원래 길림성공안청 청장으로 사업했고 1999년 4월에 별세하였었다. 이는 모두 모경위의 기사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모경위의 기사는 모두 적기가 격추된것으로 되여있어 유감을 남기기도 한다. 엄격한 의미로 말하면 격추는 실제사실과 어긋난다. 적기는 비록 기체에 9개의 탄알을 맞았지만 추락할 정도로 엄중한 파손이 아니였다. 문제는 적비행사가 중상을 입은데 있다.

홍33퇀 부퇀장 진동생(陈冬生)이 기관총패를 지휘하고 기관총수 류문이 비행기를 사격하자 방비를 소홀히 한 적비행사는 허리부위에 중상을 입었다. 적비행사는 가까스로 비행기를 장주 교남(桥南)비행장까지 몰고가 착륙시켰으나 얼마후 숨을 거두었다. 4월 20일, 아군이 장주를 점령하자 적기는 아군의 로획물로 되였다. 아군은 비행기를 “맑스”호(“马克思”号)로 명명하였다. 홍군 기관총수 류문이 기관총으로 적비행사를 중상입혔기에 이 비행기는 아군의 로획물로 되고 홍군의 조선인 비행사 진덕근과 이어지는 계기가 되였다.

동로군 사령부에서는 전보로 중앙쏘베트구역 중앙국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 장주전역의 승리와 비행기 로획 소식을 보고하면서 수리인원을 바랐다. 기쁜 소식에 접한 중앙국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인차 산하 총경리부 군사기계과 과장 진덕근(陈德勤, 조선인)에게 긴급명령을 내렸다. 다시 말하면 쏘베트구역 중앙국 서기인 주은래의 직접적인 명령이였다. 따라서 공청단강서성위 선전부장 장애평이 명령을 받고 중앙혁명근거지의 만명에 달하는 지방적위대와 소선대원들을 이끌어 서금 엽평 비행장 수건에 떨쳐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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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스”호 비행기를 구경하는 홍군장병들. (자료사진)
알고보면 진덕근의 본명은 리한설(李汉卨, 1902년생)이고 고향은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무한리(咸镜北道锺城郡渔郎面武汉里)이며 1929년 5월 서울 여의도에 세운 조선비행학교 출신이였다. 그후 리한설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후일 홍군음악가로 불리운 최음파 등과 같이 중공상해한인지부, 류호한인호제회, 상해한인반제동맹 등에서 활동하다가 중앙혁명근거지에 파견되여 중앙 무선전부분 기사, 서금 국가은행 통계로 뛰다가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경리부 군사기계과(军械科) 과장이라는 홍군장령 직무를 맡아나섰다. 그 시절 총경리부 군사기계과를 홍군의 어느 급별로 인정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 보면 상당히 높은 군직으로 헤아려진다.

중국 홍군 력사에서 경리부란 이름이 처음 나타난것이 1930년이다. 이해 1월, 중공중앙 군사부에서는 “중국로농홍군편제초안”을 반포하면서 군위 산하에 참모부와 총정치부, 경리위생부(즉 후근부)를 두었다. 1년후인 1931년 1월에 경리위생부를 경리부로 개칭하였다. 1931년 11월에 소집된 중화쏘베트 제1차 대표대회에서 중화쏘베트 중앙혁명군사위원회가 산생하면서 중앙군위는 중공중앙 군사부를 대체하였고 군위 산하에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경리부를 두었다. 원래의 경리부가 총경리부로 부름을 달리한것이 1931년 11월의 일이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경리부면 오늘의 중앙군위 총후근부와 같으니 총경리부 아래 급별이면 상당한 장군급 급별이 아닐수 없다. 그러던 1932년 4월 하순의 어느날, 진덕근은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명령을 받고 급히 서금 동쪽 멀리 복건 장주(漳州)로 달려갔다.

