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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걸-인터넷신문의 불모지를 일궈나가

편집/기자: [ 김성걸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1-28 15:10:56 ] 클릭: [ ]

[제2편] (하)

김성걸-인터넷신문의 불모지를 일궈나가

 
지난 세기 90년대 후반기에 들어 인터넷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중국 국내에도 인터넷 웹사이트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였다.

1999년 6월, 글로벌정보화시대에 발맞춰 길림신문사 광고부에서 광고기획 디자이너로 일하던 김성걸은 새로 부임되여온 차룡수사장에게 길림신문사에서도 인터넷 웹사이트를 개설할것을 제안했다.

10월초에 연길로 출장 온 차룡수사장이 김성걸을 만나 본사에서 이미 박문희부총편집한테 사이트개설책임을 맡기고 일을 다그치고있다고 전했다. 사이트개설에 30만원의 자금이 있어야 하는데 그 모든 비용을 한국회사에서 부담하고 길림신문사에서는 뉴스만 제공해주면 나머지 사이트 관리와 운영 모두를 한국회사에서 책임진다고 했다.

차룡수사장의 소개를 듣고난 김성걸은 기쁨보다는 우려가 앞섰다. 김성걸은 1996년부터 인터넷을 접촉하면서 웹사이트를 통해 기업고객들에게 필요한 정보검색과 정보제공 써비스를 해오면서 줄곧《길림신문》웹사이트를 꿈 꿔왔다. 한편 홈페지제작을 자습하면서 사이트 개설, 운영에 관한 국가 정책과 규정 등도 틈틈이 료해해왔다. 정책에 따르면 언론매체는 절대로 국외 단체나 개인과 손 잡고 인터넷사이트를 꾸릴수 없다. 보안문제로 뉴스 사이트 시스템도 외국인이 개발한 프로그람을 그대로 사용할수 없었다.

김성걸의 설명을 듣고난 차사장은 이튿날 그와 함께 장춘본사로 출발했다. 한국회사에 맡겨 제작중인 홈페지에 대한 확실한 점검을 위해서였다. 장춘에 도착해 차룡수사장은 길림신문사의 중층이상 간부들을 모두 데리고 사이트를 제작하는 한국회사로 찾아갔다.

약 3개월 동안 추진해온 《길림신문》웹사이트 기본틀이 완성되였다.《길림신문》타이틀에 뉴스란 한개와 벼룩시장 등 정보성 란들이 줄 져있었다. 한마디로 매체의 타이틀을 건 정보사이트였다.

홈페지 구성과 매개 란들을 체크해보고 한국회사측의 사이트에 대한 설명을 귀담아듣던 김성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차룡수사장도 데리고 간 기타 일행을 모두 밖으로 불러내왔다. 신문사로 돌아오는 도중 조용한 길가에 차를 멈춰세우고 모두들 김성걸의 견해를 들어보았다.

사이트 도메인이 국가규정에 맞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설치한 사이트서버를 정책적으로 허용하지 않는다.

국가 보안상 언론사의 웹프로그람은 외국에서 개발한것을 그대로 사용할수 없다.

제작된 사이트 자체가 언론매체를 위주로 하는 뉴스시스템이 아니라 정보를 위주로 하는 커뮤니티이다.

운영관리비 총 30만원이란 지금 사이트 초기운영에 부적절한 지출이다.

김성걸은 이상 몇가지 문제점들을 말하며 신문사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자체로 기획하여 웹사이트를 구축할것을 제기했다.

새 천년을 맞으며 인터넷신문을 개설하려는 지도부의 결심은 벌써 굳어졌던것이다. 지도부에서는 김성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한편 그에게 인터넷 웹사이트 개설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을 맡겼다.

1993년 6월에 길림신문사 광고부에 입사한 김성걸의 전공은 전자계산기가 아니였다. 그는 청년시절에 문학의 꿈을 품고 1987년에 연변대학 문학창작반을 졸업한후 고향 료녕으로 돌아가 《갈피리》라는 문학종합지를 꾸렸다. 《갈피리》잡지는 당시 료녕성에 우리말 잡지가 없었던 공백을 메웠을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처음으로 자체 출판, 발행의 경영모식으로 조선족문단에서 인기를 모으는 잡지로 부상되기까지 했다.

문학청년으로부터 광고인으로, 광고인으로부터 다시 컴퓨터기술자로, 그는 항상 배우면서 남보다 앞장서 달리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였다.

새 천년을 코앞에 두고 2개월내에 뉴스사이트를 개통시킨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규정에 따라 우선 인터넷뉴스출판허가를 받아야 했고 웹프로그람개발, 웹디자인, 홈페지 제작을 해야 했으며 사이트운영을 위한 인터넷 및 컴퓨터 시설들을 갖춰야 했다.

김성걸에게는 출근일과 휴식일이 따로 없었고 낮과 밤이 따로 없었다. 그는 우선 연변세종인터넷회사 최경리를 모셔다 사이트개발팀을 뭇고 인터넷신문 시스템개발, 홈페지제작을 맡기고 정부의 해당 규정에 따라 뉴스 사이트 개설보고서를 들고 연길에서 장춘으로, 길림성출판국 등 해당 부문을 찾아다녔다.

