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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근-《연변 25시》와 함께 했던 나날들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20:32:33 ] 클릭: [ ]

[제2편] (하)

안상근-《연변 25시》와 함께 했던 나날들

 
안상근이 《연변 25시》를 알게 된것은 지난 2006년의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길시내 적잖은 편의서점들과 길거리 공중전화부스들에서는 새로 나온 신문잡지들을 팔고있었는데 《연변 25시》특간도 그속에 걸려있었다. 고정적인 신문디자인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 시각적으로 가슴에 와닿는 사진과 제호들로 꾸며진 《연변 25시》는 내용상에서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사고거나 열점화제들을 많이 담고있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던 구인구직, 팔 집, 세집 등 실용적인 정보들도 많이 실려있어 꽤 흥미로왔다.

당시 연길텔레비죤방송국에서 기자로 일하던 안상근은 《연변25시》에 완전히 매료되였다. 혈기가 왕성한 30대의 나이였던 그는 《연변 25시》특간부에 가서 일할수 있다면 참으로 멋진 기자생활을 할수 있을것만 같은 상상에 들뜨게 되였다.

인연이 닿자고 그랬는지 마침 《연변 25시》특간부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연변 25시》는 고 박금룡씨가 책임을 맡고 꾸리고있었는데 안상근과 어느 우연한 기회에 취재중 만나게 되여 함께 일할 의향을 내비치면서 서로 뜻을 맞추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2006년 7월, 안상근은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길림신문사 《연변 25시》특간부에 전근되여왔다.

당시 《연변 25시》특간부는 신문청사 9층에 자리 잡고있는 길림신문사 연변분사에 사무실을 잡고있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보니10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비좁은 사무실에서 5, 6명 기자와 편집들이 다음주에 나갈 《연변 25시》특간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좁은 사무실에서 원고 취재와 편집, 신문배판은 물론 발행까지 일사천리로 돌아가고있다는게 놀라왔다. 화요일에 출간되기에 이들에게 는 주말이 가장 숨가빴고 련휴일도 따로 없었다.

《연변 25시》특간부에 전근되여와서 사업하면서 안상근은 《연변 25시》가 생겨나게 된 배경에 대해 더 깊이 있게 료해할수 있게 되였다.

2005년, 길림신문사에 새로 부임되여온 남영전사장은 제2차 창업의 슬로건을 내걸고 전체 기자, 편집들이 신문출판의 새로운 대안을 열어나가도록 격려하였다. 장춘본사에서 “인성교육”, “창업취업” 부간을 꾸리고 길림시기자소에서 “송화강기별”부간을 창설했으며 이어 장백조선족자치현기자소에서도 “장백의 메아리”부간을 내놓았다. 이 같은 분위기속에서 연변일보사로부터 갓 길림신문사로 자리를 옮긴 박금룡씨도 큰 꿈을 무르익히며 크게 일을 벌여보자고 팔을 걷어올리게 되였다.

화룡시 팔가자진 하남촌출신인 박금룡은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를 졸업한후 화룡시직업고중에서 교편을 잡다가 연변공상보사에서 근무한적이 있으며 《연변공상보》가 내부간행물 정돈으로 페간되자 연변일보사에 들어가 기자, 경제부 주임으로 일했다. 박금룡은 연변일보사에서 《종합신문》을 대담히 도급 맡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특색 있는 신문으로 꾸려 재능을 인정받았다. 박금룡씨는 창의력이 뛰여나고 신문감각이 예민하고 신선했을뿐만아니라 신문경영에 있어서도 경험을 퍼그나 쌓아두고있었다.

박금룡씨는 길림신문사로 전근해온후 길림신문사 지도부의 지지를 딛고 《길림신문》 연변특간인 《연변 25시》를 창설했다. 《연변25시》란 특간이름은 길림신문사의 골간들인 김성걸, 최승호 등 셋이 연길시 동북아호텔 커피숍에서 머리를 쥐여짜며 함께 고안해낸 결실이였다.