진덕근은 조선비행학교 출신으로서 비행술은 물론 비행기 분해와 조립, 수리 등 면의 기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복건 장주로 달려간 조선인 진덕근은 비행기 한대를 어렵지 않게 수리해냈다. 홍1군단 정위 섭영진(聂荣臻)은 진덕근이 모는 비행기에 올라 복건 남부의 삼각주 몇개 주요 도시에 홍군의 선전삐라를 살포하고 무사히 장주에 돌아왔다. 홍군력사의 첫 비행기가 하늘에 오름이요, 첫 비행기 선전삐라의 살포이다. 이를 두고 이 땅의 겨레사회에서는 홍군장정 도중에 이름모를 한 조선인 비행사가 비행기를 몰고 하늘에 올라 홍군삐라를 살포한적이 있다고 오인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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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후 5월 1일, 홍군부대에서는 장주의 중산공원에서 만여명의 군민들이 참가한 “홍군장주공략승리군민경축대회”를 가졌다. 군민경축대회에서는 군중들에게 공산당의 주장과 정책을 선전하면서 국민당의 반공반인민적 죄행을 성토하였다. 이럴 때 쌍날개를 가진 경편비행기 한대가 경축회장 상공에 나타나자 국민당 비행기로 오인한 대회장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사전에 홍군의 비행기임을 알리지 않은 결과였다. 홍군의 선전원들이 급히 확성기로 “홍군의 비행기이니 놀라지 말라”고 거듭 선전해서야 경축회장은 평정을 되찾았다.

이어 홍군비행기가 중산공원 상공을 선회하며 “복건 남부 군중들에게 드리는 글”(告闽南群众书) 선전삐라를 살포하여 장주는 온통 승리의 환락속에 잠겼다. 이날 비행기를 몰고 장주하늘에 오른이가 다름아닌 우리 겨레 진덕근이였다. 그날의 장주전역에 참가한 원 복주군구 사령원 양성무(杨成武)는 후날 이 비행기를 회고하면서 그날의 비행기는 “장주전역에서 우리 군이 로획한 첫 비행기이고 우리 군이 처음으로 비행기로 공중선전을 벌린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장주전역에서 로획하고 진덕근이 수리해 운전한 “맑스”호 비행기.

홍1군단 군단장 림표(왼쪽)와 정치위원 섭영진(오른쪽)이 비행기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자료사진)

1932년 5월 1일, 조선인 진덕근이 몰고 하늘에 날아오른 비행기는 구룡강(九龙江) 남안 비행장에 내렸다. 비행기를 보겠다는 군민들이 하도 많아 홍군 동로군 사령부에서는 장주성내의 기관, 부대들에서 조직적으로 한번씩 참관하도록 결정지었다. 그리고는 사진관의 사진사를 청하여 비행기를 참관하는 홍군장병들 사진을 찍게 하였다. 홍1군단 림표와 섭영진(聂荣臻)도 비행기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 력사적의의를 가진 사진으로 되였다. 오늘날 이 사진은 국가군사박물관과 모주석께서 홍군을 이끌어 공략한 장주기념관의 중요한 문물로 남아있다.

