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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호-오늘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7:23:56 ] 클릭: [ ]

[제2편] (하)

최승호-황소같은 뚝심으로

현재 《길림신문》 편집국장(편집판공실 주임)으로 있는 최승호는 1995년 8월에 길림신문사에 입사하여 올해로 근무년한이 꼭 20년이 된다. 입사하여 첫 10년은 《길림신문》 연변지사에서, 두번째 10년 즉 2005년부터 는 《길림신문》 본사에서 근무해왔다.

“첫 10년은 동료선배님들한테서 많이 배워왔고 두번째10년은 그것을 바탕으로 시대의 새로운 도전에 맞서 더 깊이 배우고 실천하는 과정이였습니다. 배우고 실천하는것은 지금도 계속되고 앞으로도 계속될것입니다.”

최승호는 이렇게 말한다.

아장아장 걸음마 입사 초반, 최승호는 연변지사 선배들의 사랑을 받으며 “곱게”자랐다. 입사해서 첫 주일만에 조직된 신문사 직원들 야외나들이에서 서먹서먹하여 홀로 있는 그를 이끌고 한 사람, 한 사람 소개시켜 주던 김영자선생님, 녀자친구가 생겼다니 한달음에 녀자친구 회사에 가서 “관상”을 보고 돌아와서는 잘 만났다고 응원해주던 김청수선생님, 촬영, 컴퓨터, 인터넷을 알게 해주고 배우겠다고만 하면 정성스레 가르쳐주던 김성걸선생님, 신문발행을 도와 안도현 조선족마을들을 찾아 눈길을 함께 헤쳐갔던 김수철선생님, 생의 처음 취재를 함께 나가주고 늘 조용조용 차분하게 앞길을 가리켜주던 최혜순주임, 총편집이라 늘 두려움이 앞섰지만 항상 넓은 마음으로 안아주고 격려해주던 리원철부총편집 등등 선배들을 그는 잊지 않고있다.

자신의 이름이 처음으로 신문에 활자로 인쇄되여나왔을 때의 벅찬 감격이 흐른 뒤 그는 점차 자신의 한계를 느끼게 됐다. 학교때 배운 지식으로는 신문기사를 집필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찼기때문이였다. 소식, 통신이랍시고 거창하게 쓴 글이 주임의 손을 거치면 면목을 알아보기 어렵게 변해있었다. 그는 신문공부를 결심했다. 선배들이 쓴 기사를 찾아보고 신문사 자료실에서, 서점에서, 고서적가게에서 신문과 관련된 책들을 모아 탐독하면서 신문공부에 머리를 동여맸다.

그는 신문 관련 업무지식은 물론 촬영도 선배들에게서, 책에서꾸준히 배웠다. 항상 사진기를 메고 다녀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그가 전문사진기자인줄로 착각하기도 했다. 그때는 흑백신문시절인지라 사진도 신문사내에서 현상해냈다.

사진을 찍고 그것을 현상해내는것이 재미 있어 오전에 취재하고 오후에 글을 쓰고 저녁에 퇴근하지 않고 암실에서 사진필림과 씨름했다. 2평방메터도 되나마나한 암실에서 사진과 씨름하다보면 시간 가는줄 몰라 한밤중이 되여서야 자전거를 타고 퇴근했고 그때 가로등도 없던 그 밤길이 지금도 새록새록 기억에 남아있다고 회포를 풀고있다.

인터넷에 미치다

2000년 1월 1일, 《인터넷 길림신문》이 고고성을 터뜨렸다. 김성걸선생님을 통해 컴퓨터와 인터넷에 입문한 그는 《인터넷 길림신문》에 완전 빠져버렸다. 당시 연변지사 지사장으로 있었던 김영규선생님, 《인터넷 길림신문》 운영자 김성걸 그리고 최승호 이 셋은《길림신문》사이트 운영진이였다.

워낙 죽이 잘 맞았던 이 세 사람은 낮이고 밤이고 명절이고 주말이고 가리지 않고 인터넷에 달라붙어있었다. 원고를 선재하고 번역하고 원고를 올리고 웹페지를 정리하고 사진을 처리하고… 일은 해도해도 끝이 없었지만 세 사람은 힘든줄 몰랐다. 그때는 잠을 잔다는것은 생명에 대한 랑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것은 일한다는 그 자체가 흥미로와서였다.