《연변 25시》특간은 창간된후 매주 화요일 2절지 8개 면으로 정기적으로 독자들에게 선 보였다. 《연변 25시》특간은 1면 톱기사에 항상 시각적인 충격을 주는 사진들을 4단 심지어는 옹근 6단으로까지 펼쳐보이면서 판면디자인의 참신한 개혁과 혁신을 탐색해나갔다. 사진은 당시 연변일보사의 촬영기자로 있다가 퇴직한 중견촬영가 박영철씨와 《인터넷 길림신문》의 김성걸씨 등이 주로 맡았다. 이들은 생생한 현장취재사진들을 찍으려는 열망으로 항상 밤낮이 따로 없이 취재현장에서 뛰여다니군 했다. 당시 《연변 25시》특간부에서 기자, 편집으로 손 잡고 일한이들로는 박금룡, 오기활, 김성걸, 김청수, 김영자, 박영철, 곽철권, 김태국, 안상근, 최화, 박홍화 등이였다.

 연변주인대 전임주임이였던 원로지도자 조룡호옹을 취재하면서

《연변 25시》에는 백성들이 관심하는 열점, 난점 문제들과 독자들이 목 말라하는 각종 구인구직, 련애혼인, 팔 집, 세집, 의약위생, 상품구매 등 허다한 실용정보들도 많이 실렸는데 신문이 독자들에게 유익한 실용정보를 제공하고 공유하는 면에서도 조선문신문에서의 선례를 개척하였다.

특히 《연변 25시》특간부에서는 신문을 진정으로 백성들의 구미에 맞게 꾸리고 백성들의 마음을 담은 신문으로 꾸리기 위해 조선족신문사상 처음으로 독자들을 대상으로 “의견을 삽니다”라는 계시를 내기도 했다. 무릇 신문발전에 유익한 의견과 건의들을 제기한 독자들에게 소정의 장려를 주는 방법이였는데 대거 받아들인 이런 건의, 의견들은 신문이 진정한 백성신문으로 거듭나는데 조미료역할을 톡톡히 놀았다.

2007년, 안상근은 박금룡씨에게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의 라지오채널에서 방송되는 대량의 정보를 《연변 25시》특간부가 함께 공유하면 서로간의 공동발전과 지명도 향상은 물론 독자들에게도 유익할것이라고 하면서 그들과의 제휴를 제안했다.

하여 《연변 25시》특간부는 사상 처음으로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과 손 잡고 정보와 뉴스의 공유 및 공동발전의 새로운 진로를 탐색하여 좋은 효과를 보았다. 《연변 25시》특간은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 아리랑방송에서 매주 인기프로그람으로 방송되는 정보들로 전문 한개 정보면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방대한 각종 실용정보들을 제공해주었고 연길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도 《길림신문》에서 제공한 뉴스나 정보를 방송에 활용하면서 쌍방은 “윈윈협력”을구축해나갔다.

2007년초부터 한국방문취업제가 실시되자 한국에 빨리 나가고싶어하는 조급심리를 엿본 사기가 기승을 부렸다. 당시 방문취업제를 리용한 정당한 한국출국길이였음에도 허다한 출국희망자들속에서 출국 정책과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여 브로커의 감언리설에 속히워 많게는 수만원에 달하는 금액까지 사취당하는 사례들이 비일비재였다. 특히 2007년 가을철부터 시작된 방문취업을 위한 한국어능력시험제도가 나오면서 한국어능력시험의 인터넷 등록으로부터 시작해 시험, 추첨, 비자발급에 이르기까지 허다한 고리마다

방문취업자들을 노린 사기들이 꿈틀거렸다.《연변 25시》특간부에서는 수많은 방문취업자들의 리익을 보장해주는 전제하에서 방문취업제 인터넷 등록을 대신 실시하여주었고 방문취업자들이 한국어능력시험을 차질없이 잘 치를수 있도록 한국어능력시험제강을 신문에 기를 나누어 싣는 한편 무료강습도 수십차례 조직해주었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있는 연길시는 물론 훈춘시 영안진 영안촌, 화룡시 서성진 룡포촌, 화룡시 남평진 길지촌 등 농촌들에도 내려가 당지 조선족농민들에게 방문취업제에 대해 선전하고 한국어능력시험에 대한 무료강습을 실시해주었다.

