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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함-“정함이” 또는 “정하미”는 누구길래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5:18:22 ] 클릭: [ ]

[제2편] (하)

김정함-“정함이” 또는 “정하미”는 누구길래

 
김정함의 원래 이름은 김정애이다. 신문사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다른 한 편집이 있었기에 부득불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김정함으로 오래동안 불려오다가 요즘 김정함의 아이디는 늘 하미(hami)로 통하고있다. 일찍 컴퓨터를 하기 시작해서부터 MSN에서도 그랬고 현재 QQ에서도 지어 워이신에서도 그렇다. 김정애도 이미 이 아이디가 친근하고 자기가 완전히 하미→정함이→김정함으로 변한듯 착각하고있다. 허나 사실 그녀는 엄연히 김정애다. 일체 자기 신분을 증명할수 있는 신분증, 기자증, 운전면허증 모두가 에누리없는 김정애다. 동료들이 “정함이-” 하고 불러주며 그녀는 거기에 무척 친절감을 느낀다. 주위에서도 그녀를 김정함으로 알고있고 또 그렇게 부르고있다. 이렇게 김정애(2)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였다. “길림신문사 사람”이 되여버렸다.

김정애(2)는 교직생활 6년만에 《길림신문》을 선택하였다. 신문사가 장춘으로 이주하면서 당지에서 교정인원을 찾았던것이다. 그는 그때의 그 광경을 새록새록 기억하고있다.

당시 조판은 컴퓨터화를 시작했지만 기자들 원고는 아직 육필로 쓰고있었다. 교정순서는 대략 이러했다. 먼저 조판실에서 기자의 원고를 타자해 교정부에 보내오면 한 사람이 소리내여 읽고 다른 한 사람이 원고를 들고 대조, 확인하는것이 초교, 이를 조판실에 들여보내 적자를 한후 판면을 맞추어 내보내면 이번엔 읽는 사람과 대조하는 사람이 서로 바꾸어서 한번 더 보는것이 2교, 마지막에 전 면을 한번 자세히 보는것이 검교, 이렇게 3교를 보는것이 관례였다.

연예원고에서 가수 “위유(韦唯)”를 “위위”로, 국제시사원고에서 “모 의원은 하야를 하고”를 “하야를 타고”로 해놓아 실수했던 일… 단순히 육필원고여서 “유”와 “위”, “하”와 “타”가 비슷하게 보여서뿐만이 아니였다. 주관판단으로 객관분석을 대체한 잘못이였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교정도 필경은 종합지식의 체현임을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였다.

그렇게 교정부 전원 넷이 서로 바꿔가며 3교를 열심히 보고 총편집의 판면심열까지 다 거쳤는데도 인쇄되여 나온 신문을 보면 “소 눈깔만한” 글자가 틀리게 나갈 때도 있고 하니 단 열정만으로 되는게 아니였다. 차근하고 또 까근해야 했고 참다우면서도 또 열심해야 했으며 공부하고 또 탐색해야 했다. 교정은 진정 무한한 책임감과 함께 더없이 치밀함을 수요하는 직종이였다.

교정에서도 그렇고 편집을 하고있는 지금에도 사전 찾기는 진리로 작용하고있다. 한 단어를 놓고도 “이”냐 “히”냐, 순한소리냐 된소리냐, 받침이 있느냐 없느냐 등등 몽롱할 때가 너무 많다. 이때면 무조건 사전을 찾는다. 이 사전에 없으면 저 사전, 어학사전에 없으면 백과사전 그리고 중국사전, 한국사전, 조선사전으로 반복 대조하면서 찾고 또 찾으며 익혀두고있다. 이렇게 어느 사이 사전과 절친하게 되였다. 배움에는 참 끝이 없다. 그만큼 배우는 즐거움도 무궁무진하다.

교정을 깊이 하면 검열에서 심열까지 가게 된다. 이는 물론 종합지식을 수요로 한다. 교정경력이 알차기만 하면 기자생활도 편집생활도 덤으로 수월해진다. 실천으로 얻은 결론이다.

