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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영국-송화강은 알고있다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7:21:12 ] 클릭: [ ]

[제2편] (하)

차영국-송화강은 알고있다

 
소시적부터 독서에 푹 빠졌던 소년 차영국, 소학교시절 《소년아동》잡지에 그의 작문 “꿈”이 발표되여 원고료 대신1년분 소년아동잡지가 무료로 배달되였던것이 인상 깊다고그는 말한다. 고중시절 《길림신문》에 토끼꼬리만큼이나 짧은 교정소식보도 한편을 발표해 원고료 5원을 타던 희열도 아직 생생하단다.

“하해(下海)”풍에 당시 철밥통이라고 불리우던 은행직장을 때려치우고 도처로 표류하다가 2006년, 우여곡절끝에 길림신문사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시작한 그다.

첫편의 소식을 아주 시적으로 써서 웃긴적도 있었다. 2006년 5월 1일, 본사에서 실습근무를 마친 뒤 길림시기자소에 뿌리를 내렸다. 차영국은 당시 길림기자소 소장이였던 신승우선생님과 고설봉기자와 한가마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해 6월 20일 《길림신문》 “송화강기별”특간이 나왔다.

“송화강기별”은 산재지역중 조선족들이 가장 많이 집중된 길림지역 조선족군중들의 목소리를 보다 체계적이고 집중적으로 반영하여 진정 지역독자들에게 필요한 신문, 보는 신문으로 거듭나는 특간으로 꾸리는것을 좌우명으로 지켜왔다.

뒤늦게 자기의 꿈을 찾은 차영국은 종일 열정으로 부글부글 끓고있었다. 욕망의 분출구를 찾은것이다. 하고싶은 일을 하는이에겐 고생도 락이고 그래서 늘 힘이 용솟음치는가보다.

서란시 평안진 금성조선족마을에서 토지문제를 두고 조선족과 한족간에 생긴 악성충돌사건, 길림시조선족사회의 초관심사가 되였던 길림시조선족중학교와 아빠트개발상과의 팽팽한 대립사건, 반석시 취시하 촌사무실 겸 학교건물 소유권 분쟁사건 등 대형사건들을 언론의 립장에서 원만한 해결을 가져오기 위해 정력을 다 쏟았다.

반석 취시하사건은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련속으로 보도하였다. 조선족농민들과 진정부 사이는 법정에 재판을 건 대립적인 관계에서 상호 손 잡고 공동히 발전을 도모해가는 관계로 최종결실을 맺었다.

2012년, “조선족농촌순방”기획취재에서 차영국기자는 서란 조선족행정촌 14곳을 집중 취재해 서란시 조선족농촌의 맥을 짚고 국내 최초로 조선족행정촌 촌장친목회가 설립되도록 여론인도역할을 하였다.

조선족인구의 대이동으로 신문구독 잠재인구가 현저히 줄어들고있는 현실속에서도 그의 노력으로 련속 5년 동안 길림지역 신문발행부수는 평형선을 그었다.

조선족행사가 있는 크고작은 곳마다에서 차영국기자의 그림자를 찾아볼수 있었다. 그의 근면과 열정은 길림시 조선족사회 각 분야의 인정을 받았다.

길림시에서 선배기자 신승우선생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그뒤를 이은 차영국을 모른다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할만치 사람들속에 자리를 잡았다.

차영국기자의 글에서는 삶에 대한 그의 열정이 엿보인다는 평가가 나온다.

길림특간 “송화강기별”은 길림시 조선족사회에서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송화강기별”과 “송화강기별”을 엮어가는 길림기자소는 길림지역에서 《길림신문》의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독자들은 “송화강기별”의 개설로 《길림신문》이 한결 가까이 다가온듯한 느낌이라며 진정 길림지역 조선족들의 훌륭한 길동무가 되였다고 평가했다.

“송화강기별”의 창간과 더불어 길림기자소의 영향력이 나날이 커지면서 자택근무를 했던 길림기자소에 길림시 여러 려행사들에서 다투어 “우리 회사에 사무실 차리세요.” 하고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본사의 전략적방침에 따라 2010년, 지역특간이 페간되면서 “송화강기별”도 종지부를 찍었지만 지역특간에 대한 길림시조선족들의 아련한 추억은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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