당시 《연변 25시》특간부 기자들은 박금룡을 중심으로 김성걸, 김태국, 박홍화, 안상근 등이 마음을 모아 도시와 농촌마을 방문취업희망자들의 한국어능력시험을 위해 적게는 수백명, 많을 때는 근1000여명을 상대한 무료강습을 조직해주었다.

그때 《연변 25시》특간은 방문취업자들이 즐겨보는 신문으로 되여 매호마다 부수를 증가해 찍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발행량도 많이 늘어났다. 방문취업희망자들이 한국어능력시험을 차질없이 잘 치르게 하기 위해 《연변 25시》특간부에서는 장춘, 대련, 심양 등 동북3성지역의 한국어능력시험 시험장으로 가는 전용뻐스는 물론 멀리 광동, 사천 등 외지시험장으로 가는 전문렬차마저 해당 부문과 협상하여 개통해 수험생들에게 편리를 도모해주기도 했다.

당시 길림신문사를 방문중이였던 한국매체의 한 기자는 신문사에서 나서서 전문렬차까지 내오고 방문취업제를 위해 적극적인 봉사를 하는 광경에 독자들을 왕으로 모시고있는 한국의 신문사라고해도 절대 할수 없는 일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연변 25시》특간부의 도움으로 사기피해에 휘말리지 않고도 한국방문취업의 지름길에 들어선 적잖은 사람들은 지금도 《연변 25시》가 당시 조선족방문취업자들을 위해 큼직한 일을 했다고 두고두고 외우고있다.

《연변 25시》특간은 사회의 약소군체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보도했다. 2007년에 연변대학의 한 대학생이 암에 걸렸는데 가정살림때문에 치료가 어렵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당시 《연변 25시》특간부의 기자 안상근은 김성걸선생과 함께 이 학생이 살고있는 안도현 명월진에 찾아가 상황을 자세히 료해했다.

이 가정은 부모가 모두 장애를 가지고있었고 또 병환에 있는데다가 이렇다 할 생활원천이 없어 병으로 몸져누운 대학생 영걸이는 집에서 치료비때문에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취재후 안상근은 “대학생 영걸이를 살립시다”라는 호소성기사를 작성하여 신문에 실었다. 서발막대 휘둘러도 거칠것 없는 째지게 가난한 단칸방에서 치료비때문에 눈물 짓는 대학생 영걸이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은 취재기사가 발표되자 전사회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보다 많은 의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변 25시》특간부의 기자들은 윤영걸학생이 소속된 연변대학 정치학부의 학생들과 함께 연길시 서시장에서 “대학생 윤영걸을 살립시다”라는 프랑카드를 만들어 들고 직접 거리에 나서서 의연금 모으기 활동을 조직함으로써 전사회적인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당시 《연변 25시》의 적극적인 발기와 보도로 전사회적으로 도합 13만여원에 달하는 의연금이 모아졌다. 윤영걸학생은 사회적인 사랑에 힘 입어 병마를 이겨내고 다시금 교정에 나설수 있게 되였다. 후에 윤영걸학생은 대학까지 졸업하고 국내 연해도시에까지 진출했지만 암이 악화되여 아쉽게도 사망하였다. 그러나 스러져가는 대학생에서 삶의 불길을 지펴주고 전사회적으로 불우이웃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불러일으킨 《연변 25시》의 다함없는 열정은 오늘까지도 잔잔한 감동으로 남아있다.

2006년에 발간되여서 《연변 25시》특간은 신문개혁의 수요로 한 단락의 력사적사명을 완수하고 2011년에 페간되였다. 《연변 25시》는 이 세상에 고고성을 터뜨렸다가 페간되기까지 불과 짧디짧은 5년간의 자취를 찍어왔지만 “백성중심, 백성봉사, 백성참여”라는 슬로건으로 독자들의 마음속에 잊지 못할 친민신문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연변 25시》의 제일 첫시작은 함께 하지 못했으나 《연변 25시》가 페간될 때까지 근 5년간 몸 담아왔던 《연변 25시》특간부에서의 기자생활은 안상근기자의 인생에서 신문인의 길을 힘차게 걸어나가게 한 리정표와 같은 중요한 시간들이였으며 두고두고 잊지 못할 수 많은 추억과 인생을 사색케 한 유익한 시간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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