김정애(2)의 교정생활은 참 즐거웠다고 한다. 신문의 수요라면 모든 안배에 무조건 복종하는 마음가짐으로, 욕심도 타산도 없이 단순하고 만족스럽던 몇년간의 교정부생활이였다. 이주초기 간고한 환경에서 함께 했던 선배님들-박경숙, 김청수, 최혜순, 리화옥, 김옥자. 불러보는 매 한 사람 다 너무 친근하다. 그후 교정부가 설립되고 선후로 함께 했던 리정자, 심영옥, 류순희, 박명화도… 선후배동료들의 사랑과 배려를 많이 받았다. 돌이켜보면 모두에게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정하미”는 기자부에 가면서 받은 “상견례”였다. 한 부서에 두 김정애기자가 있어 지면기사에 박는 이름이 문제시되였다. 큰 정애, 작은 정애라고 하자니 나이가 많은 정애는 키가 작고 키가 큰 정애는 나이가 어려서 안되였다. 이외에도 둘 다 안경쟁이, 그래서 한때는 각기 남편의 성을 따서 박정애, 하정애라고도 불렀다. 결국 지도부에서 “과단한 결책”을 내렸다. “한 사람이 이름을 바꾸라.”고 말이다. 김정애(2)가 후에 “굴러온 돌”이니 알아서 해야지. “내 이름 한번나 혼자 지어보자!” 나쁠것도 없었다.

그런데 후에 서로 만나 통성명을 하고나면 “어? 녀기자였군.” 하는 반응에 웃고말았던 기억도 있다.

당시 기획보도로 상을 탔던 기사 “연변사람, 세계인과의 거리는?”도 이 생경한 이름때문에 더구나 재미 있는 일화를 엮었던 스토리가 있다. 실은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르고 덤빈데 불과했는데.

기자생활시기는 지도부의 인사변동이 많던 때라 부서도 따라서 많이 변했다. 실은 덕분에 이 부서, 저 부서 두루 다 거치면서 넓게 배우는 과정이 되였다. 기자에 편집(그때는 절대적인 편역이였다), 후에는 판면설계, 교정까지 다 자체로 소화하기에 이르렀다. 섭렵범위도 경제에서 문화, 교육, 사회를 포함해 촬영까지, 스포츠를 제외하곤 다 두드리고 만져본것 같다. 신분도 기자에서 편집으로 또 해당 부서 책임자로 바뀌면서.

“인성교육”특간을 펴낼 때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가슴이 뿌듯해난단다. 공모활동과 함께 6년을 쭉 키워왔다. 남영전사장께서 내놓은 “인성”이란 제기법에 길림성위 해당 지도자마저 갸우뚱했다는 설, 그렇게 앞서간 제기법이였고 늦추면 안되도록 적시적인 제기법이기도 했다. 교육을 돌파구로 설정한 대담한 구상이였다.

4개 면을 채워야 하는 한편한편의 원고조직에서부터 년간 한번씩 진행되는 공모시상식 상장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심혈을 쏟지 않은것이 없다.

이 특간 6년을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함께 한 신정자, 그리고 선후로 거쳐간 허금화, 차영국, 리철수, 최화 모두가 “인성교육”의 식솔들이였다. 김정애는 지금껏 이때가 가장 다망하게 보냈던 몇년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그때 그들은 낮에 밤을 이어 뛰고 쓰고 하며 일했다. 말 그대로 일심전력으로 일을 했다. 일은 힘들어도 마음은 즐거웠단다.

그는 이 기간은 또한 인간적으로도 깨달음을 얻은 소중한 기간이였고 그가 한 집단의 책임자로서 그 어깨의 무게를 항상 느끼면서 저도 모르게 자기 단속을 약속하게 되던 시기였으며 그래서 다문 얼마만이라도 성장할수 있었던 계절이기도 했다고 돌이킨다.

그는 또한 발행을 영원한 추억으로 떠올린다. 쌍양구 촌락들을 오르내리기를 근 10년, 깨알줏기식의 발행이나마 촌주임, 촌서기들을 비롯한 산재지역 매 고마운이들의 순박한 사랑과 지지가 깃들어있다고 말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오늘만 같아라.” 이는 지금의 김정애(2)의 진실한 심경이다. 그는 지금의 전문편집일이 좋다고 한다. 일이 취미로 되여버린 오늘에 만족한다고 한다. 바쁠 때는 정신없이 돌아쳐도 그 스릴이 좋고 긴장끝에 따르는 느슨함과 성취감 또한 좋다고 한다.

“무슨 일이나 쉽게 하려면 아주 쉽다. 그러나 쉽게 해놓고 마음이 편치 않을바에는 어렵더라도 제대로 하고나면 내 마음에 부끄럽지 않게 된다.”

김정애(2)는 이를 정년퇴직까지의 신조로 삼으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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