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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자-“《길림신문》마을”과 끈끈한 인연 맺고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6:20:07 ] 클릭: [ ]

[제2편] (하)

김영자-“《길림신문》마을”과 끈끈한 인연 맺고

 
김영자는 지금도 노트 몇권을 소중히 간직하고있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디자인이 정갈한 책들과는 비할바없이 볼품 없지만 이속에는 그가 근 20년간 《길림신문》 발행길을 불철주야없이 애면글면 뛰여다닌 애잔한 기억이 담겨져있다.

김기자가 발행길에 다녀온 촌들만 160여개, 룡정시행정구역도만 얼핏 훑어보아도 향진이 그때는 17개, 그밖에 기타 현, 시 10개 향진에 대중소학교, 유치원, 병원, 가두, 기업, 기관 그리고 현, 시 당위 및 선전부는 물론이고 민족사무위원회, 경제개발구에까지 거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1995년부터 김영자가 발행으로만 인연을 맺게 된 지인은 무려 300여명에 달한다.

지난 세기 신문사족적에서 보면 90년대 후반기는 본부를 연길로부터 장춘에로 옮겨간후의 중요한 과도기이자 전환점이였다. 연변분사에서 총 발행량의 2/3를 거의 감당해왔으리만치 그때는 힘들고 고단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름찼던것만큼이나 가슴이 뿌듯해난다. 그만큼 《길림신문》은 과도기에도 흔들림없이 연변에 뿌리를 튼튼히 박게 되였다.

《길림신문》은 성급조선족당보이지만 다년래 발행때마다 지역보호주의로 찬밥신세가 되는 설음도 많았다.

연변의 발행량이 평온하게 과도기를 넘길수 있었던것은 당시 출판 및 연변분사를 주관하고있었던 리원철부총편집과 기자부의 최혜순주임이 구사하고 강력 추진한 “《길림신문》마을”만들기라는 그림이 있었고 분사 개개인들이 일심동체로 자기 담당구역을 헌신적으로 뛰였기에 가능했다. “《길림신문》마을”을 육성해가면서 기자들은 발행뿐아니라 취재, 통신련락까지 일석삼조의 희열을 맛 보기도 했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1995년부터 연변분사에서는 “《길림신문》애독자좌담모임”을 련속 3년 주최했다. 신문사 재정으로는 만만치 않는 부담이였지만 기업인들의 후원으로 무난히 치뤄질수 있었다. 신문을 20부 이상 구독하는 촌 혹은 가능성이 보이는 촌의 간부들을 대표로 초청했는데 참석자는 80명으로부터 해마다 점점 늘어났다. 좌담모임은 신문과 독자의 거리를 단축하는 소중한 플래트홈이였다.

당시 신문사에는 리송영사장으로부터 리금남사장에 이르기까지 “《길림신문》마을”의 모태라 할수 있는 모델마을이 신화같이 마음속에 건재해있었다. 촌민 500여세대에서 우리 신문을 300부 좌우, 그것도 10여년래 꾸준히 구독하는 촌으로 룡정시 조양천진 조양촌이 있다.

조양촌은 귀감이자 기발이였다. 분사 기자들은 신문을 10부로부터 20부, 30부 나아가 그 이상 구독하는 마을을 만드는 작업에 도전해나섰다. 행정촌, 행정구역적으로 기자들은 맡은 각 현, 시 및 향, 진, 촌들의 경제문화토대와 간부신상정보를 하나하나 확보하고 나아가 현, 시, 향, 진, 촌급의 발행회의를 포함한 농촌사업 관련 회의를 할 때마다 찾아가 인맥을 헤치고 넓혀나갔다. 회의에서 “신문 사라는 광고”(농민들은 그렇게 말했다)를 한것으로 성차지 않아 회의후 이어지는 술자리(그때는 어느 부문에서든지 회의를 마친후 촌간부들한테 식사를 대접했다)에까지 “겁없이” 가담해 “일당백”으로 촌간부들과 술잔도 수없이 비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나니 과음에 시달린 어설픈 에피소드들을 수없이 남기기도 했지만 대신 신문부수 확보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시련이였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회의에 “협찬”하는 의미로 신문사 명의로 한해는 룡정시 동성용진의 농업종합회의 및 발행회의에 반팔 티셔츠를 한 꾸럭 들고 갔는데 하필이면 그날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줄이야. 덕분에 술상에서 헤여질 때 촌간부들로부터 “추운데 이 난닝구(사투리)를 잘 입고 가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넘치게 받은 “웃음거리”도 남겼다. 향진회의에서 눈도장이나 찍고 그다음은 직접 1대1로 통화하고 촌으로 찾아가는 코스가 이어진다. 그렇게 김영자는 해해년년 당시 룡정시의 17개 향진(현재는 7개), 집체과수농장 두개에 분포된 100개에 가까운 촌과 농장마을을 실북 나들듯이 누비고 다녔다. 최혜순선생은 화룡시, 김청수선생은 도문시, 최승호선생은 안도현, 60세를 앞둔 리선근선생은 돈화시를 맡고… 모두가 한사람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길림신문》을 본 적 없다거나 “안 주문해도 된다.”고 왼고개를 틀던 촌들에서 1, 2부씩 주문하기 시작하더니 차츰 흥미를 붙이면서 10부, 20부… 50부씩 늘어났다. 놀랍게도 100부 이상씩 주문하는 마을도 나타났다. 바로 우리들이 고심한 “《길림신문》마을”이 태동하는 감격스러운 과정이였다.