또한 사이트건설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연길 제1백화점, 제2백화점, 제3백화점, 연길 진달래음식회사, 연길일본어학교, 연길조선족복장학교 등 현지 기업단위에 광고기획서를 들고 다니면서 광고를 유치했다. 어렵게 모아진 광고비를 들고 김성걸은 다시 심양으로 사이트 개설, 운영 설비를 사러 갔다. 당시 연길컴퓨터시장에는 디지털사진기며 스캐너 등 사이트운영에 필요한 시설들이 없었다.

12월도 막 지나갈무렵 드디여 홈페지가 기본적으로 완성되였다. 지면신문에 따른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란들을 기본으로 하는 뉴스심사발표시스템과 회원시스템, 네티즌댓글시스템 등도 모두 설치되였다. 뉴스발표, 회원가입, 댓글쓰기 등 사이트의 모든 시스템에 대한 테스트를 마치고났을 때는 이미 한해도 막 저물어가는 12월 30일 늦은밤이였다.

1999년 12월 31일 금요일, 김성걸, 김영규, 최승호 등 연변분사에서 무어진 림시 사이트운영진에서 사이트에 올릴 뉴스들을 지면신문에서 선정하고 타자했다. 이날 모두가 점심과 저녁을 굶었지만 희망찬 새 천년의 새아침과 함께 고고성을 울릴 《인터넷 길림신문》사이트에 흥분되여 배가 고픈줄도 몰랐다. 한밤중이 되여서야 사이트의 모든 란에 뉴스를 채우고 발표대기상태에 들어갔다.

담배 한대 태울 시간도 되지 않아 2000년 1월 1일 0시가 다가왔다. 각자 모니터앞에 앉은 김성걸, 김영규, 최승호는 미리 올린 뉴스들을 인터넷 웹사이트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삼라만상이 깊이 잠든 고요한 밤, 숨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긴장속에 반시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 드디여 《인터넷 길림신문》이 새 천년의 종소리와 함께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였다.

김성걸, 김영규, 최승호는 한밤중 사무실에서 《인터넷 길림신문》의 탄생을 위해 자축하면서 환성을 올렸다. 너무나도 뜻 깊은 밤이였다. 흥분에 젖어있던 그들은 드디여 사무실에서 컵라면으로 주린 배를 달래고 그대로 쏘파에 쓰러진채 달콤한 꿈나라로 들어갔다…

2005년 9월 2일, 장춘에서 진행되는 동북아국제박람회를 앞두고 《인터넷 길림신문》이 중국길림넷 조선어채널로 업그레이드되였다. 웹사이트는 개설보다도 장기적인 운영관리가 더 어려운 일이다.

당시 길림신문사의 재력, 인력으로 볼 때 해마다 10여만원이 들어야하는 운영비 부담이 너무도 컸다. 사이트가 원활한 발전을 가져오자면 반드시 외부적인 경제지원을 받아들여야 했다.

김성걸은 과감하게 사이트도급제 운영방안을 본사에 제기했다.

성으로부터 위임을 받고 온 남영전사장이 지도부의 검토를 거쳐 김성걸과 도급계약을 체결했다. 자주운영권을 얻은 김성걸은 우선 동북아박람회로부터 시작해 대형행사에 대한 현장보도를 조직하고 전국 각지로부터 특약기자를 모집하여 길림성에 립각해 전국, 전세계로 나가는 인터넷신문을 만들기에 힘을 기울였다.

날이 갈수록 인터넷신문의 내용이 풍부하고 다채로와졌으며 인터넷신문의 독자와 뉴스 클릭수도 높아지면서 《길림신문》뉴스의 영향력도 커졌다.

2010년 9월, 《길림신문》 창간 25주년을 맞으며 《인터넷 길림신문》은 다시 중국길림넷 조선문판으로 정부의 중점뉴스사이트로 업그레이드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당시 길림성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부장인 순봉서가 직접 사이트 개통식에 참가하여 개통버튼을 눌렀다.

중국 우리 말 뉴스 1번지로 자리매김하고있는 《인터넷 길림신문》은 현재 일 백여만차의 클릭수로 우리 민족과 국가의 대내외홍보에 큰 역할을 하고있다.

“래일의 삶을 오늘에 살자.”

이것은 김성걸의 삶의 신조이다. 미래를 생각하고 래일의 일을 오늘로 앞당겨 하다보면 앞선 의식과 새로운 일들을 만들수 있다는것이 바로 김성걸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김성걸은 그렇게 항상 쉼없이 꾸준히 배우고 혁신적인 일들을 해오면서 괄목할만한 성과들도 적잖게 따냈다. 그는 다년간 길림신문사, 길림일보신문그룹의 선진사업자, 2008년 제4차 중국 길림동북아투자무역박람회 선진개인, 2010년 중국길림넷 조선문판 창건 특수공헌자 등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2011년에는 중국신문상(국제전파류) 2등상(공저)을 비릇한 국가급신문상과 성급신문상을 여러번 받아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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