세 사람은 함께 일하다가 우리 말 인터넷사전이 없는 불편함을 느끼게 됐고 2002년까지 《최신영조한인터넷용어사전》을 만들어내기로 합의했다. 각자 자기가 할 부분을 떼맡았다.

예정출판일을 맞추기 위해 갓 결혼하여 세방살이하는 동안 최승호는 밤에 낮을 이어 컴퓨터건반을 두드렸고 끝내 제시간에 탈고를 끝냈다.

“피 끓는 청춘을 후회없이 보냈습니다. 배우는것이 즐거웠고 한가지, 한가지 일을 해나가는데서 희열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최승호는 그때를 회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인터넷사이트운영이 정지되고 본사 지도부가 여러번 바뀌면서 신문사는 여러가지 진통을 겪었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2004년 가을에 형님처럼 믿던 김영규지사장마저 사표를 내고 한국에 류학을 갔다. 점점 일하는 재미가 적어진 최승호는 2005년 3월말에 휴가를 내고 멀리 복주의 어느 한 기업에 들어가 하해를 체험해보기로 마음 먹었다.

장춘본사에서의 새로운 출발

4월에 남영전사장이 부임하면서 신문사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고 여러가지 굵직굵직한 일들을 해나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복주에 있는 그의 귀에 전해졌다. 7월, 부총편집으로 임명된 한정일선생님이 최승호에게 제안을 해왔다. 신문사에 다시 돌아오되 장춘본사로 오라는것이였다.

그때 복주회사에서 주는 로임은 신문사에 있을 때의 다섯배, 경제적으로는 엄청난 유혹이였지만 신문에 대한 미련을 버릴수 없어 그는 결연히 뿌리치고 신문사에 돌아오기로 했다.

“그때를 신문사의 두번째 창업기라고 판단했고 그 창업을 옛 동료들과 함께 하고 성공의 그 희열을 동료들과 함께 누리고싶었습니다.”

최승호는 그때를 이렇게 회억한다. 2005년 7월 중순, 신문사 지도부에서는 총편집판공실 주임이라는 중임을 그에게 메워주었다.

그때 편집진이라야 고작 대여섯명, 즉 이들 대여섯명이서 신문 8개 면을 만들고있었다.

연변지사에 있을 때 기자로만 뛴 최승호인지라 판면설계는커녕 아예 신문판면개념조차도 없었다.

호기심이 많고 배우기를 즐기는 그는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웠다. 오래동안 편집판공실에 몸을 담가온 심영옥선생님한테서 행수계산부터 배웠고 디자이너로 있었던 김룡선생님한테서 신문판면설계프로그람 사용법도 배웠다. 또한 다른 신문들을 보면서 디자인을 익혔고 어떤 신문을 만들어야겠다는것도 생각해보았고 여러가지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그는 주관총편집과 심영옥선생님과 함께 자대를 들고 다른 신문사의 잘된 신문들과 비교하며 검토와 연구를 거듭했다. 2008년말에야 글자체, 글자크기가 기본상 고정된 지금의 신문설계양식을 정립시켰다.

온라인-오프라인 통합 이뤄

2012년 7월말의 어느날, 대련의 한 호텔방에서 세 사람이 밤늦게까지 이야기한다. 이들 셋은 《길림신문》 한정일부총편집, 최승호편집국장, 김성걸인터넷사업부장이였다. 한정일부총편집이 연필로 종이에 그려놓은 새로 개편될 《인터넷 길림신문》의 메인페지의 초안을 놓고 셋은 밤 새는줄 모른다. 이들은 신문사의 파견으로 대련에 와서 뉴미디어시대의 온라인, 오프라인 융합과 관련한 양성반에 참가했던것이다. 낮에 들은 강의를 바탕으로 신문사의 실제에 맞춰 새로운 개편의 그림을 그리고있었다.

홍길남사장이 부임한후 “학습이 가장 좋은 복리이다”라는 새로운 리념을 내놓고 전국 각지에서 꾸리는 강습반에 기자, 편집들을 전부 기를 나누어 보냈다.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고 실천하는 풍조가 전 신문사에 퍼져가던 때였다.

그보다 2년전인 2010년에 진행된 《길림신문》 온라인, 오프라인 통합은 인터넷시대에 《인터넷 길림신문》이 다시한번 국내 우리 말 언론사의 선두주자로 거듭나는 추진제였다.