3, 4년에 걸쳐 “《길림신문》마을”이 룡정시에 40여개, 연변에 100여개로 늘어났다. “점점의 불꽃이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는 명언을 떠올리게 하는 값진 열매였다.

당시 김진길주장과의 인터뷰 장면

해마다 11월과 12월은 신문 주문의 관건대목이다. 이때면 촌간부들은 년말이라 일손을 쪼개 써야 한다. 우리는 마지막 기일이 지척에 다가오기에 항상 초긴장 상태에서 보내야 했다. 이 촌에서 구멍이 나질것 같으면 이 촌으로, 저 촌이 불안해나면 저 촌으로 뛰여야 한다. 이때 기자는 짜장 촌간부들의 뒤꽁무니거나 그림자와 다름없다. 그야말로 피 말리는 사투이다. 촌의 간부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휴일이든 명절이든 상관없이 찾아다니다나니 하향일자가 년말 석달에 50일쯤은 훌쩍 넘기군 했다.

그 오랜 세월속에서 “이제는 김기자 온다면 무섭다.”는 말도 고맙게 들렸고 그렇게 말하는 간부들이 “무서워서” 신문을 주문해주니 이제는 편안하게 다가갈수 있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그사이 촌들이 합병되기도 했고 촌간부 교체도 몇번은 있었지만 스스로도 “《길림신문》마을”과의 정만은 놓기 아쉬워 머리를 갸우뚱할 때가 있다는 김영자. 웃다 울고 울다 웃을 일이라면 《길림신문》을 통해 “《길림신문》마을” 촌민들이 한국방문취업제를 남먼저 접하게 되였고 또 애매하게 헛돈을 팔지 않고 한국취업길에 대거 올랐다는 사실이다. 김영자는 촌간부들의 말에서 촌민들 태반이 한국에 가다나니 이제는 신문 볼 사람도 정말 몇 사람 안된다고 안타까와하니 아쉽긴 하지만 《길림신문》에 애정을 쏟아준 분들께 뭔가 보답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진다고 소감을 털어놓았다.

우리 신문이 이젠 당당히 당보발행탄력을 받고있어 많이 편안해졌지만 30대, 40대를 불사른 과거를 회상하니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천방지축 뛰여다닌 시절이 더없이 보람스러웠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고 리금남사장님도 틀거지없이 장춘과 연변분사를 오가면서 발행철에는 기자들과 하향하군 했는데 그 기억이 아직도 포근하게 남아있다. 조양천진 광영촌에서 첫해에 50부를 주문하면서 일약 “《길림신문》마을”로 떠오르게 된데도 리금남사장님이 당시 광영촌의 당지부서기와 회의석에서 인연을 맺었기에 이뤄지게 되였다. “《길림신문》원조마을”-조양촌과의 인연도 고 리송영사장님의 뒤를 이어 고 리금남사장님 때에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기자들이 공공뻐스를 비비닥거리며 두발로 뛰는게 가슴 아파 고 리금남사장님은 년말 마지막 3개월에는 자신이 걸어서 출퇴근하면서도 신문사의 유일한 승용차를 아예 발행기자들한테 내주었다. 그때로부터 우리 신문사는 발행철이면 기자가 “사장차”를 타고 하향하는 “사치”스러운 관례가 “굳어지”기도 했다. 지난 세기 90년대말까지 사무실을 연변분사에 두었던 리원철부총편집은 짬짬이 연변 각 현, 시 담당기자들과 함께 뛰면서 “《길림신문》마을” 진척을 거시적으로 파악하고 면밀히 포치해나갔으며 손수 훈춘시 영안진 영안촌, 연길시 소영진 민주촌을 “《길림신문》 100부 마을”로 수립해놓기도 했다.

