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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기획23]“이젠 농사일이 나의 직업입니다”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4-12 17:54:34 ] 클릭: [ ]

대형계렬보도 “두만강은 말한다”(23)

직업농민으로 돌아온 “농민2세”

“농기계전문가”된 농장주 리권호

연변은 지금 전통농업이 현대농업에로의 대전환속에서 전국의 앞장에 서고있다. 연변의 가정농장은 지난해까지 2915개로 늘어났다. 이는 2011년의 199개에 비하면 엄청난 수자이다. 가정농장을 포괄한 신형생산경영주체가 1만여개로 발전해 60.2%(23만헥타르)의 경작지가 류전 및 농장경영화를 실현했고 기계화수준이 80%이상에 달했다.

이와 더불어 높은 전업기능과 경영관리능력을 구비한 현대농업종사자 —신형직업농민들이 용솟음쳐나오고있다.

그 신형직업농민들가운데 룡정시“동성용진동산툰입쌀전업농장” 농장주 리권호(1983년생) 가 서있다. 그는 룡정시의 514개 신형생산경영주체가운데서 등장한 몇몇 “80”후 농장주들의 대표적 인물이다. 일전에 기자는 룡정시 동성용진 룡산촌에 가서 리권호를 만나보았다.

“동성용진동산툰입쌀전업농장”에서는 논 30헥타르와 밭 30헥타르를 다루고있다. 농장은 동성용진 룡산촌에 합병된 원 영성촌의 제1촌민소조이자 지금의 룡산촌 제1촌민소조에 있다. 모아산의 맨 동쪽 기슭, 세전이벌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해있다. 호적상 30세대가 살고있는 이 촌민소조에는 지금 로약자 10세대가 남아있고 농사짓는 사람은 리권호 뿐이다. 그러니 리권호의 농장에서 제1촌민소조의 전부의 경작지를 다루고있는 셈이다.

리권호네 집마당에는 대형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그것은 농기계창고였다. 그안에는 벼수확기, 옥수수수확기, 옥수수탈곡기, 밭갈이기계(深松机), 뜨락또르, 지게차,파종기 등 여러가지 농기구와 수리기구들로 꽉 차있었다. 농장의 경작지는 거의 100%로 기계화를 실현하였다.

권호네는 집이 두채였다. 새집은 살림집이고 다른 한채는 권호가 채용하는 로동자들의 숙사였다. 농망기엔 로동자를 12명정도 채용하는데 그중 2, 3명은 농기계 작업공이다. 이미 몇몇 로동자들이 왔다. 얽움에 옥수수대가 잘 베여진다며 리권호는 3월말부터 옥수수 밭정리에 들어갔다.

“이젠 농사일이 나의 직업입니다”

리권호는 기자에게 자랑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농장을 올해 2년째 경영한다. 원래는 그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등록되였던 농장인데 지난해에 리권호의 이름으로 변경되였다. 감농군인 아버지(60세)가 지난해 2월의 어느날,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는바람에 5년간 한국에서 로무생활을 하던 리권호는 급기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내가 이 농장을 맡아 할것이라 믿고있었습니다. 일찍 아버지와 약속해놓은 일이였으니깐요. 그런데 내가 돌아올 예정시간을 두달 앞두고 갑자기 돌아가실줄은... ”

너무나도 어이없고 가슴이 미여져 권호는 한참 말을 잇지 못한다.

새집도, 그 많은 농기구도 다 권호의 아버지가 하나하나 마련해놓은것이다. 권호가 집을 한번씩 올 때나 농기계를 하나씩 갖출 때마다 아버지는 번번이 권호한테 전화를 걸어 혜농정책을 자랑하군 했다. 그러면서 늘 “얘네(농기구)들은 다 네것이다.”라며 농사대업을 이을 아들 권호가 있음으로하여 마음이 든든했다.

 아들이 외롭게 농사짓는다며 가슴아파하면서도 권호가 있어서 든든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권호의 어머니, 권호의 농사 고참(高参)이란다.

권호네는 할아버지때부터 영성에서 살아온 토박이 농부집이다. 그집에서 나서 자란 권호는 2000년도부터 세전이벌에 세워진 려명농업대학에서 화혜전업을 전공하였다. 그후 고향을 떠나 내지에 가서 직장생활도 2년간 해보았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와아버지와 함께 약 2년간 농사를 지어본적도 있다. 원래 집식구에 차려진 경작지는 1.5헥타르뿐이였는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부모님이 다루는 논과 밭이 원래의 몇배로 늘어나고있음을 알았고 부모님이 그만큼 수확의 희열도 느끼고있음을 권호는 보았다. 또한 자금난과 자연재해위험에 봉착해 고민하고있는 부모님의 느늘진 얼굴도 보아왔다. 마침 한국방문취업제가 실시되면서 권호는 2010년에 한국로무길을 택해 다시 집을 떠났다. 집과 멀지 않은 도시에 아빠트를 사고 도시생활도 해보고싶은 욕망에서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권호의 선택을 막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한국이든 어디든 돈이 쉽게 벌어지는가도 보고 세상단련도 받아보라는 뜻에서였겠지요...”

