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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화-장춘공항 “바가지수금” 흑막 파헤친 배짱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7:02:24 ] 클릭: [ ]

[제2편] (하)

박명화-장춘공항 “바가지수금” 흑막 파헤친 배짱

 
박명화는 대학졸업 1년후인 1995년에 길림신문사에 입사했고 10년이 지난 2005년에 “장춘공항 로무일군 벌금사건”을 보도하여 큰 영예를 얻었다. 그는 길림성정부에서 선정한 제1기 길림성출판상 우수인물상을 수여받았으며 한국 재외동포신문사 제3회 재외동포기자상을 수상해 한국 KBS방송의 취재도 받았다.

길림신문사 전임사장 남영전은 2015년 4월 2일부 《길림신문》에 발표한 《길림신문》 창간 30주년 기념기고 “길림신문의 변신”에서 “신문사가 길림성재정청 전액경제지원단위로 운명을 바꿀수 있었던 계기는 장춘공항 벌금사건관련 추적보도였다.”고 평가했다.

2005년 3월, 한국정부의 자진출국허용정책으로 불법체류했던 대량 조선족로무자들이 귀국길에 올랐다. 일부 로무일군들은 장춘공항에 내리자마자 벌금을 당했는데 벌금액은 3000~6000원씩 되였으며 벌금만 받으면 사람을 풀어주면서도 령수증은 내주지 않았다. 소위 “장춘공항 귀국로무일군 벌금사건”은 중한조선족사회에 악성소문으로 널리 퍼졌으며 그로 해서 원성이 아주 높았다.

그 소식을 우연히 다른 기자한테서 처음 들은 박명화는 설음과 울분에 몸부림치는 불쌍한 농민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는 (이 사건을 풀기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조선족 권익과 존엄에 관계되기에 신문사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근되여온지 한달밖에 안된 남영전사장에게 대청소를 하는 기회에 유리를 같이 닦으며 한마디로 들은 이야기를 여쭈었다.

그런데 며칠후 남사장이 벌금사건을 조사하여 내부참고내용을 작성하라는 중대한 임무를 박명화에게 맡겼다. 박명화는 거부할수도 물러설수도 없었다. 조사를 위해 당시 박명화는 장춘공항에 찾아가 벌금을 한 부문과 벌금당한 로무일군, 벌금과정을 조사할수 있었으나 행정기관은 두려워 감히 대면할 엄두도 못 냈다.

뒤에서 혼자 장춘과 구태 농촌을 조사해보니 로무일군(벌금당한 로무일군, 이하 같음)들이 장춘공항에 내리면 장춘변방검사소에서 먼저 조사를 한 뒤 길림성공안청 형사경찰총대 직속지대에서 공항에 와 차로 로무일군들을 싣고 관성구에 있는 구류소에 가서 벌금을 5000원씩 요구하고있었다. 또 벌금중 2000원을 나중에 장춘변방검사소에 떼여준다는 사실을 “5.1절”전야에야 뒤늦게 알았다. 이는 당시 성공안청에서 엄금한다고 명시한 규률이였다.

박명화는 벌금의 위법행위를 적발하고 로무일군을 살릴수 있는 단서를 쥐였다며 무릎을 탁 쳤다. 신이 났다. 벌금을 즉각 중단시켜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 박명화는 “5.1절”기간에 단위에 나와 제3자의 반영에 기초하여 내부참고내용을 작성했다. 기실 그때까지만 해도 박명화는 제3자를 통해 조사했을뿐 여기저기 알아봐도 로무일군을 한명도 만나보지는 못했다.

휴가가 지난후 당시 리문범서기(신문사당지부 서기)가 한어로 번역한 내부참고내용을 지도부의 검토를 거쳐 공식문건으로 작성해 장춘변방검사소와 길림성공안청 등 성 해당 부문에 발부하였다. 문건에는 “장춘변방검사소에서 로무일군들을 마구 벌금한다”는 제목으로 “성공안청 형사대대에서 벌금한다.”는 내용까지 담았다.

그후 어느날, 박명화는 행정판공실 권용한테서 “견장에 별을 두개 단 장춘변방검사소의 중위급간부 두명이 신문사를 찾아왔다가 남사장이 안 계셔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다. 순간 박명화는 남사장에게 공연히 시끄러움을 끼쳤다는 미안감이 들었다. 너무도 두려워 심장도 쿵쿵 뛰였다.

장춘변방검사소의 중위급간부들이 왔다 간 며칠후 검사소의 부소장이란 사람이 간부 한명을 데리고 신문사에 찾아와 “장춘변방검사소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신문사를 “법원에 기소하겠다.”고 살기등등하게 위협했다. 남사장이 그들의 부당행위를 당당하게 지적하자 그들은 좀 수그러들었다.

어느날, 벌금당한 로무일군 5명이 신문사를 찾아왔다. 장춘 정월담개발구 신립성조선족마을의 조선족로무일군들이였다.

로무일군들의 반영을 듣고서 공항에서 구류소로 가던 도중에 경찰차안에서 벌금당한 사람도 있었으며 주머니에 돈이 없어 은행에 들려 돈을 꺼내 그 자리에서 벌금당한 사람도 있었고 인민페가 없어 딸라와 한화로 벌금당한 사람도 있었는데 벌금전에 아무런 행정처벌서도 없었고 누구도 령수증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였다.