운전사 김수철과 류향휘는 발행철이면 거의 쉬는 날 없이 핸들을 잡고 “《길림신문》마을”만들기작업에 기자들과 “공동작전”하며 남긴 “옛말”을 우리 기자들은 누구나가 간직하고있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16년 동안 “《길림신문》마을”이란 한우물을 파온 김영자의 노트속에는 《길림신문》 발행사업을 응분의 일로 받아들이고 전폭적으로 밀어준 향진, 현시급 조선족지도간부 100여명의 전화번호와 직무가 적혀있다.

그속에는 현임 길림공상학원 신봉철당위서기도 들어있다. 신봉철서기는 김영자가 발행초행길에서 만난 첫 시당위 서기이다.

1995년, 당시 “향진당위 서기 초대석”-룡정시 전문란을 꾸리며 리원철부총편집과 함께 룡정시당위 신봉철서기를 인터뷰하면서 처음 안면을 익히게 된 김영자는 발행임무를 맡고는 무작정 신봉철서기를 찾아갔다. 신봉철서기는 선전부에 직접 김영자기자를 소개해주었고 곧추 룡정시를 대외로 홍보하는데 있어서 《길림신문》의 필수적 역할을 조목조목 강조하면서 신문발행 협력을 관련 일군들에게 진지하게 당부했다. 그뒤 신봉철서기는 바쁜 시간을 내여 길림신문사 연변분사 창립식에도 몸소 참석했다. 룡정시당위 서기의 참석은 무언의 성원이였다. 10월 19일, 신봉철서기가 직접 룡정으로 김영자기자를 불렀다. 시정부 산하 각 부문의 주요 책임자들이 같이한 저녁식사자리에 김영자를 동참시켰던 것이다. 그제야 김영자는 신봉철서기가 곧 룡정시를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 와중에도 신봉철서기는 《길림신문》 기자를 좌중 책임일군들한테 풋면목이나 익히게 하려는 배려였다. 그 자리에서도 신서기는 룡정에서 취재와 발행에 주인공적으로 협력해달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당부하였다.《 길림신문》 발행을 놓고 어영부영하는 세태와 대조되는 진정 흉금을 열어놓은 한 민족간부의 풍채를 엿볼수 있었다고 김영자는 아직도 그때의 감동을 잊지 못하고있다.

11년 뒤, 김영자는 길림성사회로동청 부청장직을 맡고있는 신봉철청장을 장춘본사에서 만나게 되였다. 바로 신봉철청장이 《길림신문》,《 장백산》 발전연구회 회장으로 위촉받은 그 무렵이였다. 그날 신청장은 감불생심(敢不生心),“오늘의 저녁밥은 룡정의 ‘주재기자’였던 당년의 쑈진(小金)을 만났으니 당연히 내가 사야 한다.”고 소탈하게 웃으면서 분사 임직원들도 함께 불렀다. 오늘도 김영자는 그냥 “청장”이라는 호칭 대신 “신서기님”이라고 부르는데 익숙해졌다. 세월이 지나도 당년의 한 이름없는 기자를 기억해주는 신서기의 아량에 가슴이 후더워난다는게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룡정의 40번째 “《길림신문》마을”은 두만강기슭의 삼합진에서도 오지라 할수 있는 청천촌이였다. 발길이 삼합의 “달동네”로 불리우는 청천촌에까지 닿을수 있었던 것은 현 김영남 룡정시당위 상무위원(룡정집중공업구 전임주임, 당사업위원회 서기)이 길을 열어주었기에 가능했다. 1997년 11월 7일, 김영자는 뻐스편으로 삼합진에 찾아갔다. 당시 삼합진당위 서기를 맡고있던 김영남은 김영자기자한테서 삼합진의 신문발행상황과 “《길림신문》마을” 진척상황을 듣더니 신문 한장 들어가지 않고있던 편벽한 촌인 청천촌을 “시점”으로 뚫어보는게 어떠냐고 당위 기타 성원들과도 의견을 나누었다. 모두가 동감하자 김서기는 그 촌으로 하향 갈 일정을 앞당겨 당위 선전위원과 기자를 태우고 손수 찌프차핸들을 잡았다. 청천촌에서는 유사이래 처음으로 기자가 방문 왔다면서 반갑게 맞아주었다. 당위 서기가 나서니 촌에서도 뭔가 도와주려고 고민하는게 달랐다. 나중에 구독하는 촌민들에게 촌에서 보조해주는 파격적인 우대조건까지 내놓았다. 그 이듬해부터 우리 신문이 25부나 들어갔다. 그때까지 일반촌민들이 신문 같은걸 보는 전례가 없던 마을에서 일궈낸 쾌거였다. 청천촌에 이어 삼합진의 학서촌도 나중에 “《길림신문》마을”에 합류했다.

