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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기획15]꽃피는 봄이 오면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2-26 16:30:06 ] 클릭: [ ]

대형계렬보도 “두만강은 말한다”(15)

-17년동안 감자지짐과 함께 울고웃은 “쭈따마(朱大妈)”

이맘때쯤 꽃피는 봄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것이다. 유독 누구보다 애타게 그 봄을 기다리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룡정에 살고있는 주애순(61세)씨이다. 까닭은 꽁꽁 얼어붙었던 강이 풀리고 땅이 녹으면 겨우내 단잠에 빠졌던 야시장이 다시 사람들로 흥성하는 계절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17년동안을 하루같이 야시장에서 감자지짐을 팔아 자식의 뒤바라지를 해온 주애순씨는 요즘 매일 달력을 쳐다보며 아이처럼 손가락을 꼽아본다.

1999년부터 오랜 시기동안 룡정 길거리야시장에서 감자지짐 한가지 메뉴만을 고수해온탓에 그가 운영하고있는 “쭈따마(朱大妈)” 감자지짐은 그때를 룡정에서 지내온 사람이라면 다들 익숙히 알고있을것이다.

대부분 장사의 시작은 알고보면 생계때문, 그녀의 시작도 남다를게 없었다. 생계유지가 우선이였다. 그가 43살 되던 해, 23년간 편직물공장에서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했던 그에게도 정책변동으로 인한 정리실업은 피할수 없는 운명의 장난같은 낭떠러지였다.

장기환자였던 남편의 로임도 시원찮았던데다가 하루아침에 주애순씨의 수입마저 뚝 끊겨버리자 당장 이튿날 먹을 걱정이 태산이였다.

“한순간에 밥그릇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 한창 고중생이던 딸애가 학교에서 학잡비를 바치라는 날이면 빈 통장만 펼쳤다 닫기를 반복하며 눈앞이 캄캄해났어요.”

청춘을 다 바쳐 일해온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어 분하고 원통했지만 두손놓고 앉아 신세한탄할수만은 없는 일이라며 그는 무작정 뭐라도 시작해야 했다. 급한대로 그는 손수레에 연길에서 도매해온 파이내플을 싣고 학교구역마다 옮겨다니며 파이내플쪼각을 꼬치에 꿰여 팔면서 푼돈벌이에 매달려보았다. 하지만 봄철에만 나오는 파이내플은 6월이 되자 물건이 바닥났다. 그리하여 점심시간에는 학교앞에서 곽밥을 만들어 팔아보기도 하고 저녁 퇴근시간에 맞춰 마을의 길모퉁이에서 남새도 팔아보았지만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생활을 이어대기 턱없이 부족했다.

“급한 마음에 닥치는대로 이것저것 해보았으나 손에 남는게 없었어요. 그러다보니 본의 아니게 ‘고추장 맛보기’가 되여버린거죠. 무엇을 하더라도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맞는 선택이였습니다.”

마음이 다급했으나 밑천은 짧았다. 그러던중 그는 집체호때 자주 해먹었던 감자지짐이 떠올랐다. 외할머니에게서 배운 솜씨로 유난히 남들보다 굽이를 잘 부친다며 그가 만들었던 감자지짐은 늘 굽어내기 바쁘게 친구들이 그릇을 비우던 일이 문득 생각났다. 때마침 룡정에는 야시장이 금방 생겨나 크게 인기를 모을 때였다. 주애순씨는 마음먹고 감자 몇근을 갈아 반죽을 이겨서 세바퀴자전거에 달아매고 무작정 야시장에 나갔다.

예전생각에 신심은 가득했으나 현실은 생각처럼 록록치 않았다. 어쩌다 손님이 몰려오면 손님들과 거스름돈을 주고받는사이 지짐이 타버리고 급한 마음에 뒤집다가 반죽이 찢겨지던 일, 전등밑에 날벌레들이 모여들었다가 반죽에 뛰여들어 그대로 버리고 새것으로 굽어야 했던 웃지도 울지도 못했던 일들이 되풀이됐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감자지짐을 갖고 나간 첫날 50전짜리 감자지짐을 24개 팔았어요. 그렇게 번돈 12원에서 도시관리비 1원, 전기세료금 1원, 위생비 1원을 떼고 나니 9원이 남았어요. 그 9원으로 또 감자를 사서 갈아들고 이튿날 다시 야시장으로 나갔요.”

삼복염천인데다가 뜨거운 불가마앞에서 꼬박 몇시간을 서있자니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고 얼굴이 날벌레와 모기한테 물리워도 긁적일새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더 힘들게 했던건 늘 장사를 끝내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외로운 밤길이였다. 천막과 무거운 쇠고정대를 묶어싣고 간이밥상과 걸상에 반죽을 담았던 통이며 수저와 그릇들을 산더미처럼 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기도 했다. 무거운 세바퀴자전거 페달을 밟아 어두컴컴한 가로등밑 철길을 지나며 왜소한 체구의 그녀 혼자몸으로 간신히 건널목을 건널 때면 사흘이 멀다하게 사단을 냈다.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세바퀴자전거 바퀴가 방향이 엉뚱하게 뒤틀려지는 바람에 철길에 걸려 실었던 물건이 와르르 무너져내렸고 도랑에 빠진 그릇들을 다시 주어담아 맑은 물로 헹궈야 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남편이 장기환자이다보니 나와서 도와줄 여건이 못되였습니다. 혼자힘으로 짐을 옮기다가 뜻처럼 되지 않을 때면 저는 너무도 힘들어 그대로 주저앉아 아이처럼 철길을 두드리며 엉엉 울군했지요.”