권호는 그때의 부모님의 속마음을 이렇게 풀이했다. 한국에 가서 권호는 배운 화혜재배기술로 화혜농장에서도 일해보았고 기계공장에서 선반작업도 해보았다. 하지만 하루에 10시간내지 12시간씩 일하면서 몸이 지칠대로 지친 권호는 “점점 정책이 좋아 이젠 농사도 지을만 하다. 농사짓는것보다 실속있는 일도 없을거야... ”라고 하던 아버지의 말씀을 머리속에 떠올리면서 미래직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시 선택한것이 고향행이였다.

“이같이 좋은 형세하에서 농사짓는것은 할만한 직업이다. ”

고향에 돌아온 권호는 이렇게 단정하면서 시와 진에서 조직하는 여러가지 양성반에 빠짐없이 다니였고 친구의 소개로 연변대학농학원 전문가들의 지도, 자문을 늘 받고있다. 권호는 지난 겨우내 농기계수리를 자신있게 배워냈다.

농망계절이면 별을 이고 일밭으로 나갈 때도 있었지만 지난해 권호네 농장의 총로동기일은 100여일밖에 안되였다. 하지만 창출한 년수입은 한국로무 년수입의 몇곱절에 달했다.

말그대로 권호에겐 농민은 더는 신분의 표지가 아니라 이제는 신형의 직업으로 간주되였다.

대학생처녀 시집오네

 
이제 며칠이면 웨딩사진 찍는다며 정희양이 폰에서 보여준 사진한장

리권호는 다음달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신부감은 대학생이며 도시처녀이다. 권호보다 네살 아래인 신부감 리정희는 연길시 모 영어학원의 강사로서 연변대학과학기술학원 영어전업(본과)과 최고경영자과정 제10기를 졸업한 지능녀성이다.

권호의 친구와 정희의 친구가 오작교를 놓아주었고 두사람이 갖고있는 시대적 가치관과 직업관이 일치했기에 결합이 가능했다.

기자가 권호에게 정희한테서 뭐가 제일 끌렸는가고 물으니 그는 정희의 지능녀성이란 점에 마음이 끌렸다고 수줍음을 타면서 대답했다. 정희양은 “농사는 직업으로 볼 때 전도있는 직업이지요. 직업을 찾아 헤매도는 도시총각보다, 그리고 시침따라 움직이는 기관사업단위 청년들보다도 스스로를 책임질줄 알고 뜻을 가지고 자신있게 농장일에 나선 권호씨가 착실하고 믿음직스러웠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권호에 대한 호감을 터놓았다.

권호씨가 사놓은 아빠트가 이미 두사람의 신혼집으로 꾸며졌다면서 아빠트를 농장과 산마루를 하나 사이둔 위치에 사놓은 원견성에도 정희양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 룡정시에서 해란강대교를 신축하면서 대교로부터 바로 권호네 농장을 지나 연길시로 직통하는 산길포장공사까지 마무리지은 상태라 자가용까지 마련한 두사람은 도시아빠트와 농장사이를 20분도 안걸리게 다니고있었다.

세전이벌에 풍년이 들때

권호네 농장 일각, 그리고 바라보이는 권호네 집

이제 농장이 더 잘 될 때 꼭 다시 놀러오라고 권호씨도 정희양도 기자를 요청한다. 풍년가을을 기약하면서 기자는 귀로에 올랐다.

“연변입쌀의 고향”이라 불리우는 드넓은 세전이벌을 바라보면서 순간 “선조들이 나무를 심으면 후대들이 복받는다(先人种树,后人享福)”는 말이 머리속에 떠올랐다.

세전이벌은 연변 및 조선족의 전설의 고장이다. 특히 영성촌은 전국의 제일 첫 농업생산호조조, 농업생산합작사와 중국의 첫 농민대학(지금의 려명농업대학)을 세운 김시룡이 살던곳이다. 또한 전국의 제일 첫진 3.8붉은기수의 영예를 안고 6차례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은 리옥금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영성, 그리고 세전이벌 사람들은 “영성의 땅에는 그분들의 땀이 배여있다.”, “그분들은 세전이벌 몇세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자랑차게 말한다.

기자는 건국 60주년을 맞으면서 리옥금로인을 취재한적 있었고 그전에 영성촌 리수복서기를 취재한 적도 있는데 권호네농장에 당도해 보니 리수복서기를 만났던 집이 바로 지금의 권호네 집이였고 리수복이 바로 권호의 아버지였다. 당시 리수복서기는 영성촌과 해란강을 사이둔 려명농업대학으로부터 자연양돈기술을 인입해 솔선수범하여 영성촌을 “양돈촌”으로 만들었었다.

권호는 어릴 때부터 바로 이웃 마을에 김시룡, 리옥금, 황순옥 등 어르신들이 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커왔다. 권호는 촌민들이 마을을 떠날 때마다 “이땅이 어떤 땅인데…”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이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던 아버지의 맥빠진 모습을 보면서 커왔다.

그런 권호였기에 그는 그 누구보다도 농촌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농민에 대한 감정이 깊었다. 2024년까지면 30년 토지도급정책실시기한이 찬다. 권호는 정책실시기한내에 농장의 새도약을 이룰 포부를 안고 신들메를 조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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