경찰들의 벌금절차는 모두 위법이였다. 로무일군들은 벌금을 안긴 경찰들의 이름은 몰랐지만 얼굴생김새, 인물의 특징 등은 너무나도 똑똑히 기억하고있었다. 박명화는 이 정보들이야말로 벌금행위를 파헤칠수 있는 유력한 근거라고 인정하였다.

로무일군들의 서술에 근거하여 박명화는 “우리가 대체 무슨 법을 어겼는지 모르겠어요”라는 기사를 써 신문에 게재하는 한편 증거확보에 달라붙었다. 기사를 보고 각지 로무일군들이 “공항에서 2년간 출국금지기록까지 남겨놓았다.”면서 꼭 해결해줄것을 간절히 바랐다. 로무일군들은 조선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길림신문사에 큰 신임과 기대를 걸었다.

박명화가 20여명 로무일군들의 이름, 귀국날자, 벌금액, 벌금한 경찰의 생김새 등을 정리해보니 벌금당한 로무일군들은 전부 다 “비즈니스고찰비자”로 한국에 입국했다가 불법체류했던이들이였다.

형사총대에서 로무일군들이 출국시 가짜서류 등을 리용하여 어느 회사의 부총경리, 회계사 등 신분을 위장하여 비즈니스고찰을 떠났다는 리유로 처벌했던것이다. 이들 로무일군들은 더 나은 생활을 꿈 꾸며 가정을 위해 천문학적수자나 다름없는 6만원 정도의 리자돈을 꾸어 고된 한국로무길에 오른 약소군체였지만 일부 경찰들은 동정은커녕 이들을 돈줄로 삼았던것이다.

내부참고를 올려보냈지만 정작 벌금을 시킨 성공안청 형사총대에서는 반응이 없었다. 감감무소식이였다. 장춘공항의 벌금은 그냥 이어지고있었다.

이번에는 박명화가 직접 내부참고를 성공안청에 가져갔다. 성공안청 판공실의 관계자는 “무슨 기자가 이따위걸 쓰고 다니는가?” 하며 박명화한테 눈초리를 세웠다. 밸이 꼬일대로 꼬인 박명화는 “공안청 령도들은 부분적경찰들의 악질위법행위를 파악하고 반드시 조속히 처리해야 한다.”며 큰마음 먹고 한마디 내쏘았다.

교착상태에서 남영전사장은 해당 보고서를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올려보냈다. 한편 로무일군들은 박명화가 정리한 벌금기록명부를 갖고 벌금사건을 길림성공안청 신소처에 신고하였다.

신소처 관계자는 한달에 한번씩 있는 청장접대일을 선택해 어느날, 로무일군들을 성공안청 상무부청장과 대면시켰다. 상무부청장은 로무자들의 신고를 듣자마자 대뜸 놀라움을 표하며 외지에서 임무집행중인 관련 책임자를 불러 “지금부터 다른 일을 하지 말고 이 일부터 처리하라.”고 즉각 요구하였다.

관련 책임자는 주동적으로 박명화를 찾아 모든 잘못을 시인하고 모든 의문사항에 관해 신문에 공개답복해야 한다는 신문사의 요구에도 순순히 응했다. 벌금도 1000원을 하는것으로 하고 나머지는 돌려주기로 하였다.

박명화는 5~6차에 나누어 신문사에 반영한 로무일군들의 벌금을 되찾아주었다. 벌금을 되돌려준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형사총대에 찾아가 돈을 찾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때에 환급받은 로무자가 130명에 달했다.

장춘변방검사소에서는 로무자들의 출입경통제기록을 철소시켰으며 “위법행위가 경한 로무일군에게 훈계만 하고 처벌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고 《길림신문》을 통해 보도하였다.

벌금피해를 받았던 로무일군 대표들은 본사와 해당 부문에 축기까지 들고 와 재삼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후 길림성공안청에서는 신문사에 출입기자를 요청하여왔으며 장춘변방검사소에서는 또 박명화가 “검사소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했으며 그를 “정직하고 선량하다.”고 평가하였다. 박명화는 또 련속 6년 유일한 조선족대표로 변방검사소의 사회감독원으로 초빙되였다.

박명화는 사회감독원으로 있으면서 장춘변방경찰들에게 “미소봉사, 한국어구사” 등 건의를 제기하였다. 또 좌담회에 참가한 길림성검험검역국 부국장에게 “로무자들이 출국시 신체검사를 해야 하는 불필요한 작법을 페지할것”을 요구, 과연 그후 로무자들은 출국시 “신체건강증”을 바치지 않아도 되였다.

“장춘공항 로무일군 벌금사건”외에도 박명화는 한국선장과 조선족선원 사이 모순으로 인해 폭발한 “페스카마호선상살인사건”, “도문시 장안진 마반촌 50헥타르 토지 불법양도사건” 등 추적보도와 문제해결에 참여하였다.

백성들은 아직도 박명화를 잊지 않고있다. 10년전에 만났던 로무일군들이나 그후에 만난 농민들은 지금도 전화로, 워이신으로 박명화와 련락하고있다.

박명화는 사건보도를 통해 “소통의 중요성”을 알게 되였으며“국가행정기관이라고 해서 결코 두려운 곳이 아니다.”라는 도리를 알게 되였다.

그는 중대사건을 보도함에 있어서 원만한 해결을 가져오자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에 모를 박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째, 사건 당사자들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 둘째, 담당기자의 의지가 확고해야 한다. 셋째, 신문사 지도부의 전적인 지지를 받아야 한다. 넷째, 정부기관의 리해와 지지를 받아야 한다. 다섯째, 국가대정책배경하에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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