그렇게 자정이 다 되여서야 힘들게 짐들을 싣고 들어선 집에는 대학입시를 앞둔 딸애와 환자인 남편, 운신을 못하는 로모와 부모의 곁을 떠나 큰어머니인 주애순씨 손에 맡겨진 어린 조카 두명이 기다리고있었다. 십수년간 23평짜리 작은 온돌집에 여러식구가 부대끼여 살아가는 바람에 주애순씨는 매일 쪽잠을 자야 했다. 그리고는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밥을 준비하고 또 일찍부터 야시장에 나설 차비를 하다보면 감자를 깎다가 잠이드는 일은 흔한 일상이 되여버렸다.

고단한 엄마의 삶을 보고 엄마보다 다르게 살고싶었다던 그의 딸애는 고중을 졸업하고 일본류학길에 올라 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려는 야무진 꿈을 갖고있었다. 그런 딸애의 단꿈을 엄마인 주애순씨는 누구보다 이뤄주고 싶었다. 당장 살림살이 살돈도 없었지만 주애순씨는 10만원의 수속비가 드는 일본류학비용을 리자돈으로 꿔다가 딸애가 류학꿈을 이룰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조선족은 소를 팔아서라도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돈이야 벌면 생기지만 배움에는 시기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의 꿈은 곧 나의 꿈이기도 하니까요.”

가난했지만 늘 딸을 향한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았던 엄마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딸애는 장학금을 쟁취해 원만히 학업을 마치고 현재 일본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해 꿈을 이뤘다. 집사정이 제일 힘든 시기에 자신한테 선뜻이 빚을 내여서라도 류학길에 보내주었던 엄마의 기꺼운 희생과 고마움에 딸은 몇해째 꼬박꼬박 홀어머니 생활비를 보내오고있다.

딸애가 외국으로 떠난지 얼마되지 않아 마음속 깊이 의지하던 남편마저 차사고로 저 세상으로 떠났다. 리자돈을 꾸어 빚을 내여 보냈던 딸애 류학수속비용을 갚아야 할 막막한 일도, 늙은 로모를 돌보는 일도, 어린 조카들의 생활뒤바라지까지 그녀가 홀로 떠메야 했다. 살기 위해 그녀는 5월부터 8월까지 열리는 야시장이 문을 닫으면 나머지 계절에는 아침시장에 들고나가 감자지짐 구워팔기를 여러해째 견지해왔다.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는 고객을 향한 성실과 신용을 잃지 않았다. 남들보다 원가가 많이 들고 리윤을 적게 남겨서라도 주요식재료인 감자를 많이 넣어 구수한 감자향을 살리고 질좋은 간분을 넣어 만든 쫄깃한 식감을 잃지 않도록 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감자지짐은 남녀로소 모두가 좋아하는 야시장의 인기메뉴로 떠올랐다. 별것아닌 양념간장마저도 그녀는 정성을 다해 여러가지 식재료들을 아낌없이 넣어 손님상에 올렸다.

그의 손맛과 진정어린 장사에 손님들은 줄을 이었다. 허술한 간이밥상으로 차려진 손님상은 늘 만석이였고 삼삼오오 불쟁반가마주변에 모여들어 빙둘러 선 고객들은 자리가 없어도 기다려서 먹군했다. 서툴던 그의 솜씨도 전에 비해 많이 재빨라졌다. 그렇게 입소문으로 찾은 고객들이 단골되여주고 간판조차 없던데로부터 고객들이 찾기 쉽게 이름을 걸기로 하고 “쭈따마”라는 친절한 천간판을 써붙였다. 맛도 좋고 늘 남들보다 감자지짐을 큼직하게 굽었더니 하루에 24개를 팔던 첫날을 시작으로 매일 1000개를 훌쩍 넘겨 팔아 장사는 날이 갈수록 호황을 이루었다.

“당시 학생이던 단골들이 17년이 지나 이젠 어엿한 애엄마, 아빠로 되여 아이의 손목을 이끌고 감자지짐을 먹으러 올 때면 제일 흐뭇해요. 세월이 많이 흐르고 어른이 되였어도 저의 손맛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게 고마울 따름이죠.”

오랜 손맛을 잊지못해 찾아오는 이런 단골들이 있어줘서 고맙고 든든했다. 하지만 워낙 밖에서 영업중인 야시장은 날씨 변덕도 잘 맞춰야 하는 특수성이 있다.

어느 한번은 장사 나갈 차비를 다 미치고 나니 예고없던 소나기가 마구잡이로 퍼부었단다.

“감자반죽은 이미 색이 검게 변해가는데 오후부터 내리던 비는 그칠념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날은 장사하러 나갈수 없어 수백근 감자반죽을 전부 버려야 했습니다. 쓰레기처리비용 5원까지 더 물어가면서 말입니다.”

“손님들의 발길을 멈춰세우고 저희 생계를 이어가주던 감자지짐을 굽지도 못한채 수백근 생반죽을 버린다는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였습니다.”

“고향을 떠나간 사람들이 많다보니 최근년에는 전에 비해 절반도 못파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올해도 열심히 팔아보렵니다. 그 맛을 인정해주는 고객들이 있으니깐요.”

비록 아직도 20년전의 23평방메터짜리 낡은 온돌집에서 살고있는 주애순씨지만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그늘대신 행복의 웃음꽂이 피여났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했습니다. 한개 몇십전씩 하던 감자지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팔다보니 볕을 보는 날이 있더군요.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지나온 나의 중년시절이 그토록 힘들어도 저는 원망스럽지 않습니다. 남들보다 아껴 먹고 아껴 입고 단잠을 포기해가며 분투해온 그 시절들이 저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줬으니깐요.”

여린 녀자의 한몸으로 가정을 위해 역경을 이겨내면서 힘들고 고단하게 살아온 주애순씨에게 꽃피는 봄이 오래오래 지속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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