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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화-교정원에서 문화부 기자로 뛰기까지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7:28:17 ] 클릭: [ ]

[제2편] (하)

최화-교정원에서 문화부 기자로 뛰기까지

 
2002년,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신문학과를 졸업한 최화는 그해 10월, 연변인민출판사 교정실 일원으로 취직하게 되였다.

당시 각 지역의 조선문 출판사, 잡지사, 신문사에 입사하는 신인들대부분이 몇년 동안 교정을 거치는것은 관례로 되였다.

교정실에 있으면서 그는 항상 그의 꿈을 잊지 않았다. 대학지망시 부모들이 당시 점수로는 무난할 조선언어문학학과를 선택하라고 권유하는데도 끝까지 입학점수가 높은 신문학과를 고집했고 결국 소망을 이루고야말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려주고 정의를 지켜 생명도 청춘도 불 사르는 방송사 녀기자들이 그렇게 멋져보여 그는 언젠가 자신도 잡지,신문사 기자로 활약할 꿈을 은근히 무르익혀나갔다.

그 당시 연변인민출판사 교정실 일군은 그를 포함해 단 3명이였다. 그는 무려 10여종 도서, 잡지의 교정을 보면서 엄격하고도 계통적으로 기초를 닦게 되였다. 그러다 2005년, 길림신문사에서 5명의 기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였고 그해 8월에 홀로 장춘에 와길림신문사 면접에 통과되여 9월 1일부터 정식 출근하게 되였다.

출근한지 6일째 되는 날, 그는 당시 길림성의 가장 큰 행사중의 하나인 제1회 동북아박람회 취재팀에 가담해 첫 취재임무를 맡고 련 며칠 저녁 9~10시에야 퇴근하면서 처음으로 야근을 체험해보았다. 그 며칠은 자신이 “물 만난 고기” 같이 날아갈듯한 기분이였다고 동료들과 속삭인게 몇해전 일인데 지금도 그때의 감각이 새삼스러웠다고 되풀이하군 했다.

사실상 그는 말수가 적거니와 성격 또한 잔잔한편이다. 하지만 정작 취재시에는 활발하고 책임성이 강했다. 또한 길림신문사 사상 두번째로 되는 신문학과출신 기자답게 맡은 취재임무는 깔끔하게 완수하고 문맥 또한 순통하다는 평을 자주 듣고있다.

그는 여러 분야의 취재기자로 뛰다가 2009년부터 자신의 적성에 맞는 문화부 기자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몇년간 그는 조선족예술관, 조선족문학 관련 등 분야를 취재하면서 전업기자로서의 공력을 쌓기 시작했다.

북경의 한 문학행사 취재에 갔다가 일본조선족사회단체 책임자인 류경재도 행사에 참가한것을 보고 취재받을 시간이 없다고 했지만 하루 더 머물면서 끝까지 취재를 해 “재일조선족 10만명 시대…엘리트 주류”라는 특종기사를 써내 전국소수민족신문상 2등상, 《길림신문》상 1등상을 받게 된다. 그뒤로 거의 해마다 그는 묵직한 기사로 성급, 국가급 상을 받군 했다.

중국문단에서 이름이 자자한 조선족문인 남영전, 김인순에 대한 독점인터뷰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남영전, 김인순의 작품세계를 상세히 그려냈을뿐만아니라 그들의 인생관을 까근하게 파헤치고 생동하게 묘사해내 다들 이 두 기사를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013년, 한국 박근혜대통령이 중국인민지원군 유해를 중국에 반환”한다고 선포한 뒤 길림신문사에서는 력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의의가 있는 이 관련 행사를 특별계렬보도로 취재하기로 결정했다.

최화기자는 본 계렬보도의 구성원으로 심양에 가 설운도를 취재하게 되였다. 그는 “중한가수 손 잡고 노래 ‘귀향’ 눈물의 열창”이라는 기사를 써내 신문사 지도부,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장춘본사에 있으면서 외지출장 또한 잦았다. 어떤이는 출장은 피곤하다고 하지만 그는 매번 출장을 승격의 좋은 기회로 간주했다. 기자경력을 쌓고 전업수준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때문이다.

다만 유일하게 가슴 아픈것은 어린 딸애를 두고 집을 떠나는것이였다. 특히 “전국소수민족전통체육운동회” 취재로 근 15일 동안씩 외지에 머물 때면 딸애가 그렇게 그리울수가 없었다 한다. 그러나 풍성한 취재로 독자들과 동료들의 긍정을 받을 때 그의 모든 아픔은 가뭇없이 사라지군 하였다.

전혀 해보지 못한 체육분야 취재, 게다가 명액때문에 길림신문사에서 단 한 사람만 파견할 때 맡은 임무는 뻐근했다.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치뤄지는 경기취재시간을 다투고 거기에 사진을 찍고 기사까지 쓰자면 집에 전화 한통 할 시간마저 없었다. 전화를 하려고 휴대폰을 들었을 때엔 이미 새벽 1시가 넘군 하였다.

취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저녁마다 애가 너를 외웠어. 그러던 며칠전 너랑 키가 비슷한 한 녀성을 ‘엄마’라고 부르며 쫓아가 손을 덥석 잡지 않겠니. 그리곤 실망해서 애가 펑펑 울더구나.”

시어머니의 말을 듣고난 최화는 코마루가 찡해났다. 비록 이런 저런 가슴 아픈 일도 있었지만 가정의 든든한 지지로 그는 항상 시름 놓고 사업할수 있었다. 그리고 사업에서 그는 선배들의 말을 항상 명심했다. 첫 1년은 피 터지게 노력하고 그리고 3년은 공력을 다지는 시간, 그후 5~6년은 승화하는 단계, 이렇게 10년이 지나서야 기자라는 이름의 무게를 진정 알수 있다고…

2015년 9월은 최화가 길림신문사에 입사한지 10년 되는 해이다. 그는 지나온 10년을 행운의 10년이라고 말한다. 기자로 있으면서 여러 분야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정을 나누고 그리고 시련을 겪고 아픔을 느끼고 기자로서의 성취감에 취했다고 고백한다.

10년이 지난 오늘, 그는 새로운 기점에 섰다.

“기자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계속 노력할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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