연변지사의 지사장이였던 고 박금룡선생님의 온오통합제안은 홍길남사장을 위수로 한 새 지도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정일부총편집이 통합공관소조 조장을 맡고 최승호편집국장, 박금룡지사장, 김성걸주임 그리고 정경락고문으로 구성된 팀이 무어져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해나갔다. 우리 말 언론사는 물론 국내에서도 선례나 모델이 거의 없는 신문개혁인지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배워가며 연구하고 토론하며 해나가야 했다.

최승호편집국장은 온오통합소조에서 제기한 방안에 따라 편집부 구조개혁, 사이트란의 작성, 편집기자 일터책임제 등 기초실시작업을 책임지고 작성했다.

2011년말, 한정일부총편집과 최승호편집국장, 박금룡지사장, 정경락고문을 소조로 한 고찰단을 북경, 심양 등지에 보내 앞장에서 “달리는” 사이트를 고찰하고 고찰하는 길에 우리의 방안을 수정하고 연구하였다.

고찰단은 2박2일 동안 북경과 심양에서 인터넷의 새로운 동향을 알게 되였고 앞으로의 발전방향도 알게 되였다. 기차안에서, 식당에서 호텔에서 그들은 계속 연구를 했다. 식당에서 술을 마시면서도 열 띤 의논을 하던 장면이 눈에 선하단다.

고찰팀은 돌아온 뒤 《인터넷 길림신문》을 뉴스종합사이트로 개편할것을 제안하고 이듬해 본격적인 개편사업에 들어가 그해말에 최종 완성하였다. 그동안 박금룡주임이 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 사업에 차질이 있었지만 맴버들은 다시 정신을 추스르고 노력하여 끝내 온오통합의 거사를 성공시켰다.

모바일 뉴미디어시대의 새 시도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나오기전인2011년쯤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날아오던 《길림신문》 모바일뉴스를 기억하고있을것이다.

2010년 상반기에 중국이동통신 장춘분사와 《길림신문》은 합작하여 국내 첫 조선말모바일뉴스를 시작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소수민족문자로도 국내에서 두번째였다.

그 모바일뉴스는 최승호국장이 주관하고 정성택선생이 항목책임자를 맡고 리미연기자가 편집을 맡아했다.

새로운 분야였다. 그때는 휴대전화가 다국어를 지원하지 않고 있었기에 우리 말로 된 문자메시지뉴스는 발송할수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방법이 사진파일에 문자를 써넣는 방법이였다. 그때도 최승호는 두 멤버를 도와 뉴스선택은 물론 메시지 디자인, 사진크기, 텍스트크기를 하나하나 체크하면서 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그러다가 아이폰을 비롯한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2012년부터 모바일뉴스 써비스를 접게 되였다. 모바일뉴스는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력사에서 퇴출했지만 《길림신문》 모바일뉴스 운영팀은 뉴미디어시대의 뉴스선택과 편집사상, 편집방향 경험을 어느 정도 쌓아왔다.

2013년 3월, 《길림신문》워이신공중플래트홈이 뉴스써비스를 시작했다. 이 역시 국내 우리 말 언론으로서는 선코를 뗐다. 처음에는 연변지사 김파기자의 개인워이신플래트홈을 리용하여 뉴스써비스를 시작했다가 나중에 정식으로 《길림신문》의 공식워이신플래트홈으로 되였다. 최승호는 곧바로 모바일뉴미디어 공부에 들어갔다. 이 역시 그 어떠한 모델이 없이 모색중에서 전진하는 길이였다. 그는 뉴스, 오락 등 수십개의 워이신공중플래트홈을 구독, 신청하고 날마다 탐독하면서 그들의 장점을 보아내고 우리의 보완점들을 도출해내는 작업을 서둘렀다. 또한 날마다 이 항목을 담당한 김파기자와 함께 나간 기사의 구독량을 분석하고 어떤 기사를 선택하겠는가, 어떤 제목을 달아야 하겠는가를 연구, 분석했다.

《길림신문》워이신뉴스는 2년만에 구독자 만명을 초과했고 지금도 날마다 수십명의 증가량을 보이고있다.

“현재 《길림신문》워이신뉴스는 뉴스종합, 스포츠, 교육, 출국 등 네개의 각기 다른 공중플래트홈을 갖고있다. 이제 머지않아 또 여러개가 출범될 예정이다. 그리고 《길림신문》뉴스 앱(APP)도 구축해야 하고 미니블로그 부분도 적당하게 추진해야 할 사업이다. 발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에 생존하려면 부지런히 배우고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이렇게 말하는 최승호는 오늘도 새로운 시작을 위해 준비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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