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권용-자타가 인정하는 “팔방미인”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6:33:40 ] 클릭: [ ]

[제2편] (하)

권용-자타가 인정하는 “팔방미인”

 
1992년이 막 가는 어느날, 당시 장춘시가스회사에서 근무하고있던 권용은 행운스럽게 “길림신문사 본부 장춘이사” 준비사업에 참여하게 되였다. 그 이듬해인 1993년 1월 1일, 길림신문사 본부가 장춘에 자리 잡게 되면서 권용은 길림신문사 정식직원으로 되였다. 정경락부총편집은 권용의 한어실력이 괜찮다는걸 미리 파악하고 그에게 대외협력과 행정업무를 맡겼다.

1998년, 고 리금남사장이 성 모 단위와의 여러차례의 교섭을 거쳐 끝내 “길림신문사건물신축신청안”을 허락받았으며 국토그룹개발회사에서 공사를 책임지도록 합의를 가지게 되였다. 국토그룹개발회사와 계약을 마치고 리금남사장과 당시 판공실 주임으로 있던 권용은 국토그룹개발회사의 진암경리와 성씨가 위씨인 경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였다. 길림신문사 사무청사 신축안이 해결되였으니 기쁜김에 술 한잔 하자는 뜻에서였다. 한껏 부풀어오르는 심정을 안고 권커니작커니하며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우고있는 와중에 진암경리는 공사가 끝나면 멋진 간판을 보충선물하겠다고 말했다. 권용은 비록 취기가 오르긴 했지만 진암경리의 그 말을 기억해두었다. 나름대로 궁리가 있었던것이다.

2000년, 길림신문사 신축건물이 준공된 며칠후 권용은 진암경리의 사무실을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리고는 다짜고짜 간판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진암경리는 간판은 계약내용에 해당되는게 아니라며 아닌 밤중에 무슨 홍두깨냐는 표정이였다. 진암경리가 아마 이런 표정을 지을거라고 미리 예측한 권용은 아무런 당황함도 없이 언제, 어디서 진암경리가 어떻게 자기와 약속했노라고 차근차근 여쭈자 그는 내가 그랬느냐고 반신반의하는 표정이더니 나중에 시원스레 대답했다.

공사비용도 이미 결제를 마친 상황에서 진암경리더러 취중약속을 지키라고 한것은 조금 무리이긴 했지만 그로서는 다문 얼마간이라도 신문사의 비용을 절약하고싶은 마음에서였다. 이렇게 신문사는 만여원어치에 달하는 멋진 간판을 무료로 얻어 걸게 되였다. 지금 길림신문사건물 서쪽벽에 세로로 걸어놓은 금색간판이 바로 그때 받은 간판이다.

2005년, 길림신문사 발행부가 정식 설립되자 권용은 발행부 주임으로 부임되여 발행업무를 책임지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해마다 10월말부터 12월말까지 길림성의 여러 조선족마을들을 다니면서 신문주문을 촉구하였다.

그가 통화현 하선촌에 처음으로 내려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도 하선촌의 김광호서기는 상다리 부러지게 음식을 차려놓고 그를 대접했다. 워낙 술을 즐기는 김서기는 롱담조로 술 한잔에 신문 10부씩 주문할것이라며 술을 연거퍼 권했다. 권용은 몸을 내번지고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신 술이 은을 냈는지 아니면 신문을 위한 열정에 감동되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권용의 시원시원한 성격이 맘에 들었는지 50여세대 되는 하선촌에서 그해에 신문을 80부나 주문했다.

그후로부터 권용과 김서기는 서로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가 되였다. 서기직을 사임한후에도 그는 늘 권용과 련락을 가지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김서기가 전화를 걸어왔다. 손자가 백혈병에 걸려 장춘의 병원으로 이송해 치료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권용은 인차 길림대학제1병원의 백혈병치료전문의와 련계해 환자가 자세한 진찰을 받도록 했으며 입원기간에도 여러번 병원에 찾아가 치료상황을 알아보면서 김서기 손자에 대한 진정을 베풀었다.

권용은 신문발행때문에 숱한 독자들과 깊은 인연을 맺은것이 아직까지 재부로 남아있다고 하면서 영원히 그 인연을 잊지 않을것이며 소중히 여길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겨울의 어느날, 권용은 최화기자, 장춘영기자와 함께 집안시로 내려갔다. 그날 저녁 그들은 집안시민족사무위원회 김영식주임과 집안시조선족중학교 장혁문서기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신문주문에 대해 부탁하였다. 생각밖으로 그들이 흔쾌히 응낙해주어갔던 일은 순순히 풀렸다. 이튿날 아침 권용일행은 기쁜 심정을 안고 귀로에 올랐다. 그런데 밤새 내린 폭설로 길이 무척 미끄러웠다. 그날 차는 권용이 직접 운전하였다.

집안에서 장춘으로 오자면 반드시 로야령(老爷岭)를 넘어야 한다. 겨우 차 두대가 통과할수 있을 정도의 좁고 가파른 산고개길은한쪽은 높은 산과 이어지고 다른 한쪽은 깎아지른 벼랑이여서 웬만한 운전기술로는 통과할 엄두도 못 낸다. 그날 따라 폭설이 내린 뒤라 오르막을 오를 때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정지시키기만 하면 그자리에서 다시 시동이 걸리지 않기때문에 고개밑까지 되돌아와서 재시동을 건 다음 다시 오르막을 톺아야 했다.

고개를 오르기전에 최화기자와 장춘영기자는 별문제가 없을것이라고 일부러 말하면서 권용의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었다. 시동이 꺼질가봐 모두들 마음을 조이며 한창 조심스레 올라가고있는데 반대쪽 방향에서 집채 같은 트럭 한대가 기세등등하게 접근해왔다. 어쩔수 없게 된 권용은 길가에 급히 차를 정지시켰다. 트럭은 무사히 지나갔지만 신문사 차는 스스로 자체회전을 하는것이였다. 뒤쪽 의자에 앉은 최화기자와 장춘영기자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같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럴수록 권용은 아무런 내색도 내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다행히 차는 로야령(老爷岭)아래까지 무사히 내려왔다.

그때에야 그들 모두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였다. 권용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재시동을 걸어 단숨에 로야령을 타넘었다.

권용은 지금도 그 일을 회억하면 손에 땀이 날 정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위기속에서도 자기를 믿어준 최화기자와 장춘영기자에게 고맙다고 한다. 비록 발행때문에 위출혈까지 온적도 있었지만 권용은 20여년간 길림신문사에 몸을 담아왔기에, 또한 신문사가 자기를 키웠기에 그런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영원히 길림신문사와 함께 갈것이라고 했다.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