당시 삼합에서 룡정으로 나가는 뻐스는 아침에 한번, 오후 2시에 한번이였다. 그날 청천촌을 다녀오니 삼합-룡정뻐스가 이미 떠나간 뒤였다. 전해 그맘때도 김기자가 신문발행으로 삼합에 왔다가 귀가뻐스를 놓쳐 향의 안내로 비여있는 선전위원네 집에서 묵어간 적 있었다는 사연을 향간부들한테서 들었다면서 김영남서기는 “올해도 그렇게 묵고 가게 하면 내 체면이 뭐지.” 하면서 그날 굳이 찌프차로 연길까지 김영자를 실어다주었다.

지금 백금향에 합병된 전 용신향의 “《길림신문》마을”로 갔다가 역시 룡정으로 나오는 뻐스시간을 놓쳐 김영자는 용신향당위 선전위원이자 부련회 주임으로 있던 주영애네 집에서 하루밤 묵은 적도 있다. 가뜩이나 황송했는데 이른새벽 두런두런 말소리와 함께 특별한 향기가 코로 날아들어 깨여나보니 그들 부부가 어느새 초두부를 앗아놓고 차조로 찰떡을 만들려고 시루김까지 다 올려놓고 있었다.

외롭고 지칠 때가 많았지만 이처럼 따뜻하고 고마운 각급 간부들이 밀어주었기에 김영자는 발행길을 내처 16년간이나 달릴수 있었다고 말한다.

룡정시당위 현광호서기(퇴직, 현 연변주서예연구회 회장), 손자립(한족, 현 연변주직속기관 당사업위원회 상무부서기)부부장, 안도현당위 선전부 유룡남부장(현 연변주과학기술협회 주석), 연길시당위 선전부 리수무(한족)부부장, 돈화시민족사무위원회 최만호 전임 주임, 김길남주임, 룡정시교육국 김명종국장(현 연변교육연구소 소장), 로투구진 선전위원 한금옥(조양천진당위 부서기), 지신진 김영금(현 룡정시총공회 부주석), 당위 김미선선전위원, 덕신향 김춘일, 리웅현(현 룡정시심계국 국장)선전위원, 동불사향의 강호선전위원(현 로투구진 부진장), 태양향 김호선전위원(현 룡정시농업국 부국장), 동성용진 최해옥선전위원(현 덕신향당위 부서기)-김영자한테는 이름만 들어도 반가와나는 고맙고 정겨운 얼굴들이였다.

당시  김영자기자가 룡정시당위현광호서기(앞줄 왼쪽 두번째사람),손자립(앞줄 왼쪽 세번째사람)선전부장, 대외경제무역국 책임자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일전에 김영자는 20년째 다녀온 룡정시 지신진 길흥촌의 최명국서기와 통화하다가 은연중 최서기가 곧 “퇴임”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꼭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럼 다른 “동지”들과도 “김기자 오는 날에 모여앉자고 이르겠다.”고 하는 최명국서기의 말에 그의 마음은 벌써 낯익은 길흥촌으로 달려가고있었다.

향진, 촌마을 행정단위가 10년 사이에 절반 가까이 합병되고 농민들의 도시진출이 날로 늘어나는 등 객관적 원인과 신문사가 소속관계를 길림일보신문그룹에로 옮기게 된 두번째 전환기(2001-2005년, 연변분사의 1선 기자를 4명으로 감원)를 겪으면서 “《길림신문》마을”은 아쉽게도 퍼그나 줄어들게 되였지만 지금까지도 연변의 훈춘시 영안진 영안촌, 룡정시 지신진 길흥촌, 조양천진 조양촌, 연길시 소영진 민주촌 등 촌들이 여전히 “《길림신문》마을”로 변함없이 남아있어 마음이 포근해난다고 김영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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