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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수-백년부락에 애틋한 사랑을 쏟아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5:20:58 ] 클릭: [ ]

[제2편] (하)

김청수-백년부락에 애틋한 사랑을 쏟아

 
2001년, 성급신문사로 타이틀을 걸고있던 길림신문사가 연길로부터 장춘으로 정식 이전하게 되였다. 그러면서 연변에 호적을 둔 대부분 편집기자들은 연변주의 대리관리대상으로 되고 따라서 사업에서 손을 놓을수 밖에 없게 되였다. 그속에 중견기자로 활약하던 40대 초반의 김청수기자도 들어있었다…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존엄과 위망을 쌓아가면서 펜을 날리던 로편집기자들은 하루아침에 무직업자(월급은 지불받음)로 전락되였고 신문사 사업에 평생을 바쳐온 리퇴직일군들도 다른 단위로 서류를 옮겨야 했다. 희망으로 충만되여있던 한 성급신문이 제자리를 바로 찾으려다 그 핸들이 꺾이면서 많은 일군들이 터를 잃고 방황해야 하는 설음에 부대껴야 했다.

시골의 취재길에서 어처구니없는 “그른 결책”에 편집기자들은 항의신소를 다녔다.

그나마 리퇴직일군들은 정부 부문을 찾아 문건, 정책들을 내놓으면서 원 단위에 다시 적을 옮겨두게 되였다. 그런 진통시기가 저그만치 5년 세월이 흘렀다.

길림신문사는 와중에 2000년부터 중국조선문신문사중 가장 일찍 꾸리던 인터넷신문을 멈춰세워야 하였고 2005년에 이르러 다시 재가동하면서 일손이 딸리자 김청수기자와 박금복선생을 편역(编译)원으로 초빙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두 기자를 모두 편집기자로 복귀시킬 의향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던 2006년 11월, 김청수기자는 그나마 젊은 기자라는 조건으로 다시 본사에 복귀하게 되였다. 그때 박금복선생은 김청수기자에게 간곡한 부탁을 남겼다.

“청수, 사업을 잘하오. 어떻게 다시 찾은 사업터인데. 나도 복귀시켜달라고 함께 떠들면 청수의 전근에 지장이 갈가봐 그만뒀소. 나야 저보다 나이도 많으니 이제 기다렸다 퇴직하면 그만이지…”

말이 편안하지 기실 박금복선생도 퇴직나이를 한참 멀리 둔 때였다. 하지만 젊은 기자의 앞날에 영향이 미칠가봐 자신은 잠자코 있었다는 그의 아량에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길림신문사 사람들의 마음이였다.

김청수는 길림신문사에 출근한 10여년간 로편집기자들의 사랑을 많이도 받아왔던것이다. 열정만으로 뛰여다니던 시기 원고를 써오면 빨간색잉크펜으로 동그라미를 쳐가며 까근히 수정을 하고 편집의견까지 써주시던 로선배님들, 장춘으로의 이전준비로 달마다 팀을 무어 당직을 설 때면 모두가 한집식구가 되여 같이 생활하고 같이 사업하던 친인 같은 동료들, 장춘에 가서도 또 산재지역으로 취재를 떠나서는 돌아오는 그 밤으로 원고를 완성하여 정상적인 신문출판을 보장하던 편집기자들, 그네들의 헌신적이고 고상한 사업정신은 그대로 본보기가 되였던것이다.

평생의 젊음과 정열을 깡그리 사업에 바쳐온 그들이 느닷없이 사랑하는 일터에서 “밀려나게” 된것이다. 김청수기자는 그들과 함께 “락방”의 심연속에서 모대기다가 다시 정상출근을 하게 되자 그들을 마주하기가 안스러웠고 또 미안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네들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처절한 절규를 깊이깊이 아로새기며 “《길림신문》은 강해져야 한다. 김청수는 다시 일어서야 한다!” 하고 어금이를 깨물었다.

시골의 취재길에서

길림신문사에는 기층백성들속에 깊이 뿌리 박는 전통이 있다.

다시 취재길에 오른 그는 본색을 잊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업하였다.

그러던 2010년 6월의 하루, 그날은 일요일이였다. “두만강문화관광사진전” 취재를 갔던 김청수기자는 현장에서 지인인 도문시제2소학교의 허송절선생님을 만나게 되였다. 허선생은 그 자리에서 고향마을인 월청진 백룡촌에서 한 귀향로무자가 민속촌을 건설한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월청진 하면 김청수기자가 다년간 분담지역으로 맡았고 당지 촌민들과 깊은 교분으로 자주 발길을 돌렸던 고장이라 고향 가는 기분으로 단연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백룡촌은 도문시 월청진의 맨 끝마을이였다. 마을의 김경남이라고 하는 촌민이 10여년간 출국로무로 번 돈을 몽땅 투자하여 마을의 100년 넘는 고택을 수건하고 주위에 초가집 13채를 지어 원 고향마을의 모습을 재현하고있었다. 우선 김경남촌민은 사유가 있는분으로서 촌민들이 하나둘 떠나고 학교마저 없어진 “몰락”한 고향마을을 다시 민속촌으로 꾸려놓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치부하면서 선조들이 피와 땀으로 개척한 고향땅을 지켜내리라는 강한 의지를 품고있었다.

그는 “석자 깊이 땅을 파서라도 문물 하나 더 찾아내고 풍속습관 한가지라도 더 발굴하여 후대들에게 전하고싶다.”며 고향마을을 중국조선족민속문화관광의 명소로 건설할 포부도 피로했다.

주인공의 고향사랑과 민족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은 김청수기자는 그 감동을 실사구시하게 잘 표달하기 위해 밤을 패가며 쓰고 지우고 수정하였다. 드디여 “귀향로무자 두만강반에 백년부락을 일떠세운다”는 기사를 완성하여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 기사가 제21회 중국신문상(국제전파류) 2등상을 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수상소감 첫머리에 그는 “조선문신문사에 돌려준 길림성당위와 길림일보신문그룹의 따뜻한 관심과 보살핌이 있었기때문”이라고 또박또박 써넣었다. 이는 절대 인사치레처럼 하는 공식글구가 아니였다. 오늘날은 《길림신문》을 길림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국제사회에서 길림성을 알게 하는 중요한 창구로 부상시켜 다방면의 중시와 관심을 돌렸기에 한낱 소수민족신문사의 민속문화기사가 중국신문상을 받아안을수 있었던것이다.

다음으로 김청수기자는 본사 지도부에서 단결분발의 대환경을 마련하여 기자들의 적극성을 불러일으키고 편집부에서 또 책임감있게 기사들을 선별하여 수상플랫폼에 등장시킨 결과라고 고마움을 고스란히 적어넣었다. 김청수기자는 중국신문상(국제전파류)을 타기까지 자기의 작품이 추천된줄도 모르고있었고 상을 받아안고서야 그 상을 타게 된 과정과 그 상의 무게를 알게 되였던것이다.

상이란 크든작든 이상하게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워낙 부지런하고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뛰여다니던 김청수기자는 오늘도 백성들이 부르는 곳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여가고있다. 그는 키가 별로 크지 않다. 사람들로부터 “차돌 같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작달막하고 단단한 몸매로 산간벽지 막바지까지 뛰여다니며 “노다지”를 캐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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