진덕근은 진짜 큰일을 해냈다. 그날 이후 진덕근은 다시 명령을 받고 장주서 서금으로 날다가 방향상의 편차 등으로 강서 서금 남부의 회창(会昌) 부근의 밭에 떨어졌고, 비행기 기체는 파손되고 진덕근은 부상을 당하게 되였다. 당지 적위대원들은 비행기를 분해하여 서금으로 운반하였지만 비행기는 연료와 부속품 등으로 다시 쓰지 못했다. 일은 이쯤 끝나도 모르겠는데 이른바 “좌”경로선이 통치하던 그 시절이라 진덕근은 방향상의 편차로 인한 기술문제가 아니라 정치상의 문제로 락인받고 홍군대오내에서 비판, 투쟁을 받게 되였으니 그의 삶은 뜻하지 않은 비행기 추락으로 완전히 엉망으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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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진덕근의 진실한 이야기가 대만출신 채효건(蔡孝乾, 후에 반변)의 회고록 《대만인의 장정기록(台湾人的长征纪录)》(海峡学术出版社, 2002. 3 출판)에 그대로 남아 전해진다. 대만인의 장정기록에 의하면 모택동의 친동생인 모택담(毛泽覃)은 비행기 실패로 “최후엄중경고”(당내처분)를 받은 조선청년항공원 진덕근을 아주 동정하였다고 한다. 중공반제동맹지부에서 진덕근문제를 토론할 때 모택담은 언제나 떳떳하게 좌경로선이 통치하는 중앙은 사실의 진상을 알지 못하고있으며 진덕근 비행기 실패의 객관적원인을 모르고있다고 하면서 비행기가 추락한 지점이 홍백변계(红白交界)의 밭이라는 근거가 그들의 유일한 증거라고 지적하였다. 모택담은 또 진덕근을 데리고 형님 모택동을 찾았고, 진덕근은 모택동동지께 비행기 추락 경과를 상세히 회보드렸다. 이때의 모택동은 좌경로선의 통치자들에 의해 홍군에서의 지도권을 배제당하였기에 어찌할수가 없었다. 다만 진덕근이 직접 중앙을 찾아 신소하라고 할뿐이였다.

진덕근은 비행기 추락 문제로 “최후엄중경고”란 당내처분을 받고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경리부 군사기계과(军械科) 과장이라는 홍군장령 신분을 박탈당하였다. 1930년 봄, 오늘의 호북 경내인 악예완변구(鄂豫皖边区)에서 국민당 비행사 룡문광(龙文光)이 모는 한 비행기가 기름소모 등 긴급착륙으로 홍군의 품으로 넘어왔다가 “레닌”호로 명명된후의 두번째 홍군비행기 “맑스”호건만 어찌할수가 없다. 그래도 순수 홍군비행사이고 당내처분이라고 홍군학교에 배치하여 군사교관으로 일하게 하였다.

진덕근이 군사교관으로 근무한 홍군학교 학원 합영 (자료사진)

진덕근은 홍3군단에서 활동하던 무정이 홍군학교로 소환되던 그 시절에 서금성내 홍군학교 양씨사당에 들어서게 되였다. 진덕근의 사실을 알고 분노하였지만 무정으로서는 도와줄 힘이 없었다. 그때 좌경로선의 통치는 말그대로 질식할 지경이였다. 모택동을 홍군에서 배제하더니 조선인 홍군장령마저 가만두지 않았다. 홍군은 또 어떤가, 그후의 일이지만 홍군은 제5차 반포위토벌전에서 실패하여 부득불 중앙혁명근거지를 떠나 장정길에 올라야만 했다.

홍군학교에는 무정외에도 홍군학교 문화교원 겸 구락부 주요 성원으로 뛰는 홍군음악가 최음파가 활동하고있었다. 무정과 진덕근, 최음파는 홍군학교의 세 조선인 교관이였으니 그들 셋은 서로 때도 시도 없이 어울리며 돌아갔다. 홍군학교 경력으로 보면 최음파(1904년생)가 무정(1905년생)이나 진덕근(1902년생)보다 단연 선배였지만 홍군의 경력에서는 최음파가 이들 둘보다 한참 후배였다.

홍군학교에서 무정과 최음파는 진덕근을 위로해주며 그의 내심고충을 덜어주기에 최선을 다했다. 그것만이 진덕근에 대한 동지적 의리이고 겨레의 정이였다. 무정과 최음파는 진덕근을 리해하고 믿어주며 역경을 함께 나누는 전우이며 지기였다. 그뒤 1934년 10월에 무정은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길에 나섰지만 진덕근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서금에 남아야 했다. 1935년 봄 중앙혁명근거지에 남은 류수부대-홍군대오가 아홉갈래로 나뉘여 포위를 돌파할 때 진덕근은 홍군음악가 최음파와 더불어 그 대오속에 섞였다.

2016년 4월 23일 정리, 강남 두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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